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근대(近代)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 역사의 시대 구분은 대단히 자의적이다. 중세라는 시대는 그대로인데, 근대는 자꾸만 길어진다. 상대적 불합리. 近代라는 설정 자체가 이런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는 “지나간 지 얼마 안 되는 가까운 시대”를 말한다. 우리 역사 구분에서는 현대를 설정하고 있다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에 현대는 없다. 왜 그런가? 역사는 과거를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는 단 1분 1초도 우리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내온 모든 것이 근대이다. 어디까지를 ‘가까운 시대’라고 할 것인가?

 

  따지자면 대단히 골치 아프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근대’를 받아들인다. 역사 연구자들이 던져준 근대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시대 구분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진짜 골치 아프다. 역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시간을 쪼개어 가질 수 있다는 발상은 어쩌면 신의 능력을 소유해서나 가능할 수 있는 가공할 상상이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고, 따라서 신적 능력의 발휘자(發揮者)들이 던져준 근대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도리 밖에 없다.

 

  과연 근대란 무엇인가? 아니 근대적 사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는 이러한 근대적 사유에 대한 반란을 시도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이 애매모호한 ‘근대’라는 시대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데에서 앞서 말했던 역사의 시대 구분의 위대성을 따지는 것은 자칫 불경죄에 해당하는 신격모독일 수 있으므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타협을 하고 간다. 아하 이 ‘근대’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로구나!

 

  저자 고미숙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최고의 지성 연암 박지원의 역작 ꡔ열하일기ꡕ를 새롭게 읽어낸 ꡔ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ꡕ에서였다. ꡔ열하일기ꡕ라는 그 방대한 고전을 이처럼 재미나게 읽어내는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던 차에,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를 만나게 된 것이다. 고미숙 선생이 ꡔ열하일기ꡕ를 얼마나 재미있게 읽어 냈던지, 어지간한 전공자나 완독할 법한 이 방대한 분량의 ꡔ열하일기ꡕ가 일약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게 했으니,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겠다.

 

  ꡔ나비와 전사ꡕ는 그런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아니 고미숙 선생의 읽기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역작이다. 여기서는 이 ‘근대’를 읽어내는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하나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싶다. 근대라는 거대한 산에 바위나 칠 법도 못한 계란을 던지는 형국이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반란은 반란이다. 어쩌면 ‘근대’는 하나의 거대한 ‘리바이어던’이 아닐까? 이 책에서 저자는 이전의 시대와는 단절된 근대를 주장한다. 즉, 근대라는 리바이어던은 돌연변이라는 것이다. 좀더 확실히 하자면, 시대의 단절은 불가능하므로, 근대가 아닌 근대적 사유가 이전의 사유와는 완연한 단절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근대적 사유라는 것, 근대성이라는 것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복시켜야만 할 탈근대적 사유, 탈근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근대에 대한 반란, 혹은 혁명.

 

  근대는 왜 ‘리바이어던’인가? 저자는 이 책의 1장에서 9장까지를 이 근대의 모순들을 파헤치는데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대략 ‘시간’, ‘인간’, ‘性’, ‘몸’, ‘앎’이라는 큰 테제들을 가지고 여기서 잠복해 있는 근대적 사유의 ‘괴물성’을 밝혀내고 있다. “시간이 단수가 된 건 20세기 근대의 산물이다. … 오직 인간의 활동만으로 역사를 구성하게 되면서 시간은 단 하나의 척도로 가늠되었다.”(p.22.) ‘단 하나의 척도’는 바로 ‘돈’이다. “시간이 돈”이라는 것이다. 근대의 괴물성은 바로 시간, 속도의 균질화, 혹은 화폐화에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일컬어 “속도의 파시즘”이라 명명한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인정해야할 근대의 모순이다. 저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어떻게 “사랑하는 이와 뜨겁게 교감하는 시간과 증오와 분노로 마음지옥을 헤매는 시간, 혁명적 열정으로 바리케이드 위를 지키는 전사의 시간이 동질화될 수 있”을 수 있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면서 이 근대의 속도는 우리를 “시간을 수로 계산하고, 그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강제”한다.

 

  지금까지는 이 책의 1장 서두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의 시간, 속도의 불합리성 혹은 모순들을 다양한 예에서 찾아내고 있다. 재미있던 것 중의 하나는 이 근대적 시간화, 속도화의 상징인 ‘기차’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우리를 평범하게, 혹은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다양한 소재에서 이 근대적 사유의 맹목성과 파시즘적 성격을 찾아내고 있다. 유쾌, 상쾌, 통쾌, 그리고 쓰라린 웃음!

 

  2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다분히 논란의 소지가 있는 예민한 주제이다. ‘인간’을 테제로 한 장에서 ‘종교’를 논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아주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왜? ‘신성불가침’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근대’에 대한 규정만큼, 아니 그 이상이나 신적 영역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생매장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종교’ 안에도 근대의 괴물성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내재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겉으로 뚜렷이 인식될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에 대한 반성 혹은 전복.

 

  3장과 4장은 ‘性’이라는 주제에서 역시 근대라는 리바이어던을 탐색하고 있다. ‘변강쇠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게 다루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근대의 전형적 괴물성을 유감없이 끄집어내고 있는 뜨거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9장까지의 내용은 이 근대의 리바이어던을 찾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소재를 통해. 소월과 만해, 그리고 허준까지도 등장하니 말이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가볍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가볍게 다루어야 한 책 안에서 많은 소재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만큼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 될 수 있으면서도, 단점이 될 여지가 많다. 그것은 근대라는 이 거대한 괴물을 그렇게 가벼이 다루어서는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고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닌 기암절벽 거대 산치기가 아닐 수 없다.

 

  끝의 2장에서는 이런 근대성, 혹은 근대적 사유의 리바이어던을 전복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탈근대의 비전을 탐색한다. 그 비전은 연암에게서 나오고 있다. 아 이 또 무슨 괴이한 일인가? 18세기 중세의 문인이 21세기를 넘어 탈근대를 추구하는 한 지식인에게 그 비전으로 제시되고 있다니! 오 놀라움! 그 놀라움으로 그 비전을 읽다보면, 에휴, 또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니 거대한 괴물과 맞선 나비, 혹은 나비의 꿈.

 

  이 책 제목 “나비와 전사”에서 나비는 바로 박지원이다. 그럼 ‘전사’는? 다름 아닌 푸코이다. 이 책 각 장의 시작은 나비와 전사의 공통된 사유 속에서 끄집어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절단과 채취를 통해! 그런데, 근대적 리바이어던에 맞서 싸우기로 하고서는 정작 전사는 숨어버리고 나비만이 고군분투하는 형국이라니! 이것은 어쩌면 저자가 근대에 대한 맞섬에서 살짝 꼬리를 내리는 기미로 보일 수도 있으려니와, 다정한 애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반란은 하되, 혁명이 아닌 반란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를 읽으면서, 나는 근대적 사유의 모순들을 새삼스럽게 되새길 수 있었다는 것에 가장 큰 보람과 가치를 느낀다. 그 거대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고 가벼운 터치는 다분히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곧 이것은 약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 그 깊이를 줄이고 있는 것은, 다분히 체계적이지 못한 서술이기 십상이다. 그만큼 약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체계라는 것 또한 근대적 사유에 다름 아닐 수 있기에 뭐라 딱부러지게 말하기 꺼려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좋은 책 한 권을 만난 후의 보람은 크다. 저자 고미숙씨가 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탐구, 곧 근대에 대한 반란, 탈근대에 대한 비전 찾기는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하지만 근대와 싸우는 나비만 있고 전사를 어디를 갔는지? 진정한 싸움은 전사의 등장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나비와 단짝을 이룰 전사를 찾아내는 것이 남겨진 과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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