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語文隨想]

自筆 署名 有感

張鍾權(詩人 ․ 季刊 <리토피아> 主幹)


  創作物이 들어 있는 郵便物을 받으면 于先 表紙를 들치고 맨 앞張 面紙에 쓰여 있는 著者의 自筆 署名을 살피게 된다. ‘平素 베풀어 주신 關心과 사랑에 感謝드리며 그동안의 熱과 誠을 다한 作品集을 보내 드리오니 삼가 恩惠로운 가슴으로 챙겨 두시고 또 읽어 주시길 바라나이다.’라는 뜻의 文句가 大部分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署名을 發見하면 보낸 이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 환한 微笑가 퍼진다. 보낸 이의 고맙고 따스한 마음이 먼저 달려온다. 수고로운 그동안 作品 活動의 結果物을 누구보다 먼저 보아 주십사 보내주는 마음이 너무 고맙다. 그래서 아름다운 自筆 署名이 담긴 冊은 그 冊에 담긴 수고와 精神이 두 곱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 읽는 이의 마음이 積極的일 것은 自明한 理致이기 때문이다. 오래오래 冊床 앞에 챙겨 두고 틈이 날 때마다 바라보게 된다. 보낸 이의 마음을 생각하면 읽는 것도 즐겁다. 書架가 비좁아 헌 冊을 整理할 事情이 생겼을 때에도 署名이 담긴 冊은 끝내 살아남아 자리를 지키면서 平生 그의 同志가 되기 마련이다.

  創作 印刷物은 그 自體로 所重한 것이다. 그러나 一次的으로는 機械文明의 냄새가 짙어서 人間的인 體溫을 느끼기가 어렵다. 勿論 內容을 읽어 가면서 充分히 著者의 냄새를 맡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不拘하고 精誠이 가득 담긴 自筆 署名의 價値를 否認할 수는 없다. 이처럼 自筆 署名이 重要한 意味를 갖게 되는 것은 받는 이에게 肉筆을 通해 自身의 마음과 香氣를 最大限으로 傳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낸 이의 精誠과 香氣가 그대로 배어 있어서 더 고맙고, 自身을 眞正한 벗으로 여겨주거나, 아니면 尊敬스러운 對象으로 信賴해 주는 것 같아 또 고맙기 그지없다. 날로 刻薄해져 가는 現代社會에서 그래도 나를 認定하고 記憶해 주는 사람이 있어 더 感謝하는 마음이 생기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香氣로운 人事말까지 곁들여 있으면 얼마나 感動的이겠는가.

  多年間의 作業을 通해 創作 作品集을 만들어 낸 분에게 그 結果物은 더할 수 없이 所重하다. 누구든 한사람이라도 讀者의 모습으로 다가와 自身의 精神的 産物을 읽어주길 苦待한다. 그런데 先輩, 同僚 할 것 없이 平素 잘 알고 지내던 知人들에게야 오죽하랴. 平素 顔面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한 番쯤 읽어 달라는 所望이 이 自筆 署名에 많이 담기게 된다. 어느 程度 讀者를 確保하고 있는 著述家들이야 아무래도 贈呈本을 많이 보내지는 않는다. 쓰기만 하면 읽어줄 사람은 따로 있어 幸福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래도 自身의 著書를 보내고 싶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多少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自身을 아껴주는 사람들에 對한 報答이고, 그리고 自身이 아직 이 땅에 살아 있다는 强力한 證據이며 一種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단 한 마디의 文章으로 멋들어진 人事를 달아 보내는 自筆 署名은 받는 이에게 잔잔한 感動을 불러일으키기에 充分하다. 精誠을 다해 써 내려간 글씨들이 마치 받는 이가 世上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이런 感情으로 冊을 읽어 들어가기 始作하면 그 內容은 當然히 理解의 速度가 빨라지며 企待 以上의 感動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보내는 사람은 보내는 사람대로 받는 이마다 입장에 따라 다른 文句를 만들어 내느라 苦悶을 하기 마련이다. 著書를 만들어 내는 程度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作業을 通한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所重한 人間的 態度일지는 不問可知의 일이다. 反對로 대충대충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簡潔한 文句를 使用하여 휘갈겨대는 署名은 아니 함만 못한 境遇도 있을 수 있다. 그럴 境遇 形式的인 人事와 署名은 오히려 받는 이에게 不快感만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文句가 쓰여 있느냐, 어떤 筆體로 쓰여 있느냐,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이런 것들이 받는 이에게 미묘한 感情의 變化를 줄 수 있다. 그런 面에서 볼 때 分明히 自筆 署名 또한 나를 숨길 수 없는 거울일 수 있는 것이다. 받는 이에 對한 自身의 相對的 態度가 알게 모르게 傳達이 되기 때문이다.

  글은 勿論이지만 글씨 亦是 自身의 存在에 對한 속일 수 없는 痕迹이다. 우리는 平素 숱한 말과 글과 글씨로 因해 감춰 두었다고 생각했던 속마음을 사실은 猖披할 程度로까지 露出시켜 버리는 일을 자주 經驗한다. 조금만 더 神經을 쓰고, 조금만 더 自身을 낮추고, 조금만 더 相對方을 尊敬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작은 失手들이 두고두고 未安스럽게 하거나 荒唐하게 만드는 일이 없지 않은 것이다. 人事 文句에서부터 呼稱과 마무리까지 받는 이마다에 따른 精誠스러운 選擇이 얼마나 重要한지는 남의 著書를 받아볼 때 確然하게 알 수가 있다.

  精神없이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는 科學文明의 社會가 不安하고 危殆롭다. 따뜻하고 所重한 人間的 냄새가 자꾸만 退色하여 사라져 간다. 機械와 速度에 빠져든 世上은 어디를 向해 가는지도 모르고 덩달아 꼬리를 물고 달려간다. 이럴수록 人間的인 香氣가 必要하지 않을까. 나는 너를 생각한다. 그래서 너는 나에게 意味가 있는 存在이다. 나는 當身을 尊敬한다. 그래서 當身은 나에게 希望이요 生命과 같은 存在이다.

  但 몇 줄의 아름다운 自筆 署名을 通해 人間的인 香氣와 信賴와 尊敬과 感謝의 마음을 보내고 받으면서 따뜻하고 甘味로운 人間味를 챙겨보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듯하다. 機械文明 亦是 人間 精神의 所産이기는 하다. 그러나 人間 精神의 産物인 機械文明에 人間이 거꾸로 끌려가는 듯한 世上에 살면서 人間的인 自尊心을 지키고 交換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肯定的이며 可能性이 있는 世上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語文생활> 통권 제110호,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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