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 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1. 자본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괴물은 모든 것들을 삼켜 버렸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이기주의에 기대게 되었다. 그것은 사유재산의 축적을 통해 그리고 토지와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로 컴퓨터처럼 2진법으로 분류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마르크스의 주장은 대체로 틀리지 않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확인했다. 부르주아든 프롤레타리아든 단 두 개의 팀으로 분류한 방법은 혁명을 위한 준비단계로 마르크스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라는 책은 1844년 집필된 책으로 1867년 <자본>이 나오기 이전의 파리 시대의 그의 사상적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책이다. 청년 마르크스에게 당시의 경제 이론들은 자본이라는 큰 틀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과 신념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지금은 당시의 경제 상황과 다르게 파악될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큰 틀이 바뀌지는 않았다. 어쨌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본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관심은 자본의 소유에 대한 방법과 사용법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아니 이제든 국가의 경계마저 허물어졌다. 그 자본이 미치는 파괴력은 산업시대의 그것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은 증대되었고 자본에 접근하기는 더욱 어려워졌으며 자본의 형태와 소유 방식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여전히 자본가가 되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고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며 토지와 생산수단 이외의 금융자본 등 상상을 초월하는 자본들이 생겼다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노동자로 머물러 있다. 자본을 이해하는 것은 내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본의 힘에 경배할지어다.

2. 노동

 육체적인 노동의 댓가로 먹고사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직종과 업무에 상관없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노조가 없는 무노조 경영을 표방하는 삼성맨들의 프라이드를 보면 알 수 있다. 불쌍한 노동 기계. 그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비참하고 부정적인 현실 인식이 아니라 분명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또 다른 현실이 시작된다.

 노동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부를 창출하고 자본을 형성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엄한 놈이 챙긴다. 단순하고 상식적인 논리와 마르크스의 주장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보이지 않는다. 어렵고 따분한 말로 길게 서술되어 있으며 스미스의 경제이론을 인용하고 반박하고 있지만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다. 내가 이해하는 방식은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노동의 역할과 가치를 알고 산출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노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현실에서의 역할을 찾고 싶은 것이다.


3. 지대

이제는 우스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땅이라니? 땅이 자본이 되는 시대는 지나갔나? 나이키 같은 다국적 기업은 마케팅과 서비스만 제공한다. 생산을 공장과 토지는 값싼 노동력을 따라 지구를 떠돈다. 또 헌법에 토지 공개념을 포함하자는 노무현의 논리는 어떤가? 여전히 땅땅거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노동과 지대는 부를 축적하기 위한 기본 요소이며 현재에도 유효하다.

 시대가 달라지고 상황이 변하고 IT가 어떠니 인터넷이 어쩌니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과 다른 것은 땅은 늘거나 줄지 않는 데 있다. 문제는 다시 노동이다. 토지는 소외되지 않지만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본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노동자는 불쌍한 노동 기계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4. 사유재산

 인간의 본능이다. 공산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대한 본능을 간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유 재산은 영원할 것이다. 이기적 욕망과 사적 소유의 관계는 경제 문제에서 당연한 전제가 된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소비하거나 구매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경제 원리가 가장 정확하다. 사유 재산은 노동하는 인간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제공한다. 오늘을 버티게 하는 마약 혹은 환상.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거나 소유할 가능성이 없는 경우,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경우를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확인한다. 그리고 그 현실을 살아간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우리가 책임질 수 있으며 제도의 개선을 통해 보완한다고 해결될 수 있을지 오른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5. 화폐

 새로 나온 만 원권을 교환하기 위해 3박4일 동안 한국은행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라. 그것의 교환가치나 상품가치를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단면이다. 화폐의 기능과 속성을 아는 것보다 화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좌절감.

화폐의 속성의 보편성은 그 본질의 전능성이다. 그런 까닭에 화폐는 전능한 존재로 간주된다…화폐는 욕구와 대상, 인간의 생활과 생활수단 사이의 뚜쟁이이다. 그러나 나에게 나의 삶을 매개해 주는 것, 그것은 나를 위해 다른 인간의 현존도 나에게 매개해 주며, 그것은 나에게는 다른 인간이다. - P. 174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전지전능하신 ‘화폐’의 위력을 실감한 마르크스의 혜안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능성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이 두렵다. 보다 많은 ‘화폐’가 행복의 척도이며 생의 목표이며 현실적 삶의 궁극이라는 데 모두 동의하십니까?

 청년 마르크스의 결정적 시기의 다듬어지지 않는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책의 내용보다 현실이 먼저 보이고 지나온 자본주의의 역사가 보인다. 우리가 고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느냐는 질문에 반대한다. 자본주의를 엎어버리자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가공할 위력에 몸 둘 모르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도 아니다. 난해한 번역문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드는 현실로 두통을 유발하는 책이다.


070125-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정치에 지독하게 민감하다. 그러면서 정치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뉴스에 보도되는 정당과 정치인들의 행위를 술안주 삼아 씹어대지만 우리의 사유와 태도와 그리고 행동 방식은 정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일용직, 비정규직 노동자도 한나라당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일보의 관점으로 현실을 비판하며 자신의 생각으로 착각한다. 왜 그럴까?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억압된 가부장적 생활 양식때문이라는 성정치학을 주장했지만 자신의 계급과 모순된 사고방식과 정치 행태를 쉽게 진단하기는 어렵다. 이런 현실은 지속되며 쉽게 바뀌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자신의 위치와 생활을 확인하고 삶의 근본적인 목표와 태도를 결정하는 일은 어디에서 배워야 하는 것일까?

정규 학교 교육을 통해서 난 이런 것들을 배우지 못했다. 하물며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교육의 혜택을 제대로 입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는 더 할 것이다. 얼 쇼리스는 인문학을 통해, 정치적 삶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한다. 가난 때문에 겪는 고립적 삶을 벗어나 민주 시민으로서 정치적 삶을 누리고 그 안에서 희망과 행동하는 삶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을 통해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얼 쇼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확신을 행동으로 옮긴다.

미국에서 시작된 클레멘트 인문학 코스는 이제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얼 쇼리스의 작지만 엄청난 실험은 성공적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또다른 대안으로 자리잡았다. “최고의 학생들을 위한 최고의 교육은 곧 모든 이들을 위한 최고의 교육이다.”라는 허친스의 말을 교육 방법으로 굳게 믿고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삶을 행동하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정치적 삶은 질서와 자유 사이의 공간을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행동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정치, 또는 중용이기 때문이다. - P. 67

수강생들로 하여금 공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하고, 가난한 탓에 겪는 고립에서 벗어나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교육목표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클레멘트 인문학 코스는 여러 학문 분야를 통합한 형태의, 대학 수준의 강좌인데, 교수 방법으로는 여전히 소크라테스식 방법론이 활용되고 있다. - P. 202


책을 읽으면서 부족한 인문학 지식에 부끄러워진다. 서양의 문화와 그들의 정신을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철학과 역사, 예술 일반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지식을 얻을 기회가 없었다.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같은 곳을 통해 자발적인 노력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 엉뚱한 발상이지만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인문학은 절대로 필요하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정신적 흐름과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예술에 대한 안목은 가난한 삶을 벗어나기 위한 헛된 방법론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시행하고 있다. 과명시 평생학습원과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의 인문학 과정이 그것이다. 인문학은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의 이유로 살아가는 삶의 희망을 갖게 한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에 대한 자각은 가난한 사람들 보다 더 많은 것들을 잃고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얼쇼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타자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이다. - P. 426

민주주의가 세상의 절대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수많은 모순과 단점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민주적 삶에 대한 가치와 목표를 공유해야 한다는 당위와 만나게 된다. 타자의 행복을 위해 무릅쓸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이라면 기꺼이 그 위험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자그마한 실천과 노력으로 함께 행복할 수 있다. 인문학 과정의 전폭적인 지지와 동참이 아니더라도 모두 함께 가는 길을 찾아야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동안 당연한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070111-00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짱꿀라 2007-01-1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인문학자들과 우리나라 인문학자들은 질적으로 다르지요.

sceptic 2007-01-17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인문학자를 찾기 힘들죠.
 
임사체험 상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윤대석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죽음은 삶의 그림자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 간다는 말이다. 분리할 수 없는 두 세계를 우리는 늘 분리된 세계로 인식한다. 불연속적 세계관이나 통합된 하나의 눈으로 보면 시간과 공간이 일직선상에 놓여 질 수 없다. 죽음과 어깨동무하고 늘 곁에 두고 함께 걸어가지만 호기심이나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죽음은 그렇게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아침에 헤어지는 가족과의 만남이 마지막일 수 있다. 내일을 맞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세계관과는 다르다. 모든 순간에 충실하고 싶은 것이다. 이 순간을 사랑하고 싶다.

죽어본 사람은 없다. 다만 죽음과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혹은 잠시 죽음의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은 많다. 그 사람들은 특별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체험을 임사체험이라고 한다. 죽음의 경계까지 가본 경험, 거의 죽었다고 판단되었지만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 그것을 임사체험이라 부른다. 명칭이야 어떠하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간혹 들어본 적이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은 이런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었다. 기억될 만한 책이다.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입각한 서술도 마음에 들었고 정확한 취재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전개도 이 책을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신비주의 관점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을 전해주는 책도 아니고 과학의 시선으로 그것을 부정하는 책도 아니다.

삶에 대한 애정과 집착만큼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거부감을 갖고 있다. 왜?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단순히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익숙한 세계인 이 세상과의 이별때문일까. 소유한 것들에 대한 욕심일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련일까.

죽음 저편으로 갔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을 이쪽으로 보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영원한 수수께끼고, 영원한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하) P. 401

정확하지 않지만 다치바나의 이 말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불안과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간 축적된 연구 성과에 대한 분석과 직접 취재를 통해 접근하고 있는 이 책은 죽음 이후에 대해 설명한다.

임사체험 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연구자들의 사례를 통해 터널체험과 체외이탈 등 공통적인 경험들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 책은 죽음의 세계에 접근하기 시작해서 실제 사례를 통해 임사 체험의 최대 쟁점인 ‘뇌내 현상설’과 ‘현실 체험설’에 대해 모두 점검한다.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서술되는 저자의 주장은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 주관적이진 않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논거들 속에는 항상 반론의 여지가 남아 있다. 그런면에서 다치바나의 방법은 신뢰할 만하다. 어느 쪽에도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학이든 아니든 기준도 관점도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은 마지막 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삶의 관점에서 바라본 죽음을 찾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질 것인가는 물론 각자의 몫이다. 죽음 이후에 대한 논쟁을 하든, 종교를 갖든 버리든 상관없이 결국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된다. 죽음을 맞는 태도와 죽음 이후에 대한 자세도 삶이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삶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죽음이야말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김열규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최준식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이나 죽음 자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보다 생에 대해 환멸을 느끼거나 삶의 목적과 방향이 모호한 나같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림자처럼 늘 우리 몸에 드리워져 있는 죽음을 두려워말자.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노력이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게는 결국 죽음도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착된다. 이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삶에 충실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말을 되새겨본다.

‘네가 죽음을 무서워하고 있는 동안은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진짜로 죽음이 다가왔을 때는, 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너와 죽음이 만나는 일은 없다. 죽음에 대해 고뇌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하) P. 404


061225-142(상), 061227-143(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12-27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한 해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인지 댓글도 썼다 지웠다 했답니다.
마음이 심란해지는 책이네요.

sceptic 2006-12-28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이란 늘 그런 느낌이지만 다른 태도와 방법도 필요하지 않은가 싶어요. 저물어 가는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시길...
 
개념어 사전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개념이 없다. 군대나 사회에서 개념이 없다는 말은 욕이다. 어떤 일의 순서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헤매거나 엉뚱한 짓거리를 일삼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보통 ‘개념 없는 놈’이라고 욕을 한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런 개념은 일반성, 정상성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진짜 개념이 없는 것인가는 따져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일반적인 잣대로 말하자면 남경태의 <개념어 사전>에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 논리학에 따르면 개념이란 ‘한 무리의 개개(個個)의 것에서 공통적인 성질을 빼내어 새로 만든 관념(觀念).’이라고 정의한다. 언어의 추상성이 바탕이 된 공통 분모가 개념이다. 그러나 국어 사전의 정의는 좀 다르다.

개념 [槪念]
[명사]
1 어떤 사물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
2 <사회> 사회 과학 분야에서, 구체적인 사회적 사실들에서 귀납하여 일반화한 추상적인 사람들의 생각. 예를 들어 사람들이 많이 시청하는 프로그램을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라고 할 때,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다.
3 <철학>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뽑아내어 종합하여서 얻은 하나의 보편적인 관념. 언어로 표현되며, 일반적으로 판단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나 판단을 성립시키기도 한다.


‘종횡무진’시리즈로 잘 알려진 남경태의 <개념어 사전>은 과연 진짜 ‘개념 없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에는 상식도 정보도 없다. 다만 저자가 나름대로 공부하고 이해하고 정리한 개념들이 넘쳐난다. ‘사전’이라는 제목을 붙이기 위험할 정도로 ‘주관적’인 시각과 접근 방법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 책에 대한 판단과 감상도 지극히 주관적이겠지만 장정일의 <공부>를 통해 우리 모두가 각자 이런 ‘개념어 사전’ 한 권씩을 만들 수 있다면 제대로 공부했다고 할 수 있다. 힘들겠지만 나만의 ‘개념어 사전’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게 만드는 책이다.

국어 사전적 의미로 보면 이 책은 ‘어떤 사물 현상에 대한 지식’과 ‘사회 과학 분야에서, 구체적인 사회적 사실들에서 귀납하여 일반화한 추상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다만 애써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 멋대로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쓴 개념어 사전’이 이 책의 원제목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다. 주관과 객관에 대해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 기준은 모호하며 이해 방식과 설명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면 이 책이 주관적이라는 데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세상에 넘쳐나는 사전과 인터넷 정보들을 놔두고 누가 이런 종류의 개념어 사전을 찾아 볼 것인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인문학 용어에 대한 개괄적인 접근과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나처럼 잡다한 지식들로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개념이 없는 사람들에게 제격이다. 남경태는 스스로 편향적이며 주관적인 용어 정리라고 말하지만 읽는 사람들은 다 걸러서 본다. 거름장치는 독자들의 몫이다. 둘째, 감수성 위주의 문학작품이나 실용적 독서에 뭔가 염증을 느낀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다. 인문학은 사람과 관련된 학문이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사는 사회와 그 사람들이 걸어온 역사 그리고 그들의 생각인 철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의 독자로 적합하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주관적 용어 정리에 거부감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또 하나의 <개념어 사전>을 기대해 본다. 이런 생산적(?) 논쟁과 모호했던 개념들에 대한 관심과 정의는 사람들의 인식 틀을 확고하게 해 줄 수 있으며 사고의 폭을 넓혀 줄 수 있다. 하나의 대상과 현상에 대한 모호했던 관념들을 확인하고 스스로 재정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 바탕 위에서 한 사람의 세계관이 확립되고 수정되며 발전하고 개선된다. 그 개념들이 어떠한 것이든 그래서 우리에겐 끊임없는 정진 자세가 요구된다. 우리가 아니라 나에게만 해당되는 건가?

과학 용어처럼 분명하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원랙 복합적인 의미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문학 용어에 대해 저자는 “개념의 의미를 사전적으로 정의하는 대신 그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애썼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의 분명한 지식과 확고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독자들은 가라. 하나의 용어와 개념이 탄생하기까지의 복잡하고 역사적인 배경들과 그 주변적 지식들을 통해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오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모호했던 경계와 이미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고 보다 적극적고 능동적인 인문학 공부를 위해 꼭 한 번쯤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어쨌든 사전인데 이렇게 성의 없는 제본과 표지는 들녘이 반성해야겠다. 시집도 아니고 얇은 겉표지는 두 번 이상 뒤적이면 본책과 분리되고 찢어지거나 더러워져 검은 속 표지의 제목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다.


061216-138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12-16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으로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리뷰를 읽어보니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짱꿀라 2006-12-17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 읽어보니 금방이라도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놓고 읽지를 못해서.....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마늘빵 2006-12-1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전문가들 평이 별로더라구요. 너무 주관적이고 맞지 않는 해석이 많다구. 저도 살까 하다가 말았어요. 출판사서 너무 띄우는거 같던데.

sceptic 2006-12-17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santaclausly님 즐거운 책읽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프락사스님 개인적으로 전 전문가들을 믿지 않습니다..^^ 보수적인 전문가들이 이 책을 제대로 평가할 리 없다고 봅니다. 출판사도 먹고 살아야죠. 그렇다고 제가 들녘에서 받아먹은건 없습니다.

비로그인 2006-12-1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을때 전문가들의 평을 들여다보게 되겠죠.
때로는 자기와 생각이 비슷할 수도 있고 아님 다를 수도 있고..
중요한건 책을 읽고 난 후 본인의 느낌일거에요.
님이 쓰신 리뷰는 님 만의 분위기가 있어요.

sceptic 2006-12-1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독서라는 행위가 1차적으로 극히 주관적이라고 생각해서 2차적으로 객관적, 사회적 의미를 찾거나 효용을 따지거나 하니까요. 지멋대로 책읽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marine 2007-01-03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 말이 옳은지 제가 직접 읽어 보고 싶네요 ^^
종횡무진 시리즈를 재밌게 읽어서 저자에게 호감이 갑니다

sceptic 2007-01-0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만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평갑니다...괜찮던데요...^^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 뜨인돌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헤르만 헤세의 이름을 보자 책갈피에 꽂아둔 오래된 사진처럼 아련했다. 누구나 한 번 쯤 그랬겠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지독한 열병을 앓았던 시절에 나는 헤세와 마주했다. 특히 <수레바퀴 밑에서>와 <知와 사랑>에 대한 기억은 사춘기 시절의 다른 이름이다. 골드문트와 나르치스의 우정과 방황은 며칠 동안 잠 못 이루는 밤을 만들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순수했던 시절의 흑백 사진처럼 선명하다.

1877년에 태어나 1962년 죽은 헤르만 헤세는 사후에 그의 문학적 평가가 어떠하든 개인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작가임에 틀림없다.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은 책과 관련된 글들을 모아놓은 수상집이다. 잡지와 신문에 발표됐든 글이나 전집류에 포함된 글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 책에 처음 소개된 글들도 있다. 책을 주제로 독서와 문학 전반에 관한 단상들이 솔직하고 편안하게 전개된다. 짧은 글들을 모아 놓았지만 책의 내용과 흐름은 ‘독서’라는 맥락으로 연결된다.

독서와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넘쳐나지만 주로 100년쯤 전에 쓰여진 헤세의 글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왜 책을 읽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한 문장을 읽고 한참 생각했다. 나는 독서라는 행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나름의 기준과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왜 책을 읽는가에 대한 반성은 때때로 필요하다. 인쇄술과 대량 출판이 이루어지면서 지식의 대중화의 선봉에 섰던 책을 헤세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스스로 만든 세계 문학 전집의 목록과 작품에 대한 간단한 인상 비평 등은 지금 우리 시대의 책읽기에 대한 반성의 잣대가 된다. 지금 그 목록이 유효하다는 말이 아니라 책의 효용을 따지기 이전에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궁극적인 삶에 대한 태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취미삼아 읽는 독서에 대해 헤세는 “불량독자들이 시나 소설에 끼치는 부당함은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잘못된 독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부당하다. 무가치한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에게 하등 중요하지도 않고 그린 금방 잊어버릴 게 뻔한 일에 시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며, 일절 도움도 안 되고 소화해내지도 못할 온갖 글들로 뇌를 혹사하는 짓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문학을 위주로 한 독서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른 면에서 아쉬운 점도 많다.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절대로 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헤세와 다른 이야기를 하겠지만 일반적인 문학 독자들을 위한 충고와 성찰을 위해서 이 책은 시원한 냉수와 같다. 문장의 곳곳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비판과 충고들은 지적 우월감과는 다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철지난 노래처럼 들리는 부분도 많고 지금 상황에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들도 많다. 하지만 독서에 대한 기본 자세와 독자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종이로 된 책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하는 말들과 문학의 종언을 고하는 조사들이 난무하는 시대지만 문학이든 아니든 “인간이 자연에게서 거저 얻지 않고 스스로의 정신으로 만들어낸 수 많은 세계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책의 세계다.”

독서에 무슨 기술이 있겠는가? 책을 밥벌이의 수단이나 실용적 목적으로 활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유혹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없다. 다만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독서의 태도와 방법에 대한 점검이 필요할 뿐이다. 헤세는 이 책에서 독서와 책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넘어서는 단상들을 제공한다. 각자 독서의 방법과 자세에 따라 한 마디쯤 새겨둘 말이 있다면 이 책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작가의 짧은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팔아먹기 위한 편집 능력과 상술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허접하지 않다. 독서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 번 쯤 점검이 필요한 분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바닥에 아무리 멋진 카펫이 깔려 있고 호화로운 벽지와 명화가 온 벽을 뒤덮고 있다 한들, 책이 없다면 가난한 집이다. 또한 책을 알고 소유하고 아끼는 사람만이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도록 도와줄 수 있다. - P. 183


061210-135

댓글(5)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짱꿀라 2006-12-11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을 보셨군요. 저도 이 책을 읽었답니다. 많은 정보를 얻게 한 책이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좋은 한주 되시기를......

드팀전 2006-12-11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주에도 수 십에서 수백권이 나오는 책들 중에 무가치한 책들-저자에게는 가치가 있을지몰라도-이 다수지요. 무조건 책읽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대개 좋은 책을 보지도, 많은 시간을 독서에 쓰지도 않는 모습을 봅니다.가끔 직장에서 동료들이 들고 다니는 책을 보면 ^^ ... 쉽게 맛을 내는 조미료에 익숙한 사람들처럼 전부 말랑 말랑한 책들만 봅니다.무언가 고민거리를 던지는 책들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에 다들 눈을 돌려버리는 듯 합니다.그리고 가만 있으면 다행인데 가끔 제가 이상한 책을 한 권 들고 다니면 '이런거 왜봐..취향 독특하네.그런건 대학교때나 한번 보는거 아니야?'라는 식입니다.젊은 세대일 수록 더 하더군요....책을 통한 의식의 성장이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보입니다. 안타깝지만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요. 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

sceptic 2006-12-1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taclausly

santaclausly님도 행복한 한 주 보내세요.

드팀전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타인의 독서 취향을 쉽게 바뀌기는 어렵습니다. 독서의 효용에 대한 이해와 독서의 목적도 다르니까요. 안타깝긴 하지만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자기만의 방식을 넓혀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식의 성장이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독서를 위해 저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marine 2007-01-03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소 지루한 원론적인 책이 아닐까 싶었는데 리뷰를 보니 읽고 싶어집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sceptic 2007-01-0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고 간단한 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