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가 타결되고 몇 주가 지난 지금이다. 이래저래 각 방송사들에서 관련 보도나 토론 등이 잇따랐고, 각 신문사들은 저마다 찬반이 분분하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한미FTA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과반수 이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한갓 미국이라는 대제국에 편승해서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막연한 희망 섞인 긍정이 아닐까하는 걱정이 든다.

한미FTA에 관련해서 최근 김명인 교수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이번 협상 타결을 그는 80년 신군부세력의 쿠데타와 동일 선상에서 해석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한·미FTA에 부쳐]1980년 5월, 그리고 2007년 4월

2007년 04월 10일

〈김명인/인하대 교수·‘황해문화’주간〉

1980년 5월,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세력들은 꼭두각시 대통령 최규하와 ‘TK 대부’라 불리던 총리 신현확을 앞세우고 자신들의 집권을 위한 시나리오를 완성시켜 가고 있었다. 박정희의 죽음과 더불어 오랜 군사독재체제의 청산과 문민 민주주의의 정착을 갈망하던 재야인사, 학생, 시민 등 민주세력들은 비상계엄 해제와 군부세력 퇴진을 요구하며 연일 성명과 시위, 농성으로 신군부세력의 음험한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진력했지만 전망은 불투명했다.

-역사퇴행 ‘닮은 꼴’ 사건-

그 시절은 이른바 ‘안개정국’으로 신군부세력의 폭력적 집권야욕을 걱정하는 비관적 전망과 설마 다시 또 군사독재의 수렁으로 빠지기야 할까 하는 낙관적이고 순진한 전망이 하루하루 교차되던 ‘타는 목마름’의 시기였다.

하지만 신군부세력은 5월18일 0시를 기해 이른바 ‘비상계엄 확대조치’라는 이름으로 2차 쿠데타를 감행했다. 비극적인 광주학살이 뒤따랐고 민주세력은 초토화되었으며 역사의 시계는 다시 거꾸로 돌게 되었다.

그로부터 27년이 흐른 2007년 4월, 신군부세력에 대한 민주세력의 승리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는 6월 민주항쟁 20년을 맞는 이 봄에 반군부독재 민주세력 승리의 마지막 결실이라고 믿었던 노무현정권에 의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치명적인 결과를 걱정하며 협정 계획이 발표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연일 집회와 시위와 성명과 단식농성과 심지어 분신까지 하면서도, 어쩌면 협상이 결렬되지 않을까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았지만 민주정권을 가장한 신자유주의 정권은 27년 전 신군부세력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쿠데타적 FTA 시나리오를 그대로 밀어붙여 마침내 현실로 만들고 말았다.

80년 5월과 2007년 4월을 이렇게 동일시하는 것을 이른바 ‘반대를 위한 반대론자들’의 강변이요, 어불성설이라고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80년 5월은 전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을 저버린 시대착오적인 폭력적 권력탈취이고, 2007년 4월은 절차적 문제는 있지만 세계화와 개방이라는 대세를 앞서 선취한 불가피한 결단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두 사건은 그렇게 판이한 것일까.

80년 5월의 신군부 집권 과정이란 역사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박정희식 쇄국주의를 깨뜨리고 전개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한국적 재편성 과정이었다. 그러면 2007년 4월의 이 FTA 협상 타결 과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한국적 관철이 종지부를 찍는 일인 것이다.

27년 전에 반민주적 신군부세력에 의한 폭력적 쿠데타의 형태로 시작되었던 그 하나의 과정이 27년 후인 지금엔 위장한 민주세력에 의한 헤게모니적 정책 집행이라는 형태로 완결되었을 뿐이다. 이 뚜렷한 동질성에 비하면 두 사건의 차별성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27년 전 신군부의 집권 앞에서 용비어천가를 드높이 불렀고 이 FTA 타결을 놓고 그동안 그렇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노무현정권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일부 언론사야말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두 사건의 동질성을 꿰뚫어 알고 있는 노회한 통찰자들이며, 87년체제를 운위하며 한국사회가 민주화되었다는 환상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 노무현정권과 386세력의 배신을 운위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순진한 햇내기들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대안 촉구 머물러선 안돼-

지난 27년에 걸쳐 한국사회는 단지 하나의 길,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길을 걸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번 FTA 타결은 이제 그 외의 다른 길, 다른 사회, 다른 국가로 가는 모든 대안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마지막 봉인과도 같은 것이다.

이 앞에서 개방은 대세로되 절차상 문제가 있다거나 철저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거나 하는 논의들은 모두 한갓 투정에 불과하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투쟁이 진정 진보적인 투쟁이 되려면 이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투쟁으로 발전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칼럼과 관련해서 <오마이뉴스>의 백병규 기자의 간략한 논평이 있어 덧붙인다.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 싶다.

 
"진실도, 기사도 디테일 속에 있다"
[백병규의 미디어워치] 한 꼭지 조간신문 리뷰

문제는 다시 민주주의다.

한미FTA 타결을 선언한 지 1주일이 조금 넘었다. 한미FTA에 대한, 이를 이룬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찬사와 칭송도 이제는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수그러들지 않는, 아니 못하는 사람과 신문들이 있다.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한겨레> 등등 절대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지만, 한미FTA에 그대로 동의할 수 없는, 순응할 수 없는 신문과 인터넷 언론들….

아마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하다. 설령 진다하더라도, 아니 질 것이 뻔히 내다보인다고 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기로 한 듯하다. 그들이 지난 1주일여 돌고 돌아 도달한 지점은 '다시 민주주의의 문제'다.

FTA 반대 단체에 대한 보복적 지원금 중단이라니...

<한겨레>는 어제(10일) 오늘 위험 수위를 넘은 정부의 FTA 여론몰이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산하단체는 물론 산하 기관이나 기업까지를 총동원한 산업자원부의 FTA 과잉홍보 실태를 어제 1면 머리기사로 올린 데 이어 오늘은 한미FTA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는 정부 보조금 지급대상에서 배제하라는 행정자치부의 '지침'을 폭로했다.

행정자치부의 지침은 엉뚱한 데서 드러났다. 인천 연수구에 있는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측준비위원회 연수본부'라는 작은 사회단체에 대한 정부 지원금 중단이 발단이 됐다. 인천 연수구는 2002년부터 지원해오던 지원금을 올해는 중단했다. 지난해 8월 통일한마당 행사장에 한미FTA를 반대하는 홍보물을 전시하는 등 국가 정책인 한미FTA를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인천 연수구의 총무과장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다. "지난해 11월 행정자치부 장관 주재로 시·도 행정부지사․부시장 회의가 열린 뒤 내려온 지시에 따른 것"이다. 당시 회의 자료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 단체에 대한 보조금 지원 등 금지'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기록돼 있다.

산하 단체에 기업까지 일사불란하게 동원한 한미FTA 홍보, 반대 단체에 대한 보복적 지원금 중단 조치…. 충격적이다. 지금이 도대체 언제인가. 70년대인가, 아니면 80년대 군사정권 시절인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잘못 거슬러 온 것인가, 아니면, 내내 착각하고 살았던 것일까?

그리하여 <한겨레>의 어제와 오늘 1면 머리기사는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정치 시대에 살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강준만 "노무현, 역발상과 도박의 연속으로 점철돼 온 정치 이력"

오늘(11일) 그 같은 물음에 나름대로 답을 내놓고 있는 두 편의 칼럼이 눈에 띈다. <한국일보>에 실린 '강준만 칼럼-노무현과 박정희'와 <경향신문>에 실린 '1980년 5월, 그리고 2007년 4월'의 기가 막힌 '동질성'에 관한 김명인 교수(인하대)의 칼럼이다.

강준만 교수는 인간 '노무현'에 초점을 맞췄다. 인간 '노무현'은 "늘 역발상과 도박으로 커 온 인물"이라는 게 강준만 교수의 진단이다. "30대 중반까지 '민주화'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 "인권변호사로 변신했지만 '의식화교육'은 수박 겉핥기에 머물렀던 것 같"은 사람, "역발상과 도박의 연속으로 점철돼 온 정치 이력"의 소유자가 바로 '인간 노무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박정희는 왜 나오는가? 노 대통령의 정치적 사부는 없지만 "굳이 찾자면 박정희"라고 보았다. 강 교수는 그 근거를 이렇게 제시했다.

"그(노 대통령)는 2004년 5월 연세대 특강에서 박정희는 절대 찬성할 수 없지만 박정희가 목숨을 걸고 한강 다리를 건넜다는 건 평가한다는 말을 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는 식으로 올인을 해 성공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바로 이 발언에 노무현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 있다. 노무현의 '동업자' 안희정도 "우리는 노사모와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고 했는데, 노무현 사단의 의식 심연엔 박정희가 자리 잡고 있다. 노무현은 "나는 성격적으로 혁명을 좋아하는 편이다"고 했는데, 평화적 방법에 의한 혁명은 곧 '역발상에 근거한 도박'을 의미했다."


강 교수는 한미FTA는 이런 노대통령이 '국가주의적 의제'를 골라 도박을 한 것으로 보았다. 강 교수가 그러나 정작 주목한 것은 그 방법. "극우 인사 조갑제가 격찬한 것처럼 '초인적인 능력'으로 고압적인 밀어붙"인 방법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이나 주장은 매도하거 단죄하는 방식으로 "전형적인 박정희식 방식"이라는 것이다.

김명인, "FTA 타결, 민주정권 가장한 신자유정권의 쿠데타"

<경향신문>에 실린 김명인 교수의 글은 보다 거칠고, 근원론적이다. 김 교수는 한미FTA 타결을 민주정권을 가장한 신자유정권의 '쿠데타'라고 규정지었다. 27년 전 신군부의 행태나 다름없다는 진단이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김명인 교수 스스로 "80년 5월과 2007년 4월을 동일시하는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론자들의 강변이요, 어불성설이라고 할 사람이 많을 것"을 알고 있다. "전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을 저버린 시대착오적인 폭력적 권력탈취(80년 5월)"와 "절차적 문제는 있지만 세계화와 개방이라는 대세를 앞서 선취한 불가피한 결단(한미FTA)"를 어떻게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김명인 교수는 그러나 이 둘은 27년의 격차를 둔 '이란성 쌍생아'라고 단정한다. 조금 어렵지만 그대로 기록해보자.

"80년 5월의 신군부 집권 과정은 본질적으로 박정희식 쇄국주의를 깨뜨리고 전개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한국적 재편성 과정"이고 "2007년 4월의 한미FTA 협상 타결은 그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한국적 관철이 종지부를 찍는 일인 것이다."

김명인 교수의 이런 분석에서 주목할 점은 그 주어가 '미국'이라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세계질서의 재편은 바로 미국의 세계 질서 재편 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 손바닥 위에서 79년 궁정동의 총소리도, 12·12 쿠데타군의 기습 공략도, 5·17 쿠데타도 가능했고, 그 대미가 바로 한미FTA라는 풀이다.

이미 '시스템'은 거꾸로 돌기 시작한 지 한참 됐다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중요한 건 '민주주의'다. 이런 평가도, 저런 평가도 있을 수 있다. 물론 비판의 당사자로서는 참기 힘든 '비난'이며 '매도'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민주주의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한겨레>의 기사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니, 그 작은 사안 하나 갖고 무슨 호들갑이냐고? 시스템의 말단이 역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거대한 시스템'이 확실하게 거꾸로 돌기 시작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서울시 3% 강제 퇴출이 아무런 '사회적 저항' 없이 관철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미 '시스템'은 거꾸로 돌기 시작한 지 한참 됐다.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

"악마는 디테일(구체적인 세부 사항) 속에 있다(Devil is in the details)"는 말이 있다. 하지만 악마만 디테일 속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진실도, 기사도 디테일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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