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교육을 보는 또 다른 시각, 안선재 교수

얼마 전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이별의 시'가 아니라 '사랑의 시'로 보아야 한다. 이 시는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다 나온 일종의 농담시(joke poetry)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왔던 사실도 되돌아보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논문의 주인공은 안선재교수(1994년 귀화,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그는 한국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현재 교단에 서서 직 · 간접적으로 시교육 현실을 체험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시교육을 접해왔고, 앞서 언급했듯이 시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시한 바 있다. 덕분에 우리의 시교육에 대해서도 비교적 정확히 짚어 볼 수 있는 사람이겠다.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26일 오후, 바람이 제법 선선한 서강대 교정을 가로질러 그를 만나러 갔다. 차와 찻잔 그리고 책으로 가득 찬 연구실. 따뜻하게 맞아주는 그의 미소가 하얀 목화 같았다.

시 번역도 많이 하시고 시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 특별히 시에 관심이 많은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시를 좋아하니까(웃음). 시는 짧지만 강하고 집약적인 힘이 있어 좋아요. 그리고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주로 시문학이예요. 한국에서 영국의 전통 시를 가르치니까, 영국에 한국시를 소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양 문화를 나눈다는 그런 정신으로. 그런데 옛날 한국시는 어려워서 현대시를 번역하기로 했어요. 여유시간에(웃음)

그러면 특별히 좋아하는 시나 시인이 있으신가요?
다 좋아하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가장 좋아합니다. 짧지만 깊은 내용이 담겨있어요. 천상병 선생은 폐렴을 앓았고, 고문도 당해서 몸이 약해져 죽는다고 생각했었죠.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아무 원한도 없이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한다고 한 그 힘, 용기, 희망이 좋아요.

그럼 이제, 한국의 시교육은 어떠한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 질문할게요. 영국에서 태어나셨고 프랑스에서도 유학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테제공동체 생활을 하시면서 다른 나라들도 보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보셨던 시교육은 어떻든가요?
최근 서양의 문제는 학교에서 시를 거의 안 본다는 거예요. 현대시나 재미있는 시, 아니면 performance나 rapping 같은 것에 관심을 두죠. 옛날 문학 재미없다고 기피해요. 기본적으로 시는 가르치는 게 어렵구요. 한국에선 그런 것들이 덜한 편이죠. 한국 사람들은 문학이 의미 있다는 걸 믿어요. 그래서 한국문학에는 희망이 있어요. 한국학생들은 시에 아름다움이 있다, 의미가 있다고 말해요. 삶에 대한 메시지를 준다고. 서양은 대부분 그만큼은 아니고 그냥 재밌다, 잘 썼다고 하죠. 그래도 프랑스나 독일보다 영국에서 시가 살고 있는 편이예요. 사람들이 많이 보고, 좋아하고, 시축제가 있으면 즐기고.

아, 시축제도 있어요?
아, 그럼요. 많죠. 미국도 많아요. 2주 전에도 미국에서 닷지문학페스티벌(자동차회사 닷지가 후원하는 행사)이 있었어요. 시인들이 와서 시 낭송하고, 시인하고 대화도 하고, 음악도 있는 축제였는데, 4일 간 2만 명 정도가 참석했어요. 고은 시인도 참석했었죠. 미국, 영국 등지에서는 문학축제가 많은 편인데, 한국에는 활성화되어있지 않아서 아쉬워요. 한국에서 시는 책만 생각해요. 한국에선 오랫동안 낭송이나 퍼포먼스를 안 했으니, 이제라도 하면 좋을 거 같아요. 한국시인들은 문화적 체면의식이 강해요. '난 시인이다'(고개를 들고)라고 하는 거죠.

네, 권위의식이요. 아무튼 시축제가 없다는 것은 아쉽네요.
시인이 그러면 재미없죠. 시인은 독자와 대화를 해야죠. 사실 시마다 새로운 시작이니까, 시인이면 매일 새롭게 시작하고 새롭게 시를 쓰고 그래서 시가 어디로 나오는지 알아야 시에 의미가 있어요. 난 시인이기 때문에 시 쓴다고, 대외적으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의식 좋지 않아요. 한국시인들, 시집만 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사람들하고 관계있어야 해요. 우리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시를 가르칠 필요가 있어요.

영문학을 가르치실 때 시를 수업하실 텐에요, 시를 가르치실 때 어떻게 가르치시나요?
오래된 시이기 때문에 시인 소개, 역사적 배경, 구조 등등 시에 관한 제반사항을 먼저 알려주죠. 다음에 학생들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낭송을 해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 시를 책 안에서만 접하고 낭송하는 법이 없어요. 영시도 마찬가지예요. 조금 살아있는 방식으로 낭송해야 의미가 있어요. '뫄뫄뫄뫄뫄'하고 웅얼거리기만 해서는 소용 없죠. 감정을 담아서 시 느낌이 들게 낭송해야 해요. 영시는 리듬이 있으니까요.

그건 그럼 영시에 보다 적합한 방식이네요. 그렇다면 아까 제일 좋아하신다고 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만약 가르친다면 좋은 방법은 뭘까요?
한국 국내에서요? 글쎄. 그냥 읽어보고, 배경 이야기하고, 다음에 어떻게 느끼는지 물어볼 수 있겠죠. 귀천은 어렵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귀천>은 가르칠 일이 거의 없어요(웃음).
가르쳐야 할 시는 아이들이 어려워서 무슨 이야기 하는지 알 수 없다거나, 왜 중요한 것인지 모르거나, 그냥 본다면 재미없어할 시를 교육해야 합니다. 사실 시를 가르친다는 것은 문학사, 시의 특징 이런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지, 여러 시인들을 다 가르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읽어보라고 해야죠. 자체로 살아있는 시이니까요. 생각해 봐요. "학교에서. 왜. 시. 가르쳐야. 하느냐." 시가 아름답기 때문에? 시의 감성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는 것도 어렵죠. 학교 다닐 때 음악시간에 화음이나 구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레코드판을 그냥 들었어요. 어떤 학생들은 코골며 자고(웃음) 어떤 학생들은 '아'하고 느끼기도 해요. 사실 음악, 시, 미술에 대한 감상은 가르칠 수 없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감상하도록 북돋아 줄 수는 있지만 가르칠 수 없어요.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감상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선생님의 역할입니다. 우리 희망은 어느 날 시를 보고 '팍'하고 감동을 받는 학생이죠. 이런 학생들이 다른 시도 더 보고 싶어하고, 시를 쓰기도 할 겁니다. 어떤 때는 음악회에 가서 시를 보고 느꼈던 감동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될 수도 있겠죠. 인간의 기본적인 체험을 돕는 것이 인문교육이라 생각합니다. 시험을 위한 것이 인문교육이 아니에요. 시나 음악에 대한 감성은 시험 볼 수 없습니다. 귀천을 배운다고 해도 그에 대한 감성을 시험 볼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시라고 느낄 거고, 다른 사람은 별로 느낄 수 없는 시라고 생각할 거예요. "Ok, that's you."

말씀하신 것처럼 학생들이 살아있는 시를 배우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한국의 교육방법은 대부분 지시적입니다. 이런 방식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대답주기를 기다리죠. 하지만 선생님은 가르치고 학생은 배운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거예요. 스스로 경험하고 배워야죠. 학생들이 직접 생각해보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알고, 그것을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학생의 독립된 정신이 있어야 해요. 선생은 학생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지,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라고는 할 수 없어요. 선생님은 아이들의 생각을 대신해 줄 수 없어요.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질문하면, 조금 더 넓게 생각하도록 유도해야 해요. 자신의 생각 없이 문학을 대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시를 조금 더 살아있는 것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면, 아이들에게 자신의 시를 직접 써보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학생들에게 시를 제시하고 비슷한 제목으로 시를 써달라고 하면 '멍'해요. 자신의 생각을 시로 이야기하지 못하더군요. 시를 창작해보면, 시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나오는지 좀 더 느낄 수 있을 텐데도 말이죠.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한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시를 직접 읽게 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말할 수 있게 하고, 직접 시를 써보면 시를 살아있는 것으로 배울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리고 넓게 보라고 다독여줘야죠. 현대에는 시인도 많고 시도 많아요. 사람들 좋아하는 시도 제 각각이죠.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시를 다른 사람은 재미없다고 느낄 수도 있죠. 사실 모두에게 좋은 시는 없어요. 모든 시가 좋죠(웃음). 각자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어느 날 문득 어떤 시가 '우왓'하고 자신에게 의미 있게 아름답게 다가온다면, 다른 사람이 그 의미를 못 본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개인이 시를 보고 체험해야죠.

자기 자신의 의미를 찾으면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 하겠습니다. 이번 호의 테마가 "시를 가르친다는 것이 시작품을 가르치는 것인가, 시를 통해 인생을 가르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어떤 때는 시가 삶에 비중을 더 두기도 하지만, 시를 가르치는 본래의 목적은 수업을 통해서 시작품을 직접 볼 수 있게, 감상할 수 있게 하기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난 시 더 보고 싶어요. 다른 시 읽고 싶어요. 나도 시 쓰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야죠. 시의 아름다움, 시의 힘, 시 존재 자체가 목적입니다.

"살아있는 시교육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학습 스스로 시를 경험 · 체험하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미를 찾고, 나아가 자신의 말을 자신의 시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시교육이란 시에 대한 제반사항이나, 접하기 어려운 시를 가르쳐 주고, 시의 감상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안선재교수의 생각이다. 그의 문화적 기반인 서양의 시교육론 일수도 있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은 아니다. 더욱이 우리 교육에 비교해 볼 때 서양의 교육방식이 막연히 우월하다 말할 수 없으며, 시가 다른 만큼 그들의 방법로을 우리 시교육에 쉽게 적용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안선재교수의 말에서 우리가 들었던 것은 시교육의 또 다른 방법론만은 아니었다. 정작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던 것은, 시와 학생들을 향한 그의 따스한 시선이었다.

<시교육> 001,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시교육' 편찬위원회,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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