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국(北國)에는 날마다 날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눈이 퍼부슬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허-연 북조선(北朝鮮)이 보이느니.

가끔 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래가
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여다가
치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볼을 때리느니.

칩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南國)에 돌려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립어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둥켜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최는 이방인(異邦人)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北國)은 춥어라, 이 치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짱 깔리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 흰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눈이
북새(北塞)으로 가는 이사꾼[移徒] 짐짝 우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김동환, 「눈이 내르느니」)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양 흰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홀로 밤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女人)의 옷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追憶)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슬픔 그위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 「설야(雪夜)」)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어름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긔롭어라.

옹송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입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정지용, 「춘설(春雪)」)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이용악, 「그리움」)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서린
하루하루 낡아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가는 한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어지는
하얀 단층(斷層) (- 박용래, 「눈」)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박용래, 「겨울밤」)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이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이마에
불현 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김종길, 「성탄제(聖誕祭)」)

겨울의 뒤를 따라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바람은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리어카를 끌고 새벽길을 달리는 행상(行商)들에게나
돌가루 냄새가 코를 찌르는 광산촌의 날품팔이 인부들에게
그리고 오래 굶주릴수록 억세어진 골목의 아이들에게
바람은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일러주었다
바람은 언제나 같은 어조로 일러주었다
처음 우리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반복의 강도 속에서 원한일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원한은 되풀이 되풀이 되풀이하게 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여인을 또다시 벌거벗게 하고
저녁거리 없는 자를 또다시 저녁거리 없게 하고
맞아죽은 놈의 자식을 또다시 맞아죽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피비린내가 그칠 날이 없게 하는 것이다
아아 짓밟힌 풀포기 밑에서도 일어나는 바람의 시인이여
어쩌다 우리는 괴로운 무리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나
어쩌도 또다시 칼날 앞에 머리를 내밀고
벌거벗은 여인이 사랑을 말하려고 할 때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사랑이 그들의 머리칼을 장대같이 꼿꼿하게 하고
불더미 속에서도 죽지 않는 영생으로 단련하는 것같이
단단하고 매몰차게 세상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아아 바람의 시인이여 이제야 우리는 알겠다
그들의 골수 깊은 원한이 사랑을 가지게 한다는 것을
쇠붙이는 불길 속에서 단련되어진다는 것을
바람은 그것을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말하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겨울의 견고한 사랑을 말하여주고 있는 것이다. (- 최하림, 「겨울의 사랑」)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슴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최승호, 「대설주의보(大雪注意報)」)

겨울강에 나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돌 하나를 던져보다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쩡, 쩡
돌을 튕기며, 쩡,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이, 쩡
봄이 오면 녹아 흐를 것들이, 쩡, 쩡
아예 되기도 전에 다 녹아 흘러버릴 것들이
쩡, 쩡, 쩡, 쩡, 쩡,

겨울 강가에 나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본다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서 제
바닥에 닿을 돌들을.
쩡 쩡 쩡 쩡 쩡 쩡 쩡 (- 박남철, 「겨울강」)

날 새고 눈 그쳐 있다
뒤에 두고 온 세상.
온갖 괴로움 마치고
한 장의 수의(壽衣)에 덮여 있다
때로 죽음이 정화라는 걸
늙음도 하나의 가치라는 걸
일어주는 눈발
살아서 나는 긴 그림자를
그 우에 짐 부린다 (- 황지우, 「설경(雪景)」)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없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에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 마종기, 「겨울 기도 1」)

덮인 하이얀 눈 속에서
더 붉은 사랑.

푸득푸득 꿩이 날아오르는
후미진 산등성이 옆에
더욱 푸르러 뜨거운 몸뚱이

매운 찬바람 속에서도
이제 삶을 죽음이라
죽음을 삶이라 말하며

밟힐수록 힘이 솟는 우리들,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끼리끼리 그림자 만들어
마침내 더불어 큰 산을 이루었네. (- 조태일, 「겨울 보리」)

눈보라는 무섭게 휘몰아치고
끝없는 벌판에
보지 못하던 썰매가 달리어간다.

낯설은 젊은 사내가 썰매를 타고
달리어간다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미칠 것 같은 나의 기쁨은 어디에 있느냐
모든 것은 사나운 선풍(旋風) 밑으로
똑같이 미쳐날뛰는 썰매를 타고 가버리었다. (- S.A. 에세닌,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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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1-12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소리 들으며 '눈'내리는 시를 감상하는 빛고을 아지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