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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평점 :
올 해 초엔가, 서울 교보문고엘 심심풀이차 왕림한 적이 있었더랬다. 한 바퀴를 풀코스로 도는 데만도 한 시간을 족히 잡아먹고도 남음이 있으니, 이는 내 심심파적을 여한없이 달래주기에 딱 알맞은 놀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대면하는 곳은 신간서적 코너다. 이날도 신간들을 어영부영 살펴보던 차에 눈에 확들어오는 책이 있었더랬다.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禁止를 금지하라』, 멋있는 제목이라고 해야할까? 왠지 단순히 멋지다고만 할 수 없는 어떤 포스를 담고 있는 것같았다. '무슨 책이지?'란 의문이 들어 집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새겨있었다. 딱 봐도 알만한 사람들말이다. 박원순, 조정래, 마광수를 비롯 <PD수첩>의 PD들. 이 사람들이 왜 이리 한데 모여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지승호의 열 번째 인터뷰집'이란 안내로 이내 풀렸다. 그런데 지승호? 과연 못 들어본 이름이다. 탓하자면 나의 귀가 과문한 책임이지만, 지승호란 이름은 못 들어본 대로 지나쳐도 좋았다. 흥미를 끄는 책 제목과 관심을 끄는 인터뷰이들이 충만했으니 말이다.
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대강 목차정도를 훑어보고는 책장 한켠에 모셔져 있었다. 인연이 아직 아니었던 것일까? 아직 순서가 오지 않아서였던 것일까? 순서가 아직 안 왔다는 것은 그 전에도 사 놓은 책들, 그러니까 읽어주어야 할 책들의 목록이 이미 줄줄이 예약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인연이 아직 아니었다는 것은 아마도 지승호란 인터뷰어와의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그 예약된 목록들을 다 소화해 낸 것도 아닌데,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인연은 얼렁뚱땅 시작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지 싶다. 어쩌면 그와의 인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든가, 『마주치다 눈뜨다』, 『7인 7색』이란 인터뷰집이 이미 내 눈에 걸리기만 고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승호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 쟁쟁한 인터뷰이들 때문에, 나는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인연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피할 수 없고 말았다.
최근에 나온 지승호의 인터뷰집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은 그 주범이고 말았다. 그 주범은 박노자, 한홍구, 진중권, 손석춘을 '납치해 심문'하고 나를 협박하고 있었으니 내가 어찌 피해갈 수 있었겠는가? 박노자나 한홍구는 내가 꾸준히 구해 읽는 1순위 저자들이고, 진중권은 최근 관심을 갖고 있던 이고, 손석춘은 얼마 전 읽은 그의 책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때문에 호감을 갖고 있던 이다. 결국 지승호는 알게 모르게 내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피할 수 없는 유혹의 손길을, 아니 유혹의 그물망으로 나를 덮쳐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승호의 이 협박과 유혹의 구렁텅이에 풍덩 빠져버린 것에 그 어떤 불만이나 피해보상을 요고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가령 "대학등록금 문제는 국민적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학생들이 학교가 자신을 현금지급기로 취급해온 것을 더 이상 당연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30쪽), "이것이 더 이상 투자라기보다는 자본에 돈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거나, 무료로 공부를 한다는 것이 나의 천부인권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되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자본하고 거래를 해서 뭘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31쪽)라는 박노자의 날카로운 지적을 속시원히 듣게 해준 데 대해서는 감사해야 하는 것이 지당하기만 하다.
한홍구는 어떤가? "피폭당해 죽은 한국 사람이 히로시마에 3만, 나가사키 1만, 모두 4만 명이 넘어요. 그런데 우리 역사책에서는 이걸 안 가르칩니다. 20세기 우리 역사가 정말 울퉁불퉁했다지만 하루에 3만 명이 죽은 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4만 명이 죽었는데 이걸 역사 시간에 안 가르친다니까요. 왜냐하면 수십 년 동안 미군의 핵무기가 우리한테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핵무기가 이렇게 나쁜 거라는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거죠. 아직도 미국의 핵우산 속에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고요. 한반도의 핵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려면 이런 문제를 얘기해야죠."(193쪽)라는 말씀에 가만히 귀기울이게 된다. 이 아니 감사한 일 아닌가?
진중권의 인터뷰에서는 또한 실망시키는 않는 차갑도록 유쾌한 언설이 있다. "사람들이 미래를 못 보니까 자꾸 과거를 보는 거예요. 미래에 대한 프로젝트가 없으니까 기껏 정치권에서 나온 유일한 프로젝트가 운하를 파겠다는 거잖아요. 독일에도 운하가 있는데요. 석탄 나르는 것 외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아요.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석탄 나를 일은 없잖아요."(299쪽)라거나 "인구의 99퍼센트가 영어 해서 뭐해요. 자기 직업상 필요해서 하는 거라면 좋은데, 그게 아니잖아요. 재는 거잖아요, 성적으로 자르는 거. 일종의 과거 시험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걸 하는 거죠. … 사람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해도 무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돼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안 하잖아요. 발음 막 굴리는 무식한 애들 있잖아요.(웃음)"(303쪽)에서는 웃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이 외에도 그간 내 관심을 끌지 못했던 지식인들에 대해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은 또한 귀한 이 책의 미덕이다. 홍세화, 김규항, 심상정이 그들이다. 막연했던 심상성의 이미지를 얼마간이라도 좋은 내용으로 채워넣을 수 있었고, 내 독서목록에 홍세화나 김규항의 책들을 집어넣어야만 하게 만들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구구절절이 인터뷰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밑줄 그어가면서 읽는 내내, 참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뷰만의 모자람에서 오는 갈증을 또다른 것으로 채우게끔하는 그런 달콤한 유혹 혹은 맛보기로서 말이다.
인터뷰가 본시 영어인데, 영문으로는 interview라고 쓴다. 이게 'inter-'와 'view'의 합성이다. 'inter-'는 상호(相互)를 의미하고 'view'는 '보다'라는 뜻이 된다. 합쳐보면 '서로 보다'라는 뜻이 되는데, 그렇게 보면 인터뷰는 어원적으로 '서로 보는' 행위를 전제하는 것이 된다. 서로 보며 무엇을 하겠는가? 서로 쳐다보면서 대화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때론 상대의 말씀을 경청해 듣는 것 아니겠는가? 근래에 우리가 인터뷰라고 하면 기자가 어떤 특정인을 상대로 무언가를 캐묻는다던지, 대학입시나 취업시험에서의 면접 등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대면하여 물음으로써 상대의 그 어떤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찾아보니 'view'에는 '조사하다'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조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살펴 알아내는 것이다. 알고싶은 것을 밝혀 끄집어 내는 것 말이다.
이 인터뷰집도 본시 그런 것이지 싶다. 무언가를 끄집어 알려내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인터뷰집의 생명은 인터뷰어가 누구냐에 달려 있다. 이 책의 인터뷰어가 누구인지를 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은 별 일이 아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박노자의 이야기, 내가 들을 수 없었던 한홍구의 또다른 이야기, 내가 알지 못했던 진중권의 재치와 위트 혹은 독설, 그리고 한편으론 그동안 관심두지 않았던 또다른 지식인들에게 흥미를 가지게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이 이 인터뷰집에 담겨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이 인터뷰집의 인터뷰어를 다시 보게 만드는 무언가로써 충분하지 않은가? 지승호. 그는 '무엇을 말하게 할 것인가?'를 항상 심도있게 고민하고, 결국은 그것을 말하게 하는 능력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그와의 인연을 이렇게 흥미롭게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즐거움이고, 또한 거대한 기대를 품게 만드는 것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