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움직인 한 卷의 冊]『李鈺 全集』

不遇한 知識人과의 만남

鄭夏英(梨花女大 敎授)


  이 世上에 태어나서 살다 간 사람들 中에서 自己가 이룩한 만큼 認定받는 사람도 있지만, 相當한 業績을 남기고서도 一生을 苦難 속에 살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진 境遇가 許多하다. 나는 1970年代 初盤에 그런 사람을 冊을 通해서 만났다.

  大學院 時節에「沈生傳」을 처음으로 接하고, 그 作品의 높은 文學性에 感歎을 禁할 수 없었다. 身分이 다른 男女의 悲劇的 사랑을 다룬 이 漢文小說은 簡潔한 文體와 짜임새 있는 構成, 感動的 主題로 讀者의 心琴을 울리는 作品이었다. 이 作品의 作家가 바로 李鈺(1760(英祖 36)~1812(純祖 12))이었다. 그는 燕巖 朴趾源과 同時代를 살았고 文學的 才能에 있어서는 결코 燕巖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國文學 專攻者들에게조차도 生疎한 人物이었다. 그는 寒微한 家門에서 태어났고, 自己 所信을 굽히지 않았던 까닭에 出世의 길이 막혀 있었다. 게다가 自己 作品을 看守해 줄 변변한 後孫조차 없어서 그의 作品이 널리 流布되지 못했고, 그 結果 우리는 그의 作品을 쉽사리 만나볼 수 없었던 것이다.

  李鈺의 不幸은 그가 지은 작은 글에서 發端되었다. 그는 成均館 儒生으로서 正祖에게 지어 바친 글에서 當時에 流行하던 小說文體를 使用하였다. 이것은 임금의 强力한 文體反正 意志를 拒逆하는 일이어서 强한 譴責을 받았다. 그런데도 固執을 버리지 않고 다시 科擧 試驗에서 小說文體를 使用하자 嶺南 三嘉縣으로 充軍되는 罰을 받게 된다. 넉 달 동안의 軍隊 生活에서 풀려난 뒤로 그는 科擧의 꿈을 접고 故鄕인 京畿道 南陽으로 내려가 農事를 지으며 著作 活動을 하였다. 그는 文無子, 梅花外史, 絅錦子, 桃花流水館 主人이라는 號를 쓰면서 韻文과 散文을 넘나드는 作品 活動을 하였다. 그는 上層 知識人의 文學을 追求했으면서도 庶民 階層의 文學에 各別한 關心과 愛情을 보였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李鈺의 作品을 切親한 親舊 金礪가 모으고 校訂하여 自身의 文集인『潭庭叢書』에 收錄해 놓은 것은 그나마 多幸이었다. 11卷으로 된 그의 作品들은「沈生傳」以外에도 20餘 篇의 傳과 嶺南 紀行文, 書簡, 序跋, 記, 論, 說, 策 等 多樣한 形式을 띠고 있다. 이들 作品에는 作者의 豊富한 體驗과 世上을 보는 銳利한 觀察力이 잘 드러나 있어 文學史的으로 重要한 意義 가진다.

  別途의 冊으로 傳하는『藝林雜稗』에는 詩創作論과 더불어 65首로 된 漢詩「俚諺」이 들어 있다. 朝鮮 社會의 庶民 階層을 代表하는 네 部類의 女性들을 登場시켜 삶의 哀歡을 노래하고 있는데, 漢詩의 形式을 取하고 있으면서도 內容은 民謠風의 情緖를 담고 있다. 伽藍本『靑邱野談』에 따르면 漢文 戱曲「東廂記」도 그의 作品이라고 하니, 그의 文學的 才能이 實로 多樣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랫동안 公開되지 않았던 李鈺의 文集 全貌가 近來에 公開되면서 그의 全作品이『李鈺 全集』으로 飜譯되어 나왔다. 이를 通해서 우리는 朝鮮時代를 代表하는 獨特한 文人 李鈺을 새롭게 만나고, 아울러 우리 傳統 文學의 格調 높은 作品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었다.

<語文생활> 통권 제110호,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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