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
조너선 울프 지음, 김경수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마르크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는 현재형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反問)할 수 있다. “에이, 이 사람아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마르크스가 뭐가 무서운가?” 그렇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반도 남단(南端)에 반공(反共)정권이 들어서고 7~80년대의 군사정권하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는 그 이름 자체의 언급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절이 변했다 한다. 90년대 이후 이 땅에 민주화의 토대가 굳건히 서고 이제는 새로운 천년의 도래와 함께 그런 무서운 시대는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마르크스는 여전히 무시무시하다. 왜 그런가?

 

  ‘맑스’라고 한다면 더 친근감(?)이 들지 모르지만 현재 외래어 표기법상 ‘마르크스’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맑스’라는 표현이 더 현실발음에 가까우면서('Marx'는 1음절의 단어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보다는 ‘맑스’(또는 [막스])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더욱 강한 분위기를 띄는 것이 ‘마르크스’보다 더욱 ‘마르크스’스럽지 않은가 생각되기도 한다.

 

  하여간에 ‘맑스’면 어떻고 ‘마르크스’면 또 어떤가? 굳이 구분하자면 이전의 군사정권하 악마시(視)되어 왔던 마르크스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맑스’가 친근할 터이고, 현재에는 그냥 마르크스일 터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마르크스는 어떠한가? 왜 나는 아직까지도 마르크스가 ‘무시무시’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이 변형될 수 있다. 아니 그것이 오히려 현문(賢問)이겠다.

 

  “마르크스는 현재에도 유효(有效)한가?” 즉, 오늘날―구(舊)소련의 공산정권이 무참히 무너지고 미국을 대표로하는 자본주의의 재편, 그리고 그 속에서 자본주의와 서서히 타협해 가는 중국을 보라―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르크스의 사상은 이미 실패한 사상이 아닌가? 그러한 마르크스를 현 시대에도 읽어야할 필요성이 있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한 한 마디의 답변이 바로 ‘여전히 무시무시한 마르크스’라는 말에 제대로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마르크스는 여전히 무시무시하다. 현대의 학자연(學者然)한다는 사람이라면 마르크스를 피해갈 수 없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마르크스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녹아들어가 있다. 즉, 마르크스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무서운 노릇(?)일 테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르크스의 유효성을 강하게 입증한다. 그 사실인즉, 마르크스의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예언적 통찰이 그것이다.

 

  예언적 통찰(豫言的通察)이라니?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린가? 그렇지 않다. 현대의 자본주의의 폐해가 이미 마르크스의 저술에서 드러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마르크스는 현대의 자본주의의 비판적 성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상가이다. 그래서 그가 여전히 유효하며, 여전히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지 언 100여년이 넘었다. 과연 100년의 후의 미래를 마르크스는 눈앞에 놓고 보듯이 예리하게 서술해내고 있다. 이것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전혀 뒤질 바 없지 않은가?

 

  결국 마르크스는 무시무시하다. 이런 마르크스를 알지 않고서는 현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지성인으로서의 명함을 내밀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인이고자 한다면 마르크스를 배워야 한다는 소리인데, 또한 무시무시한 것이 마르크스를 배우는 것일 터이다. 《자본론》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들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는 것, 그 뿐인가?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한 마르크스주의의 방대한 양의 이론서들을 접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히 ‘무시무시’함은 엄청나게 증폭되어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를 아는 것 또한 이렇게 무시무시하니 내 말이 또한 엄청나게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무시무시한 마르크스”

 

  이런 ‘무시무시’한 마르크스를 “한 권으로 보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역시 불가능(不可能)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이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마르크스를 ‘무시무시’가 아닌 ‘무시(無視)’의 태도로 대하는 불경(不敬)을 보이는 것이다. 헌데, 190쪽(차례와 찾아보기, 그리고 빈 페이지를 제외하면 끽해야 160여 쪽 밖에 안 된다.)의 그것도 규격이 B6(A4 용지의 절반도 안 된다.) 밖에 안 되는 책의 제목은 당당히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이다. 허, 이런 당돌한 이름을 붙이다니 웃음도 안 나올 일이다. 이런 당돌함과 무모한 이름을 내걸은 책이 어련하겠냐 하는 의심의 눈, 그리고 끝내는 이 책 또한 무참히 그 당돌함에 상처를 입는 것을 보겠다는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이 책을 읽어냈다고 일단은 고백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결과적으로 이 책이 표방한 제목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여러 저작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한 권’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에는 마르크스의 사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끔 하는 강한 힘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경우 독자가 이미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을 때에 그 텍스트가 가장 잘 읽히게 마련인데, 그것은 확실히 마르크스에게도 해당된다. …… 기초 지식을 먼저 갖춘 뒤 텍스트를 읽게 되면 그 사상가의 세부적인 생각을 평가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정확히 옳은 말이다. 또한 이것이 이 책의 목적일 수 있다. 마르크스의 깊은 수렁에 풍덩 빠져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자멸하기보다는, 마르크스의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사상의 바다를 잘 저어갈 배와 삿대를 마련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책은 그 배와 삿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남음이 있다.

 

  이 책의 구성을 살펴봄으로써 어떻게 이 책이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가를 보면, 2장에서는 초기 저작들에 나타나는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 요소들을, 3장에서는 마르크스의 전체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즉 지배적 개념인 ‘계급(階級)’, ‘역사(역사)’, ‘자본(資本)’에 대해 간명하면서도 이해하기 수월하게 서술해 내고 있다. 생각만 해도 따분하게 그지없는 이러한 개념들을 누가 뭐래도 ‘쉽게’ 설명해 내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것을 해내고 있으니,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4장에서는 “왜 여전히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일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Why read Marx today?”이다. 즉, “왜 오늘날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인데, 이 책의 근본적 목적이 담겨있는 주제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강하게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마르크스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좀더 유연하게 말한다면, 마르크스에게 가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무시무시한 마르크스에 정면 도전하게 만드는,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저작들의 저작들을 읽어내게 하는 ‘한 권’의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것이 이 책의 두 번째 장점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이 마르크스에게로의 안내자 역할을 더욱 충실하게 만드는 “참고문헌과 ‘깊이 읽기’를 위한 안내”의 역할까지 해내고 있는 자상함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이 한국어판으로 출판된 것을 전제한다면, 한국의 독자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한국어판 마르크스 참고문헌들을 보다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이 책과 아주 비슷한 책이 이전에 한 권 더 있었다. 그것은 시공사에서 펴낸 ‘로고스총서’ 시리즈로서 2번째인 데이비드 매클릴런의《마르크스(Karl Marx)》라는 책이다. 책의 부피와 체계가 매우 비슷한데, 이 책은 전체를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깊이 읽기의 안내서로서 참고문헌의 제시는 이 책이 훨씬 돋보이는 것이 사실이다.(이 책은 마르크스의 저작과 그에 대한 참고서적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한국어 출판물 목록을 따로 제시해 두고 있음을 밝혀 둔다.) 이 비슷한 두 책을 비교해 보면,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사상의 중심 요소들을 선별하여 보다 쉽고 평이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충실히 돕고 있으며, 마르크스 읽기의 필요성, 즉 현대적 마르크스의 유효성을 강조함으로써 마르크스에게로 강하게 이끌어 들이고 있다면, 매클릴런의 저서는 마르크스의 생애가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서술되면서 전체적인 마르크스 사상을 통찰력을 가지고 서술하고 있다.

 

  나는 이 두 책을 함께 읽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먼저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를 읽고 다음에 매클릴런의 저서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 이유는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가 보다 쉽고 간명하게 서술함으로써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서로서 읽는 이에게 부담감을 훨씬 덜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는 ‘한 권으로 보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이끄는 귀한 안내자로서, 전도자로서, 선생님으로서, 마르크스의 사상의 바다를 유유히 헤쳐갈 수 있도록 하는 작은 배로서, 삿대로서, 이 책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는 가치가 있고, 그 당돌한 제목 또한, 용서되고도 남음이 있다. 아 참으로 무시무시한 마르크스는 이 책을 통해 도전해 볼 만한 높이로 허리를 숙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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