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길에서 만나다

미당 시문학관

여행지에서 시를 만나다
홀로 떠나는 여행, 가방 속에 챙겨 놓은 작은 시집 한 권은 여행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하지만 시를 만나기에 시집 속은 너무 좁고, 시가 품은 것은 너무 크다.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우리나라의 푸른 숲과 맑은 강, 숨 쉬는 생동감 속에서 시를, 시인을 만나보자. 여행지에서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그들이 얼마나 반가울까.

시인, 미당을 만나러 가자
유난히 더우가 길었던 탓인지, 선선한 바람에 저절로 옷깃을 추스르게 되는 가을이 차마 반갑니다. 온 나라가 부끄러움으로 물드는 가을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마음 푹 놓고 이 계절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볼까'하니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하늘만으로는 가을을 느끼기에 부족한 것 같다. 하늘만을 향했던 시선을 발 아래로 떨어뜨려 보자. 가을 향기에 취해 무심코 따라간, 노오란 국화가 만발한 그곳에서 우리는 미당을 만날 수 있다.

얼마 전 젊은 문인들은 과대평가된 시인으로 고은과 서정주를 꼽았다. 미당의 경우, 그의 문학에 대한 언급은 없이 '작품을 평가하기에는 친일로 인한 과오가 너무 크다'는 지적을 받았다. 물론 미당은 생명을 노래하던 입으로 친일을 행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친군부행위 등을 통해 권력을 향한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부끄러운 행적이 알려질 만큼 알려진 때에 더 이상 그에게 덧칠을 할 필요가 있을까. 미당을 향한 젊은 문인들의 씁쓸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작품의 우수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의 문학을 살펴볼 때, 우리는 무엇을 얼마만큼 볼 수 있는가. 미당의 전기적 요소를 살펴보는 것은 그의 문학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미당 문학의 뿌리이자, 그의 삶이 진솔하게 담겨있는 '미당시문학관'으로 떠나보자.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한 초등학교 분교를 개조해 만들었다는 '미당시문학관'에 도착하면 수줍던 신부의 초록 저고리 빛깔을 가진 잔디밭이 우리를 맞이해준다. 낮은 산과 낮은 집들이 모인, 한가로운 선운리에 낯선 콘크리트 건물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양쪽에는 옛 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전시실이 있다. 전시실에 놓인, 친숙한 시 뿐만 아니라 그의 친일 행적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미당에 대한 진솔함에 충실하고 있다. 또한 그와 부인의 다정한 사진, 여행지에서 아내를 걱정하며 쓴 편지, 손때가 묻은 소파 등을 통해 한 시인의 삶이 알몸을 드러내고 있다. 미당의 모든 것을 다 보여 주려는 욕심이 지나친 탓인지, 아직은 여유를 가지고 그의 삶을 함부로 정리할 수 없는 탓인 지, 전시물들이 체계를 갖추고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아 관리가 소홀해 보이지만, 제법 풍부한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전망대에 오르면 비로소 그가 보인다
1층 전시실의 유품들과 작품들로는 부족하다. 미당을 진정 느끼고 싶다면 콘크리트 건물의 계단을 따라 무거운 다리를 옮겨보자. 계단을 올라가면 액자에 걸린 그의 작품들이 이어지고, 각 층의 좁은 공간에는 생전에 그의 집필 공간, 그가 사용하던 돋보기, 파이프, 지팡이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 여러 산의 이름과 높이를 외우며 치매를 예방한 그의 흔적들을 보고 새삼 그의 정신력에 놀라기도 한다. 바다가 보내는 바람이 느껴질 때면 어느새 탁 트인 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 위의 대리석에는 '스물 세 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그의 대표작 '자화상'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이제야 그동안 낯설었던 그 시구가 한 발짝 다가오며 악수를 건넨다. 한 쪽에는 동그란 구멍 사이로 미당의 생가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시인의 묘소, 이제 그가 부인과 함께 누워 있는 곳에는 가을마다 국화가 장관을 이룬다.
이처럼 미당의 삶의 흔적을 되짚어 가며 전망대에 오르면 비로소 왜 이곳에 문학관이 자리했는지 절로 알게 된다. 질마재 신화를 낳은 한가로운 평야, 겸손하게 낮은 산, 멀리 보이는 곰소향, 정겨운 선운리 사람들까지, 문학관은 그의 시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이곳을 느껴보라 말하고 있다. 그의 삶을 따라 전망대에 올라 이곳이 가진 독특하지만 낯설지 않은 정서를 발견했을 때, 적어도 미당 문학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탁 트인 시야를 통해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가지고 내려오는 길에 다시 만나는 미당과는 왠지 가까워진 느낌이다. 눈과 마음으로 받아들인 소중한 경험을 간직하고 시문학관을 나서면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 더 발길을 넓혀 그 엷붉은 땅의 촉촉함을 피부로 느껴보자. 미당에게 스며들어 있는 이 촉촉함을 직접 느낄 수 있다면, 그의 시를 이해하고, 가르침에 있어 더 이상 그늘에서 헤매며 혼란스러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적이 드물어 더욱 여유로운 선운리는 국화 향기가 진동하는 가을이면 국화축제에 활기를 찾는다. 또한 국화가 만발한 어느 때에 '미당 시문학제'도 열리고 있다. 하지만 단지 한 계절의 축제에 지나지 않는다. 평소에 이곳을 목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가 그리워 간간히 방문하는 문인, 작가들, 또는 관광의 연장으로 미당을 기념하는 박물관을 견학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단순히 그를 그리워하고 잠시 쉬어가는 곳, 발길이 뜸한 기념관으로 이곳을 바라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남도의 여유로움이 머무는 이곳을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이 마음 놓고 시를 지을 수 있는 곳으로 확대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하지만 미당 시의 우수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미당 문학관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창작의 길로 이끌지 않을까.

가을이 아니어도 좋다. 국화꽃이 만발한 언덕이 아니라도 좋다.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남도의 평야가 주는 여유로움을 느껴보자. 자신에게 쏟아지는 숱한 세상의 말들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질마재 언덕의 고립도 대립도 없는 길 위에서 우리는 미당을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시교육> 001,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시교육' 편찬위원회, 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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