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語文隨想]
讀書는 知識의 生命水
文福姬(暻園大 敎授)
白凡 金九先生은 『내가 願하는 우리나라』에서 “우리의 强力은 남의 侵略을 막을 만하면 足하다. 오직 限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文化의 힘이다.”라고 했다. 精神을 培養하는 것, 그것이 文化이다. 文化는 나와 世上과 事物의 關係性을 들여다보며 意味와 기쁨과 勇氣를 찾아가는 어떤 것이다. 自身을 省察하는 힘, 내 안에 眞正한 感覺과 叡智와 精神을 보듬어 가는 힘, 이것이 文化의 힘이다. 그가 限없이 가지고 싶어했던 最高의 價値가 높은 文化의 힘이라면 그 힘의 基礎를 어떻게 다져 가야 할까?
開講을 하고 새 學期를 맞으니, 노오란 山茱萸가 무리지어 터지면서 校庭은 活氣가 넘친다. 캠퍼스에는 꽃消息과 함께 學生들의 젊음이 봄을 재촉하고 있다. 새 學期를 始作하면서 나는 大學生들의 삶을 質的으로 向上시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結局 人間의 具體的인 삶을 探究하고 自我를 發見하는 지름길은 讀書라는 結論에 이르렀다. 學問의 世界에서 讀書는 地下水의 水脈과 같다. 젊은이들이 讀書를 通해 眞正한 自我를 돌아보고 各自의 삶에 對한 省察의 機會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文化의 힘을 키울 수 있는 端初가 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讀書하는 習慣을 갖는 것이 但只 大學生들에게만 要求되는 일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適用되고 勸獎되어야 할 일이다. 사이버 空間이나 인터넷 情報를 通해 冊을 接하지 않고도 知識을 習得할 수는 있지만, 冊을 通해 自身을 省察하는 時間을 갖는 것이 精神生活의 健全한 發育을 爲해 가장 바람직한 길이라는 點에서 讀書는 必須 要件이다.
讀書는 知識의 寶庫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知識이 담겨 있는 書籍을 要求하고 그것을 攝取하는 讀書가 必要하다. 物質的 生命을 支撐하기 爲해 飮食物 攝取가 必要하듯이 精神的 生命을 維持하기 爲해 知識을 攝取해야 한다. 나를 發見하는 것은 한 卷의 冊, 한 줄의 글일 수도 있다. 나의 自意識을 깨우쳐 주는 것도 冊과 對話하는 時間일 境遇가 많다.
冊은 貴하고 所重한 存在이다. 儒敎의 根本 精神을 文治主義로 본다면, 글로 다스린다는 것은 冊에서 얻어지는 것, 卽 知識에 依해 國家 社會를 運營하겠다는 意志가 아닌가. 우리 先人들은 晝耕夜讀이라 하고 燈火可親이라 하며 冊 읽는 것을 높은 價値로 보고 讀書를 積極 獎勵해 왔다. 冊을 通하여 知識을 習得하며, 有識하다든가 博學多識하다는 말을 最高의 稱讚으로 여겨 왔다.
讀書는 知識의 生命水이다. 冊에 담겨 있는 知識이 重要한 生存 戰略이다. 마음의 糧食을 通해 冊에 對한 믿음을 갖고 冊과 함께 숨쉬어야 한다. 知識社會의 基盤은 讀書이다. 그러나 德性 따르지 않는 知識은 毒이 되기 쉬우니 善用되어야 하며, 知識의 濫用이나 惡用으로 弊害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知識은 義를 지나쳐 보고 利를 따르는 데 퍽 銳敏하지만 德性은 私私로운 利益을 犧牲시키더라도 義理를 지키는 데 더 너그러움을 보인다. 이 너그러운 面, 卽 義를 忘却하거나 無視하는 知識은 그 分量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지어내는 바 害毒이 커서 오히려 知識이 없느니만 못하니, 오늘날 우리 農村의 匹夫匹婦가 풋知識을 가진 都市의 冷血兒, 狡智漢보다 얼마나 淳厚하고 무던한 義理와 人情味를 實踐 發揮하고 있는가.”를 指摘한 李熙昇의 글에서 德性이 缺如된 知識의 危險性을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知識 習得의 秘訣이 讀書에 있으나, 豊富한 知識의 攝取만 내세우기 前에 眞正한 意味의 知識 習得이 徹底히 要求되어야 한다.
우리 韓國 農村에서 볼 수 있던 옛 모습 中에 너그러움이 담긴 아름다운 光景 하나를 紹介하면, 지게에 볏가리 짐을 가득 담아 등에 짊어진 農夫가 볏단을 실은 달구지를 같이 끌고 가는 모습이다. 소달구지에만 무거운 짐을 모두 맡기지 아니하고 한낱 짐승과도 짐을 나누어 짊어지며 살아가는 農夫의 모습, 이것이야말로 人間에 對한 사랑을 넘어서서 動物에게까지 베푸는 너그러움의 極致이며, 世上을 支撐하는 德性의 한 斷面이다. 讀書가 知識 習得의 捷徑이지만 知識도 人間이나 自然에 對한 너그러움과 사랑이 따르지 않는다면 人間의 삶 속에 生命水가 될 수는 없다.
끝으로 “時計를 보는 것보다는 羅針盤을 보라.”는 말을 우리 人生의 具體的인 삶에 適用해 볼 때, 그 內面的인 뜻은 時間처럼 그냥 가는 것보다는 올바른 方向으로 가고 있느냐가 더 重要하다는 意味일 것이다. 熾烈한 時間 다툼의 時代에 時計를 보는 것은 競爭에서 이길 수 있는 緊張感을 造成해 주지만, 羅針盤은 올바른 目的地로 가기 爲한 道具에 不過하다. 目的地가 잘못 標示되지 않는 限 羅針盤의 役割은 方向을 알려주는 意味 있는 道具이다.
讀書는 우리가 가야 할 目的地의 方向을 提示하는 羅針盤과 같은 구실을 하며, 어느 한쪽만 치우쳐 보지 않고 均衡 잡힌 視覺을 갖도록 해준다.
讀書는 작은 世界에서 未來의 넓은 世界로 나갈 수 있도록 情緖를 擴大 深化하는 作業이다. 또한 讀書는 人生을 多樣한 角度로 보게 해주는 創意的 活動이며, 높은 文化를 이끌어 내는 힘의 根源이다.
<語文生活> 2007.4 通卷 第113號 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