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케빈 패스모어 지음, 강유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랬다. 보름 남은 2007년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 3일전이다. 총선과 달리 비례 대표도 없다. 한 놈만 정해서 찍어야 한다. 2002년과 다르다. 다시 5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놈현과 비교될 만 한 놈도 없다. 이제 정치도 개인의 역량과 능력보다 시스템과 제도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보는 데 그렇게 될 수는 없다. 4천만이 한 마음이라면 그게 어디 사람 살만한 사회인가. 어쨌든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지만 감동도 희망도 없는 선거가 돼 버린 지 오래다. 콘크리트 지지층의 결집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긴 맹박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기야 하겠나. 아니 망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한국노총이 맹박이 지지선언을 하는 꼴을 마르크스가 봤어야 하는건데. 희대의 코미디가 벌어지는 현실 때문에 더 이상 ‘개콘’이나 ‘웃찾사’는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박정희를 파시스트라고 볼 수 있을까? 21세기에 다시 읽는 파시즘은 무엇으로도 바꾸기 힘든 인간의 욕망과 본성들이 내재해 있다. 대중들의 파시즘에 관한 심리를 가장 탁월하게 읽어낸 사람 중의 하나인 빌헬름 라이히는 <대중심리의 파시즘>을 통해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자본가라는 단어가 욕설이 아닌 것처럼 욕설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특수한 종류의 대중지도와 대중적인 영향력을 특징짓는 개념이다. 즉 파시즘은 권위주의적이며, 일당체제이며 따라서 전체주의적이며, 또한 권력이 본질적 이해관계보다 우선하며,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사실이 왜곡되는 체제인 것이다.(P. 307)”라고 선언한 바 있다.

  나치의 상징이었던 하켄크로이츠를 인간이 얽혀 있는 성적 상징으로 읽어 낸 라이히는 성경제학과 가족 내의 억압 구조를 통해 대중들의 파시즘에 경도되는 현상을 간파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음 사용했던 ‘파시스트fascist’라는 용어는 보수와 진보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던 정치 세력과 20세기 초 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상황과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발현되었다. 제 1,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개별 국가들의 정치 상황과 맞물렸던 파시즘은 투표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과 여성의 정치 참여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을 강타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페미니즘과 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즘ism’들의 향연 속에서 파시즘은 강렬한 유혹으로 대중들을 사로잡는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보수 세력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고 있던 시기, 바야흐로 혁명의 후폭풍에 시달리면 세상은 불안한 동거가 계속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을 비롯한 나라들에서 서서히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광기는 단순하게 우생학과 인종주의로 설명될 수 없다. 유대인의 절멸만이 게르만 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는 히틀러나 괴벨스의 개인적 성향의 문제로 귀결될 수는 없다. 케빈 패스모어의 <파시즘>은 유럽에서 자생한 ‘파시즘’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의 광풍이 일어나기 전의 파시즘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보수주의와 결합한 파시즘의 현상을 되돌아보며 이것이 민족과 인종과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젠더와 계급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 관점 중의 하나이다.

공산주의 초기의, 파시즘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의는 1935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에 따르면 ‘권력을 장악한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이고 쇼비니스트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금융자본주의 요소의 개방적이고 테러적인 독재체제’다. - P. 35

이 관점은 경제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파시즘의 대한 정의이긴 하지만 파시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더더욱 놀라운 것은 파시즘도 결국은 “민주적인 사회를 조직하기 위한 선거와 기술적 수단이 없었다면 파시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P. 72)”라는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파시즘도 우리들의 선택이었다는 전제가 가능해진다. 이 책은 파시즘의 역사와 변천 과정 현실 정치와 현실과의 관계를 고찰하면서도 여전히 ‘here and now지금-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

  폭력과 대응 폭력은 미국의 패권적 제국주의와 이슬람문화와의 갈등 관계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무한 순환 구조는 권위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파시즘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민족적 대중주의’가 파시즘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노파심은 기우에 불과하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걱정과 우려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언제든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강력한 흡인력을 지닐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민주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단순한 믿음만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광기와 폭력은 친구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07년의 현실은 어디쯤 위치해 있는 것일까? 하늘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고 싶다. 아득한 태초에서 출발해서 보이지 않는 미래로 여행 중이라면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아니 지금 현재의 모습보다 먼 미래의 모습보다 짧은 미래라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아니 타인들의 희망에 대해 살펴보고 싶다. 그래도 2008년은 시작될 것이고, 우리의 삶도 계속되겠지만 파시즘이 여전히 ‘가능한 선택지’라는 저자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공포 속에 몰아넣기에 충분해 보인다.


071216-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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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8-11-2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옮겨가도 되겠죠. 지금-여기의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sceptic 2008-11-28 21:59   좋아요 0 | URL
2008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저는 무섭습니다. 분노를 넘어서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