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의 눈] 서평단 알림
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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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 여신 디케(Dike)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법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있으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저울은 형평성을, 칼은 엄격하고 날카로움을 가리키며, 천으로 눈을 가린 까닭은 공평 무사하게 판결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금태섭, 『디케의 눈』책날개에서)  
   

금태섭의 법이야기를 '재밌게' 읽었다. '법이야기가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법은 때때로 어렵고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세상살이가 그렇듯이 각양각색의 천태만상을 담고 있다. 그에 얽힌 이러저러 법이야기들은 간간이 우리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런 법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또 하나 추가된 셈이다.

사실 우리가 제삼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법이야기를 흥미롭고, 어쩌면 쉽게 읽고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고 실제에서 법은 언제가 괴팍하고 딱딱하며 권위적이고 독선적이기까지하다. 그래서 골치아프고 어렵다. 이것은 법의 언어적 서술의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의 실제 생활에의 적용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말한다. 물론 법을 어떻게 풀어서 전달할 것인가 하는 언어의 문제도 분명 그 어려움의 원인일테지만,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법이 적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 그러한 법의 적용의 절차와 과정상의 복잡다단함의 문제일 것이다.

법은 역사이래 끊임없이 어려웠다. 근대 이전의 법은, 어쩌면 근대 이후 현재의 법도 그러할지 모르겠으나, 어려울 필요성이 있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역사 이래 법은 지배계층에 충실하게 복무해왔다. 이런 점에서 법의 기원은 모세가 받았다는 십계명의 이야기가 상징하듯이 '위로부터 주어진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배자의 지배와 통치의 수월성을 높이기 위하여 이 법은 언제나 통치수단, 지배수단으로만 기능해 온 것이다. 그러하기에 법은 민중 일반이 이해하고 적재적소에 적용하기 어려워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논란에서도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일화가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법은 고도로 발달하고 세분화되고 명분화되었다. 보다 복잡해진 것이다.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겠다. 이러한 사회 변화 속에서 법을 지배했던 지배계층은 법에 종속되었던 민중들과 일정부분 타협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법은 조금씩 지배계층만의 소유물로만 남아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법을 민중이 완전히 소유하기에는 여전히 법은 어렵다.

이러한 어려움은 크게 법의 체계상의 복잡함과 적용상의 모호함때문이 아닐까 한다. 다양한 법률과 법 체계 속에서 그 관계는 그물망처럼 얽혀있다. 그 그물 속에서 법에 종사하지 않는(못하는) 대다수의 민중들로서는 좀처럼 헤어나올 수 없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다양한 법(규정, 규칙, 명령, 법령, 민법, 형법, 헌법, 기타등등)의 적용에서 기인한다. 그 다양한 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무엇을 규제하고 무엇을 규제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그것이다. 금태섭가 『디케의 눈』의 많은 부분(「커피를 쏟고 24억 원을 번 할머니」,「가정의례에 관한 법률과 보신탕」,「원숭이 재판」등)에서도 지적하듯이, 현재의 명문화된 것을 어디에, 어떻게, 어디까지 적용하고 판단할 것인지 하는, 법의 모호함, 법의 테두리의 애매함이 오늘날 법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최근 현 정권의 오만과 독선에 대항하여 연일 온 시민들이 쏟아져나와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성토하고 있는 촛불시위와 관련한 불법시위 논란도 이런 법적 체계와 법 적용의 복잡함과 애매모호함때문에 기인하는 것이다. 현행 집시법은 최상위법인 헌법과 상호 모순을 이룬다. 집회 결사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이 이렇게 어렵고, 법의 해석과 판단이 이렇듯 모호하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거리가 되지 않느냐고, 금태섭은 궁시렁대고 있는듯하기도 하다. 그래서 금태섭은 법의 여신 디케를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왜 눈을 가리고 있는가? 금태섭은 이렇게 말한다.

   
  디케가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진실을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틀릴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법은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위험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으로도 취우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 디케는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고, 금태섭의 말처럼 진실을 찾기 위한 최선을 노력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법의 담당자들은 항상 두 눈을 가리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법은 어렵고, 진실을 언제나 멀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눈으로 그 법을 보고, 적용하는가가 아닐까? 지금까지의 법이 지배계층을 위해 존속했다면, 이제는 민중을 위해 존속해야한다. 법의 주체가 민중이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국민배심제가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그렇게 되면 법이 쉬워진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도 말하겠다. 그렇게 되면 진실은 보다 가까워질 것이다.

금태섭은 디케가 왜 눈을 가리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나도 궁금하다. 그리고 금태섭은 "두건 뒤에 숨어 있는 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를 이렇게 궁리한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사명감에 불타는 날카롭고 광채를 띤 눈일까.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저울 눈금을 주시하는 냉정하고 빈틈없는 혹은 약자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연민이 가득한 눈일까. 그보다는 오히려 찾기 어려운 진실 앞에서 끝없이 같은 질문을 되묻고 다시 생각해보는 고뇌에 찬 눈이 아닐까.  
   

나는 디케의 눈은 "날카롭고 광채를 띤 눈"도 "냉정하고 빈틈없는" 눈도, "눈물을 흘리"고 "연민이 가득한 눈"도 아닐 것이라고, 아니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금태섭이 말하는 진실을 찾는 "고뇌에 찬 눈"도 아니어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법의 여신이 가져야 할 눈은, 바로 민중의 눈이어야 한다. 민중의 눈으로, 민중이 주체가 되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21세기의 법은 민중의,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법이어야 한다. 이 민중의 눈은 아마도 금태섭이 말한 그 다양한 눈들의 총체적 합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 警告 : 本 書評은 알라딘 書評團에 當籤되어 出版社로부터 無償으로 圖書을 提供받아 作成된 것으로 本 書評의 內容을 全的으로 信賴하여 本 圖書의 購買 與否를 決定하는 것은 讀書生活에 深刻한 懷疑를 誘發할 수 있사오니, 이 點 留意하여 주실 것을 當付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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