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 박노자의 한국적 근대 만들기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그간 박노자를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아껴 읽어왔다. 『당신들의 대한민국1, 2』에서부터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나를 배반한 역사』, 『하얀 가면의 제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서들을 열심히 탐독했다. 분명히 그의 필치는 나름의 매력이 있었고, 다루는 주제들도 나의 관심사 중의 하나였지만, 그의 이런 저서들을 탐독하게 만든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나를 화끈거리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아마도 그런 것이 있었더랬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서 나는 이런 화끈거림을 살뜰히 느꼈다. 부끄러움에 고개숙이기 보다는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박노자에게 매력 만점을 주었고, 나는 그를 칭찬하는 리뷰를 쓰게 되었다. 그를 '경계인'이라고 애써 치부하면서, 그러기에 그런 날카로운 지적들이 가능하다고, 우리가 숙연히 받아들이고 고쳐가야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박노자의 첫 저서에 평을 단 적이 있었더랬다.

그 후로 계속된 박노자 읽기에서 나는 더이상 그의 저서에 어떤 평도 달지 못했다. 무엇때문이었을까? 그의 저서들을 읽어갈 수록 나의,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움들이 너무도 무섭게 까발겨져서, 더이상은 고개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다만 박노자 잘한다를 속으로 뱉어냈을 뿐이었다. 한가지 이유를 첨언한다면, 그를 이제는 더이상 '경계인'으로 규정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귀하한 법적 한국인 박노자를 경계인이라 규정했던 내게는 '그는 나와 다르고, 우리와 다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서 오는 관용이랄까? '남이니까 그런 소리가 가능한거지'라는 타자화였을까? 그런 것들이 분명 있었더랬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박노자를 우리와 다른 타자로 규정하는 '경계인'의 칭호를 붙여둘 수가 없다.

끊임없이 까발리고, '고발'하는 그에게 나는 이제 '우리'라는 동질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나 아닌, 우리 아닌 박노자의 진심어린 충고를 받아들이기엔 우리의 부끄러움이 너무 크고, 그의 충언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반성하고 성찰하기 위해서도 이제는 그를 우리 안에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때 그의 까발림은 충언이 되고, 그의 고발은 우리의 반성과 성찰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지금 저 먼나라 타국땅 노르웨이 오슬로에 가 있다.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그가, 저 먼 타국 노르웨이로 날아가버린 이유가 무엇일지 난 궁금하다. 그는 왜 노르웨이로 날아갔는가? 우리 (대학)사회가, 우리 사학계가 그를 진정 '우리'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단지 나의 추측일 따름이지만, 그의 우리 가까이에 있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며, 가까이서 '까발리고 고발' 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말이다.

그의 까발림과 '독설'적 고발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김일성 동상'과 '이순신 장군 상'의 담긴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을 말했을 때, 외국인 노동자(특히 동남아 및 아랍)를 대하는 우리의 오리엔탈리즘적 모순과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행위들에 대한 그의 냉혹한 필담에서 나는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화끈거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도 옷깃을 여미며 그의 목소리를 경청했던 것이다. 여기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를 읽으면서도 달라질 것은 전혀 없었다.

이 책은 "이 사회를 지배하여 개개인에게 체제를 뒷받침할 '경쟁의 영웅'이 되게끔 감요하는 '힘'의 논리를 예쁘게 포장하는 군대, 스포츠, 종교 등 각종 담론들을 해부하여 그들의 '고상함' 두에 숨겨져 있는 진짜 내용이 무엇인지"를 고발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힘'과 '폭력성'들을 추적하면서, 우리 사회 안에서 그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어떠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게끔 조작되어 있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우리 안의 '폭력'을 까발리고 '고발'함을 통해서 우리를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박노자의 한국적 근대 만들기"라는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고발'과 까발림, 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폭력적', '힘'의 논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탐구는 우리의 근대가 '한국적'이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왜 한국적이지 못했던 것일까? 그 원인을 추적하고 고발하는 그는 이제 제대로 된 근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한국적 근대'를 만들고자 하는 박노자의 '한국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역사 해석에서의 '힘'의 논리는 고대로까지 수렴된다. 삼국시대 피비릿내 나는 전쟁 속에서 무참히 죽어간 이름모를 민중들은 역사의 어느 페이지에도 기록되지 못했다.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주몽>에서도 고구려의 '민족적' 힘의 번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 뿐이다. 이에 우리는 열광했고 공전의 히트를 쳤다. 우리 안에 내재된 이 폭력성은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박노자는 세세히 까발린다.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의 배타성과 폭력성을 비롯해서, 교육에 있어서의 적자생존, 강한 '힘'을 가진 인간육성, 위인전에 담긴 '힘' 있는 영웅에 대한 숭배 등 이러한 '힘'의 담론은 종교, 역사, 교육, 문화 등등 어느 곳에서도 잠재해 있다. 강한 국가를 꿈꾸었던 개화기 인사들의 '경찰국가의 이상'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우리의 절대적이고 신성한 '국방의 의미'라고 여기는 징병제에 담긴 내막까지도 속속들이 추적해 내고 있다.

일제시대 '유도'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어떤 논리가 작용했는지를 추적하는 그의 작업 또한 흥미롭다. "얼핏 보면 '일상의 당연한 부분'으로만 보이는 무술 수련이, 태권도를 위시한 여러 무술 종목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권위주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계속 이 사회의 각종 지배 담론들과 복잡한 유착 관계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우리 사회의 "가장 일상적이고 생활적인 것들이, 보이지 않게 가장 정치적일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기억해야 할 것을 박노자의 말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테러'를 보는 의식의 기반들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동북공정' 논란에서 엿보이는 우리의 '힘'의 논리들 또한 해부하고 있다. 나혜석이란 한 여자를 끌어들이면서 근대가 던져준 여성의 고통을, 국가주의에 의해 잃어버린 우리의 개체성, 개인성을, 그리고 지역감정에 이르기까지, 박노자의 우리 사회의 '폭력'과 '힘'의 논리들의 원인자들을 찾아나선다.

이러한 대부분의 것들은 바로 우리의 '근대'형성기에서 적지않은 오류를 범하며 형성되었다는 것을 박노자는 진중하게 탐구하고 있다. 오늘날의 "체제의 수사와 권력관계의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는, 100년 전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소위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실상 국가에 의한 상명하달적인 생활양식의 훈련을 받을 권위주의 사회 남성 구성원의 '사회화 의무'를 의미"하는 우리 사회의 이런 폭력성들은 "일제 말기의 총동원 체제와 식민지 이후의 남북한 군사주의 문화였"음을 그는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국적 근대'를 만들 수 있을까? 박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개인 차원의 적극적인 저항은, 저들이 강요하는 생활 방식을 생각과 몸으로 동시에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버티기" 힘들다. 쉬운 방법으로는 "어쩔 수 없이 재벌이 만드는 물건을 쓰더라도 노동 탄압과 극우 정당에의 기부로 악명을 얻은 악질 재벌들의 물품을 보이콧하고, 학벌 타파를 위해 분투하는 시민단체들을 할 수 있는 대로 지원하고, 합법적인 병역 거부와 대체 복무를 위한 친화적 여론을 인터넷 등을 통해 조성하는 등 한 개인이 온몸을 내던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겠다. "바로 현 체제가 인간의 심신을 파괴하고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빼앗는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박노자는 말한다. 그럴 때 우리의 '폭력의 세기'는 마감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숭배'는 생명 파괴의 길이요, 죽임의 길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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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4-18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 때마다 부끄러움이 앞서서 선뜻 집어들지 못하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리뷰 잘 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