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시가 아니다 세계사 시인선 139
이승훈 지음 / 세계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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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시(詩)’라는 것의 시작에서부터 함께 따라다녔다. 지금까지도 그 물음은 풀리지 않았다. 아니 앞으로도 그 물음에 정답을 내어놓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까? 어쩌면 그것은 애초부터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보 같은 질문이랄까!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지 않던가? 정의하려면 할수록 그것은 ‘오류’만을 낳을 뿐이다. 그러나 인류는 시를 태생시킨 이후 끊임없이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물고 늘어졌다.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말이다.

  모든 문학의 통칭(統稱)이 시였을 때부터 그 의미가 현저히 축소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는 변화했고 시의 정의도 늘상 바뀌어왔다. 어쩌면 시를 쓰는 저마다에게 시의 정의는 각각 다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시적 정의에 입각해 시를 쓴다. 확고한 시의 정의가 없이 쓸 뿐이라고 반문하는 시인 나부랭이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그런 시인은 정말 ‘나부랭이’일 것이다. 저마다 가슴 속에 ‘이런 것이 시다.’라는 생각들을 품고 있을 것이고, 그것은 그 나름의 시론(詩論)으로서 그의 시를 탄생시키는데 암묵적이나마 작용할 터이다. 시의 정의, 곧 시론이라는 것은 시에 대한 철학이다. 철학은 사유, 곧 생각인 바, 시론 없이 시를 쓴다는 것은 곧 ‘생각’ 없는 시를 쓴다는 것과 동의어다. 그럴 때 그것은 시가 아닐지 모른다.

  이렇게 시와 시론은 다른듯하면서 같고, 같은듯하면서 또 다르다. “시론과 시쓰기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불이(不二) 사상과 만나고 그런 점에서 시쓰기에 대한 사유는 시에 대한 사유이고 거꾸로 시에 대한 사유는 시쓰기에 대한 사유”라고 말하는 시인이 있으니 그가 곧 이승훈이다. 이승훈의 이번 시집 『이것은 시가 아니다』에서는 그의 시에 대한, 시쓰기에 대한, 시론에 대한 사유를 만날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시란 무엇이고, 그에게 시쓰기는 무엇인지에 관한 그의 시론을 그는 이번 시집을 통해 세상에 내어놓고 있는 것이다.

  시를 쓰는 저마다에게 시론이 있을진대,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사유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보편적인 시에 대한 관점에서 그리 벗어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 이승훈의 시론은 이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시를 쓰는 것은 언어가 있기 때문이고 시는 죽음을 표상하는 언어를 매개로 이 죽음과 싸우는 방식이다. 그러나 시는 이 언어, 현실, 상징계를 극복할 수 없고 그런 점에서 언어와의 싸움이 아니라 언어를 버리는 시가 요구되고 이런 시는 언어도 환상이라는 인식을 동반한다.”고 말하는 시인에게는 시의 매개인 언어에 대한 극심한 부정이 보인다. 즉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그는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로부터 탈출할 때, 곧 언어를 매개로 하여 성립할 수밖에 없는 시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나는 현대시가 끝났다는 입장이고 내 시의 종말(end)이 내 시의 목적(end)이고 내 시의 목적이 내 시의 종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그는 곧 시의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왜 언어를 부정하고 시의 종말을 향해 가는가? 그것은 언어 자체의 어떤 모순에 대한 시인의 사유에 근거하는데, 이를테면 언어가 가지는 그 자체의 기호성, 상징성, 추상성에 의해 현실과, 사물과 본질을 극히 추상화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한 언어로 탄생되는 시에는 곧 그 추상화와 상징화에 의해 본질과 진리가 왜곡된다. 그러니 곧 그 시는 가짜가 되어버린다. 본질적 현실과는 다른 시, 시와 삶, 시와 현실이 ‘경계’지어지고 분리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시와 삶, 시와 현실의 경계를 해체하는 데 있고 이런 해체를 통해 근대 부르주아 예술이 강조한 이른바 미적 자율성을 파괴하고 일상과 예술의 단절을 극복함에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나아가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 충실하게 살면서 시는 순수한 초월의 세계를 노래”하는 그들의 현실과 그들의 시가 철저히 경계 지어진 지금의 시인들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관심은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리얼리즘과는 아무 관계가 없”단다. 그가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작업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언어로부터 탈출하는 것으로써 실현된다. 언어 자체가 현실과 시를 분리시키는 것을 극복하고 현실이 곧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의 ‘불이 사상’과 일맥으로 놓아도 될까? 나는 잘 그의 시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도대체 어떻게 언어로부터 해방되고 시를 쓸 수가 있을까? 정말 시의 종말을 고하기 위해 그는 시를 쓰는 것일까? 하여간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쩌면 허망하기까지 하고, 어떤 ‘정신병적’ 중얼거림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미친 소리가 구원”이기 때문일까? 그의 궁극적 지향은 언어로부터의 해방이면서, 언어적 자폐(自閉)가 아닐까?

  그는 이런 그의 시론을 이 시집에 담으면서 독자에 대한 ‘우롱’을 감행한다. 시집의 표제와 동명의 시를 한 시지에 실었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정신병으로 고생하는 제자의 편지 내용을 그대로 옮겼기 때문에 이 글은 시가 아니라 표절이고 그러나 내 이름을 밝히고 제목을 붙였기 때문에 이 글은 표절이 아니고 표절이 아닌 것도 아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뒤샹은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작가 이름을 무트(Mutt)라고 적고 나는 제자 편지의 일부에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는 제목을 붙이고 내 이름을 적고 시지에선 이 글을 그대로 수록한다.

  따라서 이 글은 시로 대접받은 셈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자. 이 글은 시가 아니다. 제자의 편지, 그것도 정신병에 시달리는 제자의 횡성수설이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솔직하게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지금도 이상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이런 행위에 대해 아무도 이의가 없다는 점이고 이런 상황은 우리 시의 후진성, 소박성, 무지, 지적 태만과 통한다.”

 

  시인은 본인 스스로 ‘시아 아닌 것’을 시지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시로 대접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당대의 시인들, 비평가들, 독자들에 대한 우롱일 수 있겠다. 너희들에게는 도대체 시론이 있는 것이냐? 생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것이냐? 시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느냐? 하는 경멸적인 물음을 제기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무런 응대가 없더란다. 행여 그가 미리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시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응대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냥 ‘미친 소리’로 치부해 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그의 이러한 시론이 오늘날의 현실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시인은 이런 우롱은 이 시집 곳곳에서 자리 잡고 있다. 시집을 읽으면서 많이 허탈하고 한 정신병 환자의 중얼거림을 듣는 것 싶기도 했다. 많은 시인들이 언어의 극복을 염원하면서 시적 진실을 언어적 제약 없이 환히 드러내려고 노력해왔지만, 이 시인처럼 언어의 극도의 부정, 나아가 시의 종말을 고한 이는 없었다. 한편으론 충격이면서 한편으론 무시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시인 이승훈의 이러한 시론에 일말의 동의를 구할 수 없을 것 같다. 현실과 시, 삶과 시는 분명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시인이 지향하는 언어적 해방의 자리에 여전히 시가 존재한다면 모를까, 그의 시의 종말 선고 또한 언어로서 감행되고 있음에서 볼 때 그는 이런 사유는 언어적 자폐의 지향처럼 보일 따름이다. 그래서 이 시집이 아무런 풍파를 일으키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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