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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백석 - 문학동네 글과 길 2
김자야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942년. 시인 백석은 혼자였다.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 전에는 측량보조원, 측량서기를 비롯해서 소작인 생활을 하기도 했단다. 일본의 뛰어난 시인 노리다께 가스오는 시인 백석에게 매료되어 있었던가 보다. 그를 찾아 만주의 안동까지 가서 만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 후 그를 추억하며 쓴 시가 「파[葱]」라는 시다.
파를 드리운 백석.
백이라는 성에, 석이라고 불리는 이름의 시인.
나도 쉰세살이 되어서 파를 드리워 보았네.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의 나.
벌써 스무 해라는 세월이 흘렀구나.
벗, 백석이여, 살아 계신가요.
살아 계십시오.
백이라는 성과 석이라는 이름의 조선의 시인.
― 노리다께 가스오, 「파[葱]」,『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와사회, 1997.
만주에를 찾아가서 만난 백석은 부엌에서 파를 들고 있었던가보다. “有朋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라 했으니, 술 한 잔 기울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손수 부엌에서 술안주를 준비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순수한 모습을 지우지 못하고 20년이 지난 후에 시인 백석을 그리워하는, 국경을 넘어선 두 시인의 우정은 기릴 만하다. 이렇게 친구가 다녀간 후 1943년에 그에게 준 시 한편이 있다.
나 취했노라
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의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
나 이 밤의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
―「나 취했노라 ― 노리다께 가스오에게」
멀리 있는 친구에게 준 시에서 백석은 쓸쓸하니 푸념을 늘어놓는다. 백석의 시 중에서는 이 시를 제외하고는 이런 유(類)의 시를 볼 수가 없다. 절친한 친구였기에,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한다. 취할 수밖에 없는 백석. 그는 무엇 때문에 취했던 것일까? 술에 취하고 슬픔에 취하고, 그 인생 허무함에 취하고, 우리의 시인 백석은 그렇게 취해갔다.
백석은 1935년 시「정주성」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36년에는 시집『사슴』을 200부 한정 발간하면서 당시 문단에 충격을 준다. 뛰어난 언어감각, 향토성 짙은 방언으로 시 속에 신화적, 동화적 세계를 펼쳐 놓으면서도, “주책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김기림,「『사슴』을 안고」, 『조선일보』, 1936.1.29; 『내 사랑 백석』에서 재인용)다. 그 『사슴』시편들도 걸작이지만, 오늘날 백석의 절창으로는 북관에서의 시편들이나, 이후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과 같은 “떠돎 과정에서 생산된 이른바 북방 시편들”(고종석, 『모국어의 속살』, 마음산책, 2006.)이 꼽힌다. 『사슴』과 그 이후의 북방 시편들과는 어떤 시적 변화가 있음을 감지해 낼 수 있다. 왜 백석은 떠돌며 그런 “외롭고 높고 쓸쓸한”(「흰 바람벽이 있어」) 시편들을 써내게 되었을까? 우리로서는 뛰어난 시편들을 가질 수 있었던 더없이 행복한 것일지 모르지만, 백석 시인 자신에게는 아픈 추억이 있었다. 그 키워드를 이 책 『내 사랑 백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야(子夜) 여사. 1936년 스물다섯의 백석은 다니던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여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그는 일찍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었다. 이때의 백석의 제자들은 그를 멋쟁이 서울 신사로 기억한다. 선생 백석은 선생으로서도 학생을 위하는 좋은 선생이었던가 보다. 무엇보다 함흥에서의 생활은 백석에게 있어 지울 수 없는 순간이다. 그것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자야 여사를 그곳, 함흥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자야 여사는 백석이 붙여 준 아호다. 스승 금하선생으로부터 받은 예명은 김진향으로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릴 적 부친을 여의고 홀어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란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이후 그녀는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한다. 자야 여사의 일생도 그리 수월치 못한 운명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운명은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그녀의 예술적 혼은 기생이 됨으로써 꽃 피우게 되었으니 말이다. 또한 기생이 되어 백석과 만나게 됨으로써 백석의 시적 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으니, 그의 기생됨은 불운한 가족사의 곡절이었으나, 우리에겐 또 다른 행운을 준 일대 사건은 아닐까?
백석과 자야 여사의 첫 만남은 참 흥미롭다. 자야 여사는 주위의 도움으로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게 되는데, 귀국 후 스승이 투옥되어 있는 함흥엘 찾아가게 된다. 함흥에 있게 되면서 그곳의 권번에 들어가 생활하고 있을 때에, 백석은 근무하던 영생고보의 어느 송별회 자리에 참석했다가 자야 여사를 만나게 된다. 자야 여사가 추억하는 첫 만남의 장면은 이렇다.
“당신은 첫 대면인 나에게 대뜸 자기 옆으로 와서 앉으라고 하였다. 그리곤 당신이 마신 술잔을 꼭 나에게만 건네는 것이었다. 속으로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이런 내색을 전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내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말없이 연거푸 기울이는 술잔에 용기를 얻은 당신은 더덤썩 나의 손목을 잡았다. 꽉 잡힌 내 손목에는 이미 불꽃 튀는 사랑의 메시지가 뜨거운 전류처럼 화끈거리며 전달이 되었다.
―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당신의 말이 나의 귀를 놀라게 하고, 또 의심케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가물가물해지면서 바닥 모를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가는 듯했다. 술기운이 더해감에 따라 당신은 나의 손을 다시 움켜쥐었다.
― 마누라! 마누라!
진작부터 자주 불러와서 익숙해진 듯한 말투로 당신은 무슨 애원이라도 하듯 자꾸만 보챘다.”
정말이지 닭살 돋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이에 두고 하는 말일테다. 그런데 그 당시 이렇게 첫 만남에서부터 덥석 “오늘부터 내 마누라야”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젊은 사람들이야 서슴없이 좋다 싫다 하지만, 그도 쉬운 일은 아닐 테다. 어쩌면 70년 전의 백석은 오늘날 신세대만큼이나 신세대적 연애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백석이 멋있어 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사진으로 전하는 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보더라도 꾸밈없고 순수해 보이며, 곱고 흰 피부가 오늘날의 꽃미남에 비견될 정도다. 이런 백석에게 자야가 그날부터 ‘마누라’가 된 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으리라.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마가리 : 오막살이 *고조곤히 : 고요히, 소리 없이)
우리에게 이 시는 잘 알려져 있는 백석의 시 중 하나다. 백석과 자야 여사의 사랑은 오늘날에도 이루기 쉬운 사랑은 아닐 것이다. 당시로서는 촉망받는 엘리트 백석과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기생과의 사랑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회가 그들의 사랑을 축복할 리는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랑은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기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은 자야와의 사랑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집안의 강제로 3번이나 혼인을 하기도 한 백석은 매번 첫날밤 신부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다음날로 자야에게 달려갔다고 한다. 그런 그였기에 이런 시를 쓰게 된 것은 아닐까?
세상의 편견과 인습은 제도는 그들의 사랑을 축복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없다. 그러니 이 세상을 버리고 둘 만이 오붓이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공간으로 떠나고자 한다. 여기서 ‘나타샤’는 분명 자야 여사를 염두에 둔 것을 터이다. 그래서일까? 깊은 산골 눈은 하얗게 내리고, 흰 당나귀가 ‘응앙응앙’ 우는 장면의 어떤 환상처럼 여겨진다. 환상은 현실과는 양립할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 시 속에서 나타샤와의 사랑이 아름답게, 그리고 간절하게 그려질수록, 현실에서의 자야 여사와의 사랑은 힘겨워 지기만 한다.
자야 여사는 몇 번의 이별을 고하기도 한다. ‘이별’을 말하기에 백석은 너무나 순전한 사랑을 소유한 시인이었다. 세상의 강제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을 지속하고자 했던 시인 백석은 자야 여사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자야 여사도 백석을 사랑하지만은 자신을 택하기에는 백석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몇 번이고 염려했을 것이다. 그래서 백석 몰래 짐을 싸 도망하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백석은 자야를 귀신같이 찾아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몇 번의 이별은 ‘연습’이었던 것일까? 결국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헤어짐을 길을 가게 된다.
집안의 강제에 의해 세 번 씩이나 결혼을 하게 된 백석은 그때마다 자야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야 여사 또한 백석의 혼인이 마냥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백석은 더는 견딜 수 없어, 만주의 신경으로 갈 작정을 하고 자야 여사에게 같이 갈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자야 여사는 그런 백석을 따라 나설 수 없었다. 왜일까?
“당신이 만주로 혼자 떠나시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은 순전히 뛰어넘을 수 없는 복잡한 가정사와 봉건적인 관습 때문이었다. 당신은 그것들로부터 아주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은 부모님의 강권으로 억지 장가를 몇 번씩이나 들고, 또 그 때문에 집을 뛰쳐나와서 정신적 번민도 무수히 겪었다. 게다가 그 동안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자야마저 한 달 동안이나 온다간다는 말이 없이 어디론가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어버린 것에 당신은 몹시 큰 충격을 받았던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훌쩍 떠나버리자는 백석을 따라나서기에는 백석이 잃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고 생각했다. 부모를 거역할 수 없어 몇 번이나 혼인을 치렀던 백석은 효자였다. 그러나 부모를 버리고 떠나버린다는 것은 백석을 불효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유학까지 다녀와 엘리트로서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고, 뛰어난 문인으로서도 유명한 그를 따라나서는 것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백석을 떼어 놓는 것을 의미했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자야 여사를 백석을 사랑하기에 백석에게 그것을 빼앗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함께 떠나지 않는다고 하면 백석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곳에 남아서 끝끝내 백석의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자 원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백석은 묵묵히 떠나고 만다.
백석이 떠나고 자야 여사는 수없이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이런 백석의 떠낢이 우리에게 백석의 명편들을 남기게 해 주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이 자야를 떠났지만, 백석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자야 여사와의 추억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백석은 그런 추억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렇게 방황하고 외로운 심사는 다양한 시편들에서 그 시들을 절창이 되게 한다. 어쩌면 이런 백석의 가슴 아픈 이별이 백석이라는 천재 시인이 꽃피기 위한 통과의례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백석의 시편들을 읽을 때에 자야 여사를 떠올리는 것은 그의 시를 더욱 가슴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열쇠가 되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자야 여사의 백석에 대해 추억하며 눈물로 써내려간 이 책 『내 사랑 백석』은 우리에게 소중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조각달이 서울을 희미히 비추고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섧게 울립니다.
가을바람인들 어찌 무심히 듣겠어요?
다 그리움을 돕는 것뿐입니다.
어느 날에나 오랑캐 무찌르고
임은 옥관에서 돌아올지요.
― 이백, 「子夜吳歌 三」(이원섭 역해, 「자야오가 3―다듬이질」, 『이백시선』, 현암사, 2006.)
서점에 들렀다가 『자야오가』라는 당시선집을 샀는데, 그걸 본 백석이 대뜸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주어 그때부터 자야 여사로 불리게 된 것인데, 위의 시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연작 중에 그 세 번째 수다. 오(吳)나라의 여인들을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멀리 전쟁터로 보내고 남편이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그리워하고 있다. 옷을 지어 남편이 있는 전쟁터로 보내겠다는 아내의 마음은 백석을 떠나보내고 못내 그리워하는 자야 여사의 심정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백석이 붙여 준 이름 ‘자야’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의 결말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참(詩讖)이라는 말이 새삼 되새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3년간의 자야 여사와의 사랑은 시인 백석의 자상함과 순수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당시 무성영화일 듯한 <클레오파트라>를 보러 가지는 자야 여사의 친구의 말에 자야 여사를 보며 “클레오파트라, 여기 있지 않소?” 했다는 백석은 정말이지 끔찍이도 자야 여사를 사랑했던가 보다. 그런가 하면 시인답게 시집을 펼쳐 맑은 목소리로 읽어 주던 장면을 자야 여사는 추억하기도 한다. 그들의 이런 사랑은 참으로 낭만적이며 열정적이었다. 그런 낭만과 열정은 새삼 부러움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이 책 『내 사랑 백석』을 읽으면서 백석과 자야 여사와의 순전한 사랑에 깊이 감동하는 한편으로, 이 이야기가 참으로 낭만적 드라마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시인 백석의 생애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연구되어 있지 않지만(재북(在北) 시인이란 탓에 그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백석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극히 적다.) 이런 소중한 자료를 토대로 그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 한 편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의 삶과 소설이 영화화 된 것이 있지만, 백석의 이런 사랑 이야기는 아름답고 훌륭한 영화가 되기에 충분하리라고 본다. 이런 작업들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소중한 시인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런 귀한 역할을 담당해 줄 누군가가 나타나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