독일과 코스타리카의 개막전. 독일의 막강한 화력과 코스타리카의 끈질긴 추격이 어울려 멋진 경기를 만들어 내며 2006 독일월드컵은 그 장대한 막을 올렸다. 조별예선. 한국은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하나인 프랑스, 젊은 혈기로 뭉친 스위스, 월드컵 처녀출전의 부푼 꿈 가득한 토고와 함께 G조에 속하게 되었다. 

  조별예선 첫 경기 토고와의 일전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어느 팀에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에게는 특히나 중요한 경기였다. 조별예선을 통과하고 결승토너먼트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첫 경기부터 잘 풀어나가는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본선진출국도 강조하는 바이다. 그동안의 역대 월드컵에서 첫 경기를 승리한 팀이 16강에 진출할 확률이 무엇보다 높았던 것은 첫 경기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가장 약체로 꼽히는 토고와의 첫 경기를 이기는 것은 중요했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불명예스러운 역사가 있다. 지금까지 월드컵 출전 역사상 2002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월드컵을 제외하면 원정에서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서글픈 역사 말이다. 토고와의 첫 경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우리나라 대표팀의 첫 경기에 대한 부담감은 컸을 것이다. 약체 팀을 상대한다는 이점 그 이상으로 우리나라 대표팀에게는 부담감으로 인한 긴장이 컸을 것이고, 그만큼 아데바요르는 무시무시해 보였다.

 

  문제는 수비불안이었다. 이것이 아데바요르 같은 정상급 스트라이커를 보유한 토고가 우리에게 위협적일 수 있는 커다란 이유가 된다. 그리고 그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월드컵 첫 출전에 빛나는 토고에게 토고 월드컵 역사상 첫 골을 내주게 된 것이다. 이 골은 토고의 이번 월드컵 유일의 득점으로 기록되었다. 전반전 우리나라 선수들은 첫 경기에 대한 부담감에서 오는 긴장이 컸었던 듯 하다. 특히 월드컵에 첫 출전한 어린 선수들의 잣은 실수가 많았다. 어쩌면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뛴다는 긴장감을 이겨내기는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94 미국월드컵 독일 전에서 전통의 강호 독일을 맞아 필요이상으로 긴장한 가운데 전반 초반 3실점한 또 하나의 서글픈 역사가 떠오르기도 하면서, 전반전을 1실점으로 마감한 것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후반 들어서 우리나라는 공격수를 늘려 파상공세에 들어갔다. 안정환의 투입이 결정적이었으며, 박지성의 활약이 더욱 두드러졌다. 박지성의 페널티에어리어 앞에서의 드리블에 의한 상대팀 파울유도와 퇴장은 우리나라의 역전 드라마의 서막이었다. 이천수의 멋진 프리킥으로 동점, 곧이어 안정환의 더욱 멋진 중거리 슛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역전을 하고 난 10여분 동안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추가득점하지 못한 것이 결과적이지만 뼈아팠다. 공돌리기에 대한 논란도 있었지만, 추가득점을 노리는 적극적이 플레이가 아쉬웠다고 본다.

 

  결국 첫 경기는 ‘드라마틱’하게 승리했다. 역사적인 날이었다. 우리나라의 월드컵 출전 역사상 원정경기 첫 승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충분한 승리였다. 이날 우리나라 ‘태극전사’들은 첫 경기의 중요성과 원정경기 첫 승을 위한 꼭 이겨야만 하는 부담감을 안고도 잘 ‘싸워주었고’ 결국은 이겨낸 것이다. 여기에 ‘투혼(鬪魂)’이라는 수식어는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우리나라 대표팀은 “투혼을 불살랐다.”

 

  두 번째 경기는 첫 경기에 대한 승리, 그것도 원정경기 사상 첫 승의 기쁨을 아예 접어두어야 할 정도로 승리는커녕 비기기도 어려운 강팀 프랑스와의 일전이었다. 프랑스는 누가 뭐래도, 지단이 아무리 노쇠했다고 해도, ‘팀가이스트’가 모자란다고 해도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최강의 하나이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일전은 어느 정도 방법이 나와 있는 경기였다. 2002 월드컵의 재현 혹은 그 이상을 꿈꾸며 독일로 날아온 대표팀인 만큼, 2002년의 포르투갈과의 경기는 프랑스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명백히 알려주고 있었다. 프랑스의 중심 지단에게 투입되는 공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문전 앞에서의 앙리의 움직임을 이중 삼중으로 봉쇄하는 작전, 그리고 프랑스의 11명의 선수들을 우리나라의 강력한 체력을 앞세워 강한 압박으로 밀어 붙인다면 승산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반전, 강한 압박은 그리 잘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 앙리에게 선취점을 허용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프랑스의 파상공세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정말 ‘투혼’을 보여주며 막아내었다.

 

  후반. 승부의 시간이 돌아왔다. 전반전과는 좀 다른 양상이었다. 간간이 프랑스의 날카로운 공격에 위기도 있었지만, 전반전보다는 더 적극적인 압박과 공격으로 한국은 프랑스의 떨어진 체력을 바탕으로 결국 동점골을 터트렸다. 말 그대로 ‘기적’, 여기에는 또한 ‘투혼’의 수식어를 붙일 수 있겠다. “태극전사의 투혼으로 이뤄는 기적.”

 

  1승 1무. 스위스가 토고를 2 : 0으로 격파하며 우리와 승점 4점으로 동률을 이뤘지만, 골 득실에서 1점 앞서 한국은 조 2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G조에서 최강으로 꼽히는 프랑스는 첫 경기 스위스와 그리고 두 번째 경기 한국과의 경기에서 졸전 끝에 2무를 기록하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며 조 3위. 우리나라는 16강에 진출하기 위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토고 전에서의 추가득점 실패의 아쉬움은 스위스를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2무를 기록한 프랑스의 토고 전 승리는 불을 보듯 뻔하며, 그것도 대량 득점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하더라도 우리는 프랑스에 골 득실에서 뒤져 탈락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우리 ‘태극전사’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각오가 높을수록 부담은 커지는 법.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6월 24일 토요일 새벽 4시. 2006 독일월드컵의 조별예선의 마지막 경기이자 우리나라의 16강 진출이 결정되는 결전의 날이 온 것이다.

 

  스위스와의 경기는 맞불작전. 한국은 공격수를 평소보다 많이 투입하며, 초반부터 강공으로 밀어붙이는 작전으로 임했다. 작전은 옳았다. 하지만, 수비불안이 과제였다. 조직력이 강하고 빠른 공격과 세트플레이가 장점은 스위스를 막아내는 것은 공격이전에 선결해야하는 문제이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한국은 결전의 각오만큼이나 ‘투혼’을 펼치며 잘 막아낸 듯 하다.

 

  하지만 한국의 맞불작전에서 결정적 미스가 2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박주영의 투입이었다. 박주영은 이번 월드컵에서 크게 기대되는 선수였지만, 그 기대를 충족되지 못했다. 박주영은 첫 출전인 만큼 긴장해 보였고, 스위스 선수들은 강한 체구에 여실히 밀렸다. 결국 박주영은 스위스의 장점은 세트피스의 상황을 만들어주는 반칙을 범했고, 우리나라는 뼈아픈 실점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었기에, 전반전 끝날 무렵 한국은 공격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전반전 1 : 0.

 

  후반 시작. 박주영이 계속 투입된 가운데, 후반전에 돌입했다. 왜 박주영을 빼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과 불안 속에 경기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박주영은 그 의문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플레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은 후반 들어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그 와중에 프랑스의 선취점, 그리고 추가득점이 이어지면, 토고를 2 : 0으로 이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는 스위스를 이기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후반 초반 안정환의 투입. 승부를 보겠다는 얘기인데, 나는 이것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맞불작전으로 나서는 것이었다면 안정환을 선발로 내세웠어야 한 것이 아닌가? 그나마 결정력이 있는 안정환은 조재진의 센터플레이를 받쳐줄 가장 적절한 대안이었다. 그래야 박지성의 플레이가 살아난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후반의 시작은 안정환이었어야 했다. 안정환의 투입이 그 시기가 늦었다는데 아쉬움이 있다. 박주영은 아직은 미완성이었기에 박주영으로 띄운 승부수는 스위스와의 결전의 비중에 못 미치는 카드였다. 이것이 우리가 골을 기록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또 하나의 결정적 패배 원인은, 심판이었다. 명백한 핸드링이 3번 이상 무시되었고, 반칙 상황은 절대적으로 스위스에게 유리하게 판정되어졌다. 그것을 봐준다고 하더라도, 주심과 선심의 합작으로 이루어낸 아무도 속일 수 없는 ‘사기’는 차마 눈 뜨고 못 봐주는 넌센스였다. 오프사이드 반칙이 명백했고, 선심은 기를 높이 들었지만, 이내 프라이의 골이 선언되고, 선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를 으쓱대고, 주심은 이래저래 항의하는 우리 선수들에게 경고를 주느라 바쁘게 뛰어다녔다. 스위스 추가득점 2 : 0.

 

  지금 생각하니, 또 열이 받는다. 결국 한국은 16강 좌절. 2002년을 제외하고 가장 유력했던 16강 진출은 한편의 넌센스로 물 건너갔다.

 

  나는 한국이 스위스 전에서도 나름대로 잘 싸웠다고 생각한다. 스위스가 더 잘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은 골을 넣지 못했다. 심판이 명백한 페널티 장면에서 외면한 것도 이유일 테지만, 골을 넣을 선수를 고르는 데에 명백한 미스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은 심판일 터이다.

 

  하지만 이 패배에도 우리 ‘태극전사’들은 ‘투혼’을 불태웠다. 잘 ‘싸웠다’는 말을 나도 해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온갖 매스컴을 통해 우리나라 대표팀 소식들을 찾아보고 들으면서, 한국의 모든 경기들은 선수들의 ‘투혼(鬪魂)’으로 점철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투혼(鬪魂)’, 이 한자어는 명사로써 “끝까지 투쟁하려는 기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투혼을 불태우다”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이 투혼이라는 말은 우리와 매우 친근하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우리는 수출의 목표달성을 위해 ‘투혼’을 불살라야 했다. 축구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북한과 일본을 만나면 언제나 ‘투혼’을 불살랐다. 이것은 1980~90년대에도, 그리고 2000년을 넘어선 지금에도 아주 자주 우리에게 나타난다.

 

  가장 불티나게 ‘투혼’이 불살라진 것은 2002년 월드컵 당시가 아닐까 한다. ‘투혼’을 불사른 끝에 한국은 세계 4강 신화를 이루어냈다. 내가 생각해도 이것은 ‘투혼’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왜 아직까지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은 ‘투혼’을 불살라야 하는가? 나는 이것이 조금은 못마땅하다.

 

  축구에 관해서만 이야기 하자면, 1994년 스페인, 독일과의 경기에서, 1998년의 마지막 경기였던 벨기에 전에서, 그리고 2002년 4강 신화를 이룩한 7경기에서 그리고 토고, 프랑스,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모두다 우리 선수들은 ‘투혼’은 불살라졌다. 무엇보다도 나는 왜 우리 선수들이 ‘투혼’을 불사르는 데까지 가야하는 모르겠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꼭 ‘투혼’까지 불살라야 되는 것인가? 아마도 ‘투혼’은 최선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최선(最善)’, “최선을 다하다”같이 쓰이는데, 이것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모두 다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투혼’은 그 능력이외에 선수들의 ‘혼’까지 빼내어 불에 살라야 한다. 어쩜 이리 잔인할 수가.

 

  우리가 투혼을 불살라야 했던 예전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서글픈 역사가 고개를 든다. 가깝게만 가도, 한국전 이후에 폐허가 된 나라를 일으키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최선’보다도 ‘투혼’이 필요했다. 그럴 수 있다고 보자. 먹고살기의 논리에 의해 공업화가 가속되면서 저 공장의 노동자들은 제임금 못 받고 먹을 거 못 먹으며, 밤잠까지도 설쳐가면서, 자신의 손가락이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잘려나가도, 갯값도 못 받고 내버려져도, 수출목표 달성위해 이 ‘투혼’을 불살라야 했다. 결국 그 ‘투혼’이, 이 4강 신화와도 같은 경제성장의 밑거름, 아니 그 본체가 되고도 남는다.

 

  이 ‘투혼’은 우리나라 축구에서 또한 너무도 많이 불살라졌다. 한국의 척박한 축구환경에서 선수들의 ‘최선’으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목표를 요구했다. 결국 ‘투혼’이어야 했다.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서도 그들은 ‘투혼’을 끄집어내야 했다.

 

  어쩌면 이 축구에서 선수들에게 ‘투혼’을 더욱 요구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더라도 언론은 선수들의 ‘투혼’을 강조했다. 이것은 축구 자체에 대한 것보다도, 조국을 위한 ‘투혼’이었다. 선수들은 조국을 위해서 싸웠다. 그들도 그래야만 하는 줄로 알고 싸운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축구선수들의 ‘투혼’은 그대로 모든 국민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러한 ‘투혼’의 정신이야 말로 본받아야 마땅할 것이라고 말이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이나, 라디오 등등, 모든 매체들은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축구, 그것도 대표팀 간의 경기, 그것도 북한을 만나거나 일본을 상대하는 경우, 그리고 멀리 외국에서 펼쳐지는 월드컵에서, 우리 선수들은 ‘투혼’을 불살랐다고 떠들어댄다.

 

  왜 ‘투혼’이어야 하는가? 나는 이제 ‘투혼’은 집어치우라고 말하고 싶다. 선수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혼까지 빼서 불태우라는 말인가? 최선만을 다하면 안 되는 것인가? 축구만을 보자면, 열악한 환경을 전혀 개선하지도 않으면서,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미래 유소년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도 안 하면서, ‘투혼’, ‘투혼’, ‘투혼’. 이런 못돼먹은 심보가 어디 있는가?

 

  2006 독일월드컵 조별예선에서 탈락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어제 입국했다. 이제 이들에게 이 못돼먹은 ‘투혼’이라는 말은 좀 거두어 주었으면 한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그들의 ‘혼’까지 빼지 그랬냐고 말하면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최선을 다해서 도달하지 못한 것이라면, 최선을 다했을 때 도달할 수 있도록, 그 역량을 높여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 될 것이지, 그러지도 못하면서, 그 알량한 ‘투혼’을 요구하는 구시대적 발상을 이제 접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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