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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
위 사람은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하므로 상장을 수여함.
19○○년 ○○월 ○○일
★★국민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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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들 받아봤을 법하다. 국민학교 시절 개근상 한 번 못 타본 나로서는 설상가상으로 공부도 잘 못해 그 흔해빠진 상장 한 번 변변히 타보지 못한 쓰라린 기억이 있다. 불쌍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국민학교 시절 그나마 받았던 추억의 상장이 한 두 장 쯤은 있다. 그런데 의문은 그 상장을 내가 왜 받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것은 절대 아니고, 그렇다면, '품행'이 참 '방정'맞아서 주었던 것일까? 그것도 의문인게, 내가 그리 '방정' 맞은 놈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무슨 놈의 상장은 '방정'맞은 사람에게 준다는 말인가?
다들 아시겠지만, 이 '방정'이란 말은 거의 극과 극의 다른 의미를 가진 동음이의어다. 하나는 한자어고, 하나는 순우리말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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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01 [명사]
찬찬하지 못하고 몹시 가볍고 점잖지 못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
¶ 방정을 떨다/입이 방정이다/시집갈 나이의 처녀가 조신하지 못하고 웬 방정이냐?/김 찰방이란 자의 요망과 방정 바람에 큰일을 잡쳐 놨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박종화, 임진왜란≫
방정02(方正) [명사]
‘방정하다’의 어근.
방정-하다 [형용사]
「1」말이나 행동이 바르고 점잖다.
¶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하므로 상장을 수여함.
「2」모양이 네모지고 반듯하다.
¶ 엄격한 규율을 느끼게 하는 방정한 해서체의 필치.
「3」『북한어』질서나 규모가 있거나 또는 체계가 서 있다.
¶ 수백 년을 묵은 이 잣나무 숲은 천연의 숲으로서의 너무나 방정한 줄을 이루고 있었고 또 그 첩첩한 년륜에 비해서는 너무나 배좁게 들어섰다.≪고난의 행군, 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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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방정'은 부정적 의미를 가진다. 흔히 '방정-맞다'와 같이 쓰여서 조신치 못하고 까부는 이에게 "이런 방정맞은 놈"이라고 일침을 가할 때 자주 쓰인다. 이 방정이 심할 때는 특별히 '오두방정'이라고 해서 "몹시 방정맞은 행동"을 말하는데, 흔히 "오두방정을 떨다", "웬 오두방정이냐!"와 같이 훈계조로 쓰일 때가 많다.
일상에서는 아무래도 이 우리말 방정이 자주 쓰인다. '방정이다, 방정맞다, 방정떨다" 등으로 어른들의 입말에서 흔히 나타난다. 요즘 젊은 애들은 특히나 "방정맞아서" 그런지 이 말을 잘 사용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한자어 '방정(方正)'은 긍정적 의미를 가진다. 모 방에 바를 정 자를 쓰니까, 풀이하자면, 모양(행동, 품행)이 바르다, 란 뜻이다. 나름 쉬운 말인데, 우리말 '방정'과 연관되어 좀 우습게도 들리는 말이다. 내가 볼 때 이 말은 90% 이상이 상장용 아닐까 싶다. 그 외에서 사용된 예를 찾기가 참 어렵다. 위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용례를 보다. '방정-하다'의 1번 뜻 외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모양이 네모지고 반듯하다."를 우리는 방정하다라고 잘 표현하지 않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말은 상장용어라고 해도 무방할 듯 싶다.
'방정(方正)'과 '방정'은 발음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둘 다 발음은 짧게 [방정]이다. 그러나 사용 문맥에 따라 우리는 기가 막히게 이 동음이의어를 구분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명사형 '방정'으로 나타나는 예를 거의 없다. 대부분이 어미를 동반하는데, 이 둘이 동반하는 어미를 상보적 분포를 보인다.
우리말 '방정'은 앞에서도 보았지만, '-맞다, -이다, ~ 떨다' 등과 결합하여 발화된다. 반면, 한자어 '방정'은 다소간 제한적이다. '방정-하다'에서처럼 거의 '하다'와만 결한하고 있는 것 같다. '방정-하다'를 활용하여 '방정한 ~'이라는 표현으로 대부분 쓰이고, 부사형으로 '방정-히-가 쓰인다. 이렇게 문맥과 활용 어미 등에 따라 거반 정확히, 자동적으로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어, 이 모양이 같지만 그 의미가 정반대인 두 단어는 혼돈스럽지 않기는 하다.
그런데, 상장 속의 '품행이 방정하여'란 말을 들을 때면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런 상장을 받은 사람중에 정말 품행이 방정(方正)했던 이가 있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방정맞아서 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하여간 재미있다.
이 외에도 다른 방정들이 몇 개 더 있다. 방정(方釘)은 "몸통의 단면이나 못대가리가 네모진 못"을 가리킨다. 그리고 수학의 '방정식' 등에서 보이는 방정(方程)은 "1세기 무렵에, 중국의 예수(隸首)가 만들었다고 하는 수학서인 ≪구장산술≫ 가운데 한 장(章). 일차 연립 방정식을 가감법(加減法)으로 푸는 것을 다루다"는 뜻을 가진다.
방정 중에 또한 멋진 의미가 담겨 있는 말로 방정(芳情)이 있다. '향기, 향내'를 의미하는 芳자와 뜻 정 자를 썼는데, 이 말의 뜻은 "향기로운 마음. 또는 꽃답고 애틋한 마음."을 가리킨다. 비슷한 뜻으로 "방심(芳心), 방의(芳意)"가 있다. 이 말은 "주로 편지글 따위에서, 다른 사람의 친절한 마음을 높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는 '방지(芳志)'가 있다.
하여간 방정에는 5개의 방정이 있다. 그런데 방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춘향전에 등장하는 주연급 조연, 바로 '방자'다. 방정 맞고, 방정 떠는 인물로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무래도 이 방자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방자는 사실 이름이 아니라, 말하자면 직책명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방자의 뜻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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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02(房子/幫子)
고려 시대에, 중국의 사신과 그 수행원이 머무는 사관(使館)에 속하여 허드렛일을 맡아보던 잡직.
조선 시대에, 지방의 관아에서 심부름하던 남자 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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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옛날에 방자는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의 그 방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많은 방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방자는 다른 뜻으로도 많이 쓰인다. "이런 방자한 놈"하면서 방자에게 호되게 야단을 칠 때에 쓰이는 또 다른 '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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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03(放恣)
‘방자하다02’의 어근.
방자하다 [방ː---] 「형용사」
「1」어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없이 무례하고 건방지다. ≒자방하다01(恣放―).
¶ 방자한 태도/어른 앞에서 방자하게 굴지 마라./방자한 발설을 거침없이, 목숨을 걸고 뱉어 낸 곽무출이는 오히려 자세조차 흩뜨리지 않고 태연자약하다.≪유현종, 들불≫/대장이 부하에게 말하는 공석에서 그따위로 무엄하고 방자하게 말대답하는 것을 어떻게 용서하란 말이냐.≪홍명희, 임꺽정≫
「2」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노는 태도가 있다.
¶ 나라에 큰 죄를 지어 이 섬에 유배 온 중죄인이 죄인 된 분수를 저버리고 방자한 생활을 했으니 이런 형벌을 받음은 마땅한 일이오.≪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모두 모두 빨리 취하고 싶어서 웃고 떠들며 방자하게 마셔 대고 있었다.≪박영한, 머나먼 송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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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자는 앞서의 한자어 방정과는 달리 부정적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한자어 방정과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활용하여 쓰인다. 거반 '-하다'와만 결합하여 쓰인다는 점이다. 아무튼 춘향전의 방자는 간혹 '방자'할 정도의 품행을 보이기도 하였거니와, 아무래도 '방정(方正)'과는 거리가 먼 '방정'맞은 방자(放姿)한 놈이었기도 했을 것이다.
방자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우리말의 방자는 "남이 못되거나 재앙을 받도록 귀신에게 빌어 저주하거나 그런 방술(方術)을 쓰는 일"을 가리킨다. 흔히 '방자질'이라고 하고, '방자하다' 혹은 '방자질하다'처럼 쓰인다. 남을 저주하고 무고(巫蠱)하는 것을 우리말로 '방자'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꽃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가리켜 '방자(芳姿)'라고 한다는 사실이다.
방정과 방자가 가지는 여러 동음이의어 속에는 참 거리가 멀고도 다른 의미들이 가득 숨겨져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런 낱말의 뜻은 사용되는 문맥과 상황 속에서 거의 전자동적으로 구분되어 사용하지만, 보다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사용한다면 보다 효과적인 언어생활과 풍부한 언어구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하여간 난 조금 방정맞은 데가 있어서 그다지 방정하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방자한 것까지는 아니니 방자 놈보다는 격이 좀 높은 데가 있으며, 때로는 참 예의바르고 아름다운 내 모습을 사람들은 방자하다고 칭송하기도 한다. 말놀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