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가시내

                           -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골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어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갈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 1939년 8월 作, 시집『오랑캐꽃』에 수록
(윤영천 편, 『李庸岳詩全集』, 창작과비평사, 1995. pp.95~6.)

이 시의 배경은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시절에 '북간도'의 어느 허름한 술막이다. 매서운 추위에 발을 얼리며 두만강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와, 석 달 전 바로 그 두만강을 먼저 건너와 이제는 이름없는 술집 작부로 전락한 "전라도 가시내"가 주인공이다.(윤영천 편, 같은 책, p.232. 참조) 1939년이란 시대의 암울을 생각해 보면, 이 시를 읽는 내내 엄숙해져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용악의 연애감각을 소홀히 할 수 있다.

추운 겨울 두만강을 남몰래 건너와 북간도에 이르러 피곤하고 고통스런 몸이라도 녹이려 어느 허름한 술막에 들어선 '함경도 사내'는 전라도 말을 쓰는 가시내, 이 술막의 작부에게 눈길이 간다. 보아하니 이 가시내도 저 먼길을 걸어 두만강을 건너 질긴 목숨이어가며 이 술막에 들어온 것이리라. 말하자면 동병상련. '까무스레한" 얼굴의 전라도 시골 가시내지만 어딘지 마음이 끌린 이 '함경도 사내'는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느냐는 의뭉스런 말로 수작을 부린다. 너의 눈은 "바다처럼 푸르"구나. 이 전라도 가시내는 '함경도 사내'의 이 고단수의 수작에 빙긋 웃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그쳤다면 고작 술 한 잔이나 이 어여쁜 '전라도 가시내'에게 받아먹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함경도 사내'는 고단수다. 척 보면 딱이다. 이 가시내의 '까무스레한' 얼굴에도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이 가득하다는 것을. 이내 '전라도 가시내'는 이 사내에게 손목이 잡혀 힘없이 옆에 주저앉아 그 살아온 내력을, '가난한 이야기'를 눈물 반, 술 반으로 풀어낼 것이다.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메이자"는 이 당돌한 사내의 말 한 마디로 가슴속 응어리진 사연들을 풀어내고, 이내 옷고름 마저도 풀었을 것이리라.캬~

'전라도 가시내'가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분명 울긋불긋 온 산마다 단풍이 든 가을이다. 추운 겨울 북간도의 밤깊은 술막에서 가시내는 이내 고향산천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라 울먹이지 않았을까? "울 듯 울 듯 울지 않"으려고, 진한 농도 걸고, 슬그머니 손도 잡는 이 사내에게"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를 보였던가 보다. '함경도 사내'의 이 고단수의 수작은 끝내 성공하지 않았을까?

'전라도 가시내'의 사투리를 어설프게 써가면서 농도 주거니 받거니,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던 옛시절로 잠시잠깐 돌아가게 해 준 이 '함경도 사내'에게, 그 날 밤은 누구에게도 풀지 않았던 옷고름이며, 살짜기 눈물을 닦아내던 '초마폭'도 이내 풀어버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것도 하룻밤. 추운 겨울 새벽 북간도의 술막의 어느 뒷방에서 문을 열고 초라한 사내가 무덤덤히 나와, '노래도 없이', '자욱도 없이' 얼음길을 걸어가는 풍경. 이 둘의 하룻밤 사랑은 꽤나 아름답지 않은가?

이 겨울날, 서른 즈음에, 이용악의 이 빼어난 시를 읽으며, 그 '함경도 사내'의 고단수의 수작을 이내 부러워하며, 잠도 오지 않는 새벽을 달랜다. 아, 나의 '전라도 가시내'는 어디에 있을까? 경상도 가시내도 좋고, 경기도 가시내도 좋을 것이다. 아무렴, 서울 깍쟁이는 어떠랴. 어느 가시내일지 모르지만, 나도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그래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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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2-29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멜기님의 멋진 해석에 아지매가 첫 흔적 남기는게 미안시럽구만유~~ ^^
멜기님의 '전라도 가시내' 빨리 만나기를 기원하며......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