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서평단 알림
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야흐로 나의 계절이다. 가로수 줄지어 늘어 선 길, 떨어지는 낙엽을 아삭아삭 밟으며, 깃세운 바바리코트 처량히 날리며, 걸어가는 처진 어깨의 뒷모습의 나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데, 나는 말라만 간다.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러 높게 보이고, 온갖 곡식이 차고 넘쳐, 말에게까지도 먹일 양식이 많이도 돌아가니 말은 살찐다. 그리하야 이 가을은 天高馬肥요 秋高馬肥다.

그래서일까? 하늘은 높푸르고 모든 것들은 살찌는데, 왜 남자들은 외롭고 쓸쓸할까?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바리코트나 팔아먹자는 상술만도 아닐 것이기 때문에. 하여간 내가 높고 외롭고 쓸쓸한 남자여서, 바야흐로 나의 계절이냐? 아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잖은가? 세상은 풍요롭고 하늘은 맑고 높아, 잔잔히 부는 바람이 살포시 책장을 넘겨주어 책읽기 좋다는 것일까? 그럴듯 하지만은, 이도 난 잘 모를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무슨 가을에만 읽자는 것은 아니잖은가? 하도 책을 안 읽는 현실속에서 태어난 고육지책만도 아닐 것이고. 여하튼 가을은 책읽기에는 좋은 계절임이 분명하고, 그래서 난 이 계절에 안성맞춤한 인간이길 바라고, 그래서 나의 계절이(었으면 한)다.

엊그제 촉촉히 가을비가 내렸다. 날은 하루가 다르게 싸늘해져만 간다. 가을은 선선해야 가을이다. 싸늘한 가을은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나를 상상하지 못하니 말이다. 벤치에 앉아서(혹은 누워서) 한가로이 시집을 펼쳐들고, 세월아 네월아, 아 가을은 외롭운 심사, 한 줄 시 속엔 이내맘을 담아 읊으면, 그 어찌 풍경 좋은 멋진 그림이 아니겠는가?

허송세월 보내는 것도 모자라 쓰는 것에도 죄다 허송한 떠벌림 뿐이니 참 한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변경하자면, 가을이고, 외롭기도 하고, 바쁜 일상들, 초조한 마음들 모이다 보니, 한가로이 책읽이나 편히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기에 구절구절 허한 마음 담아 늘어놓은 것이려니 해주기 바란다.

내가 책을 어줍잖게 심하게 읽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되지 못한다. 그도 하 긴 세월이라, 이제는 거반 활자중독에 가깝다고들 한다. 그래서 내 눈은 피곤하다. 버스 안에서도, 화장실에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내 눈은 한가롭지 못하다. 길을 걸으면서, 특히 출근하는 10분 남짓의 거리에서도 나는 책을 펼쳐들고 걷는다. 초기에는 이런저런 돌출물에 부딪혀 무릎팍도 솔찬히 깨졌다. 애꿎은 사람들에게도 충돌하고.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들이 거의 없다. 잘도 피해다닌다. 낯선 곳에서는 여전히 힘들지만.

책읽기에 푹 빠져지내는 축에서 나도 한가락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 분한테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 어줍잖게 책읽기는 어쩌고 저쩌고 떠들 수가 없다. 올해로 77세가 되는 이 분은 최근 『독서』라는 책을 펴내 나같은 풋내기들에게 한 수 가르침을 주신다.

   
  읽는 것, 그 자체에 홀려 있었던 것이다. 철들기 전 내가 제대로 사랑한 첫 대상은 읽기인지도 모른다. 읽기는 나의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읽기는 재미있고 신나고 신기했다. 매력덩어리였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해서, 심지어는 책읽기가 첫사랑이라고 고백하는 77살의 이 노교수는 이 책에서 자신의 독서인생의 자서전을 써나간다. 위의 인용문에 쓰인 과거시제는 모두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 이 분은 살아계시니까 말이다.

   
  모르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일지도 모른다. 삶은 그런 것이다. 그러기에 삶은 앎이 되려고 무진, 무진 애를 쓴다. 삶이란 모르는 걸 하나 하나 알아가는 과정이다. 삶은 앎을 향한 행보(行步)이다. 아니, 아예 삶을 앎이라고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
내게 앎 없이 삶은 없다. 앎이 삶이고 삶이 곧 앎이다. 그러니 내게 읽기 없는 삶 또한 있을 수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읽음이 앎이다. 앎은 삶이다. 그렇다면 읽기가 삶이고 삶이 읽기이다. 이건 자명한 일이다.
 
   

김열규 교수의 인생론이라고 해야 할까? 아님 독서론이라고 해야 할까? 삶은 앎(알아가는 과정)이고, 앎은 곧 읽기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읽기다. 이건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자명한 일이기에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살아온 여정을 풀어냈는데, 그게 죄다 책읽기 얘기다. 읽기로 시작해서 읽기로 끝나고 있다.(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오죽했으면 "책님들이시여! 고맙습니다!"며 큰절을 해댈까.

김열규 교수는 대중적으로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닌 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려지기 쉽지 않은 국문학이 전공이고, 그 중에서도 여러모로 소외된 구비문학과 민속학 쪽으로 연구를 많이 했으니 말이다. 그가 펴낸 책들도 부지기수다. 대부분의 것이 "한국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원형과 궤적을 찾아다"닌 결과물들이란다. 내가 그를 처음 읽은 것은 그의 탁월한 저서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이란 책 달랑 한 권이다. 예전에 이 책을 우연찮게 발견하고 집어들어 읽었는데, 참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아서, 저자였던 '김열규' 이름 석자를 머리속에 각인 시켜 놓았더랬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이 이 책이다. 그의 이 독서인생 자서전을 읽으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경이롭다"는 단 한마디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저렇게 70평생을 책에 푹빠져 지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 다른 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읽는다는 것은 '아는 것'도 '아는 짓'도 아니었다. 그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뭔가가 되는 것. 그렇게 나만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걸 실감하곤 했다."는 그는 어쩌면 그 자체가 곧 수십권의 책이 되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읽기는 황금 캐듯이 해야 한다. 흙더미와 돌더미를 헤치고 광맥을 헤집고는 가까스로, 그리고 신통하게 금덩이를 캐내듯이 책도, 글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읽는 일은 그래서 발굴하기와도 같은 것이다. 글줄은 그리고 문맥은 광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모래바닥 위를 흐르는 개울에서 사금을 훑어내듯이 책이며 글을 읽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게 글을 읽는 최종 목적이고 수확이다. 최종 결승점이다. 마지막 유종의 미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을까? 77년 평생을 캐었으니 그의 머리와 온몸과 맘은 황금으로 가득 채워져있지 않을까? 그의 이 책을 읽으면서 반짝였던 그 황홀한 금빛은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가 평생을 함께 해온 책이야기, 읽기 이야기다. 스스로 써내려간 자신의 독서자서전 말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자서전이다. 그가 아이였던 시절부터, 노년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읽기가 첫사랑이었다는 고백에서부터 책님에게 감사하기까지, 얽히고 설킨 독서의 여정들이 낯낯이 빛나고 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아 웃음까지 준다. 책을 빌려보던 어린 날의 추억이었겠지만, 애틋한 연애의 감정도 살포시 피어난다.

책과 책읽기에 대한 그의 애정과 성찰은 남다르다. 누워서 읽는 것에도 어엿한 이름이 붙어있을 줄이야. 그는 누워 읽는 것을 2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엎드려서 책을 읽는 '와독(臥讀)'"이다. 흔히 臥를 누을 와로 알지만, 이 한자는 신하가 황제에게 예를 올릴 때의 모습을 뜻한다. 간혹 사극에서 보듯이 황제 앞에서 어지간한 신하들은 반듯하게 엎드린다. 그래서 이 臥는 엎드릴 와가 된다.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은 것이 와독이다. 두번째는 "반듯하게 누워서 책을 읽는 '앙독(仰讀)'"이다. 우러를 앙(仰)자를 썼다. '앙독'. 참 멋진 말 아닌가? 개인적으로 앙독은 좀 불편해서 거의 쓰지 않는다. 이제부턴 책을 우러러 보기도 해야겠다.

   
 

그러니 초등·중등·고등학교에 걸쳐서 국어 교과서며 문학 교과서에 웃음 읽기를 위한 내용이 드물거나, 심지어 없다시피 하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역적질과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과 한국문화가 웃음 읽기에 인색한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김선달과 정수동을 아주 특출하고 영특한 한국인으로 존경해야 한다. 그들은 위인 명단에 올려야 한다. 벼슬이나 해먹은 자들의 이름만 높다랗게 내걸면 햇빛을 가려서 국민 건강에도 해롭다.

서가에 꽂힌 책, 책상에 높인 책, 끼니때 밥상 옆에 놓인 책, 어린 시절 가슴에 묻은 책, 방바닥에 흩어진 책……. 책도 차지한 자리에 따라서 신분도, 계급도 달라진다.

 
   

그의 책과 책읽기에 대한 명석하고 빛나는 통찰은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책만 읽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읽고 자연을 읽고 모든 것을 읽고자 한다. "머리 위에 설레고 있는 나뭇잎들은 나더라 자기들이 지표에 던지고 있는 그림자의 무늬를 읽으라고 속삭인다." 그래서 그는 그 나뭇잎이 보내는 글자들을 읽는다. 나뭇잎의 "저 잔주름을 신성문자처럼" 어김없이 읽어내는 것이다. 나도 그에게 신성문자처럼 읽혀질 수 있을까 꿈꿔본다.

이젠 좀 읽기를 고만하시라고 조언하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력은 좋으시단다. 그러나 세월은 막을 수가 없는 것. 여전히 책읽기를 탐하는 그에게 돋보기는 필수품이다. 여전히 책읽기에 빠져 살고 있을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산책을 하면서, 한가로이 누어서, 시시때때로. 그런 그에게 아쉬움은 "미처 못 읽은 책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일 수 밖에.

   
  그런데 지금 내게는 '또 다른 나'가 되고 더불어서 우리가 될 친구가 없다. 몇몇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귀하게 남은 몇은 모두 멀리, 멀리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또 다른 나'이자 '우리'가 자그마치 둘이나 남겨져 있다. 바로 자연과 책이다. 그 둘은 이제 나의 천복이다. 그중에도 책 읽기라는 천복에 다다르기까지의, 온갖 내 삶의 자국이 이 책에 찍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나의 천복은 김열규 교수의 그것에 하나를 더 보태야 할 것 같다. 김열규 교수가 가르쳐주는 독서론, 곧 인생론을 읽게 된 것이 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 책을 덮으면서 앞으로는 길을 걸으면서는 책읽기를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는 가로수의 낙엽을 상형문자처럼 읽어야하니 말이다.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읽어야겠다. 이 또한 나의 천복이니, 나는 김열규 교수보다는 더더욱 다행인 것만 같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8-10-25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은 썼다 하면 장문에 탁월한 리뷰를 쓰십니다~ ^^
교과서에서 웃음을 뺀 죄에 공감하며 저자와 님의 천복에도 동참하고 싶네요.
이 가을엔 책과 더불어 낙엽의 신성문자를 읽으러 나들이도 자주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6행시 짓기에 장문의 심사평을 올려주셔서 품격있는 이벤트가 되었어요. 자칭 심사위원장님 고맙습니다~ 사례는 인천가서 할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