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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지식총서 182
홍명희 지음 / 살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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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흔히 암흑기라 부른다. 이 명명법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지만 우리가 중세를 암울한 시기로 여기는 까닭은 인간 이성의 암흑기였기 때문이다. 종교와 신학의 가치가 모든 것에 앞섰고,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정신은 존중받지 못했다. 철학과 과학은 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 추구될 수 있는 가치였다. 그러다가 계몽과 이성중심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객관적 지식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시기를 맞이한다. 근대로의 이행기에 인류는 과학과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객관적 지식이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다. 다만 한 부분을 강조하다보면 분명히 소홀해지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이성을 객관화 시킨다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부정될 수 있는 말이다. 객관성이라니?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사는 대부분의 사실들이 그러하듯이 주관적 판단과 가치가 개입된 문제일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인간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이성과 감성이 그것이다. logos와 pathos로 구분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본다. 어느 한 쪽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20세기를 전후해서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감성의 역할과 위상이 축소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때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가스통 바슐라르이다.

바슐라르의 힘겨웠던 삶의 과정으로 시작되는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는 한 인간의 삶의 역경이 그의 학문과 사유 방식을 지배할 수 없다는 숭고함까지 느끼게 한다. 자신의 삶과 그의 업적은 분명히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슐라르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과 주관적 가치를 극대화시킨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객관성을 추구하면서도 사실은 주관적인 가치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P. 30)"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바슐라르는 우리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주관적 가치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규명해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 인간에게 상상력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꿈과 몽상이 그것이다.

인간은 몽상 속에서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상상력이 활동한다. 이 몽상은 완전한 의식의 상태도,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도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의 독특한 정신활동이다. 밤에 꾸는 꿈이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에서 무의식 속의 에너지가 활동하고, 사색은 명료한 의식의 집중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데 비해서 몽상은 이 두 활동의 중간지대에서 이루어진다. - P. 43

밤에 꾸는 꿈이 현실적 자아를 벗어난 주체에 의해 실현되는 상상력이라면, 몽상은 낮에 꾸는 꿈이라고 볼 수 있다. 바슐라는 이 독특한 인간의 상상력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이 상상력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밝히고 있다. 모든 예술 활동의 근간이 되며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차이이지만 눈으로 확인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고 많은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의 주장들을 살펴보면 이미지의 역할들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이미지와 상상력을 이성과 합리보다 낮은 것으로 바라본다. 활자의 보조수단으로서 이미지의 역할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혁명적인 변화를 보였던 이미지의 힘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의 도스환경에서 윈도우의 출현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컴퓨터를 대하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와 습득, 활용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확산되었다. 단순히 쉽고 빠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이미지와 상상력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독특한 능력을 적용시킨 예라고 볼 수 있다. 엉뚱한 예로 여겨질 수 있으나 우리가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와 상상력은 이성과 논리를 넘어선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감각적 이미지와 정신적 이미지와 같은 다양한 부분들은 홍명희 말대로 미래에 대한 전망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바로미터가 된다. 미래는 이미지와 상상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 미래가 어떤 미래일지라도 바슐라르의 탁월한 직관적 눈을 빌려야 한다. 그의 이미지와 상상력이 지니는 현대적 의미에 대한 저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현대 사회에서 갈수록 감성적인 부이 사라져 가고, 개인들은 분별없이 육체적 자극에만 중독되어 가는 - 그럼으로써 갈수록 타율적 인간이 되어가는 - 지금의 현상은 결국 활발한 상상력의 퇴와 창조적 이미지의 화석화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현대의 이미지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추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들은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 P. 81

결국 문제는 이미지들의 어떠한 양과 질이 우리의 지배적인 문화를 생산해 내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가 이미지를 과연 진정한 창조적 상상력의 발현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 P. 91


스무살 무렵 <촛불의 미학>으로 처음 만났던 그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재회는 즐거웠고 몽상은 달콤했다. 공상과 망상이라도 좋다. 백일몽이라고 불러도 좋다. 끝없는 상상력과 감각적, 정신적 이미지의 확산은 우리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척도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꿈을 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앞날에 축복 있기를. 꿈은 이루어진다니까.


06073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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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정말 암흑기였나 살림지식총서 25
이경재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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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평가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아니, 평가가 궁금한 게 아니라 도대체 어떤 시대인지가 궁금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객관적 안목에 대한 답은 모두 역사 속에 숨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나간 시대에 대한 편견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 인식의 힘은 물론 교육에서 출발한다.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특정 시대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는 규정을 지어버린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바뀌거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두 번째는 시대를 관통하는 사상의 흐름이다. 여기에는 문화와 종교, 철학과 예술 등의 요소들이 포함되지만 그것을 하나로 묶어내는 위험을 무릅쓴다. 한마디로 시대를 정의하는 일은 그만큼 어렵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중세에 대한 우리들의 오래된 편견은 ‘암흑’이다. 중세는 암흑의 시대다라는 편견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이유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일단 그렇게 외웠고 배경에 대해서 심각하고 깊이있게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이경재의 <중세는 정말 암흑기였나>라는 책은 당연한 명제에 대한 문제제기로 보인다. 하지만 그 당연한 문제제기가 논쟁적이거나 설득력있게 진행되고 있지는 못한다.

중세는 주지하다시피 종교와 철학의 문제 그리고 신과 인간의 문제로 요약된다. ‘안다’와 ‘믿는다’는 철학과 종교의 특성을 대비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또한 결합적인 문제이다. 믿기 위해 알아야 하고 그 믿음을 확신하기 위해 철학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보통 ‘암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신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당연히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부정과 비이성적 교리의 힘은 해석 당사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변의 진리 행세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종교의 이런 부정적 측면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자유와 개별적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존중받게 된 것은 중세 이후이다. 과학적, 합리적 사고가 가능하게 된 것은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모욕이며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런 시대의 특징을 우리는 ‘암흑’이라고 부른다. 물론 시대적 가치와 사상을 외면한 채 현재적 관점에서 지나간 시대를 재단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쉽게 지나가버린 시대 상황을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세라는 불분명한 시대를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암흑의 시대’라고 명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시대구분조차 모호한 인문학적 시대구분을 논의의 중심에 놓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중세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역사 시대 구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와 이후 근대와의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모호한 시대구분과 성격은 지금 이 시대를 규정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어떤 시대적 특징이 곧바로 그 시대를 새롭게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혹은 미시적 관점에서 한 시대를 바라보는 일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만 지금까지의 논의처럼 단순하게 한 마디 말로 규정 지을 수 없는 복잡성에 대해서 반성하는 태도는 바람직하다고 본다.

인류의 문화와 인간의 삶이 발전(?)하고 있다면 개인의 인권과 사상이 존중받고 이성과 합리적 사고가 존중받는 시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단순한 비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새로운 가치 속에서도 중세는 분명 ‘암흑’이라는 색깔을 쉽게 벗어던지지 못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반론과 반성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단순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호기로운 목소리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중세의 철학적 토대와 인간의 의식을 고찰한다고 해서 그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먼 미래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또 다른 의미의 ‘암흑’이라고 부를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와 생활의 방식은 인간 개개인의 인권과 행복이 어떤 형태로 비쳐질지 알 수 없다. 역사에서 객관적인 시각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보다 다양한 시선과 관점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노력과 고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060828-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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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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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먼이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 P. 249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여학생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직접 책을 읽는 일보다 즐거울 때가 있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재미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렇게 책을 읽던 그 많은 사람들은 책 때문에 인생이 달라졌을까? 휘트먼의 말처럼 우리의 임무는 책이 아니라 세상을 읽는 것이다. 다만 책은 세상을 비춰보는 프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한 사람의 내일이 암울해지고 인류의 미래가 어둡다고 할 수는 없다. 단순히 ‘독서’ 행위 자체가 갖는 사회적 의미는 크지 않다. 다만 책이라는 형태의 지식 전달 수단이 없었다면 현재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제 책은 너무 크고, 노력과 부피에 견줄 때 상당히 비효율적인 저장 매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어떻게 그리고 왜 책을 읽게 되었을까?

이 단순하지만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에 담겨 있다. 이 책은 ‘역사’라는 형식에 대해 갖기 쉬운 선입견들이 없이 형식이 자유롭기 때문에 우선 마음에 든다. 연대기 순으로 혹은 시대별로 책이나 독서와 관련된 정보들을 나열했다면 오히려 지루했을 법한 이야기들을 저자는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먼저 <독서의 역사>는 역사책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역사는 ‘독서’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독서가’의 역사다. 책을 읽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역사책이라서 흥미롭다. 진흙 서판에서 비롯된 책의 역사나 여러 나라의 책의 기원들을 들추지 않고 책을 읽는 ‘행위자’를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 형식의 글들이 훨씬 더 흥미롭고 설득력을 가진다. 그렇다고 내용 자체가 단순하고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니다.

읽는 사람들이 가려 읽고 부분들을 조합해서 읽어도 얼마든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독서에 관한 역사책이다. 어느 대목을 읽어도 독립적으로 독서가에 관한 즐거운 소품이 되지만 부분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룰 때는 한 권의 역사책이 되는 보기 드문 책이다. 어떤 역사든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자료와 증거들을 들이밀며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채도 필요하겠지만 그저 차 한 잔의 여유와 더불어 산책을 떠나듯이 저자의 안내에 몸을 맡겨 보고 싶은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독서의 역사>는 책을 좋아하는 ‘독서가’들의 필독서라고 해도 좋을 만하다.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자 종착지가 바로 책은 아닐까? 진흙 서판에서 이제는 LCD 모니터까지 책을 읽는 형태와 방법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달라졌다. e-book이 등장하면서 수천년간 지속되어온 종이책의 형태마저 달라졌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책에 대한 개념과 정의도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책이 갖는 의미와 역할까지도 한번 쯤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 바로 <독서의 역사>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책에 대한 지독한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6000년간 지속되어온 인류의 책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저자는 시대를 대표하는 독서가를 통해서 혹은 번역가나 검열관, 책 수집가들을 등장 시키며 독서의 역사를 풍요롭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이 다른 역사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이자 재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행복해지는 방법만큼 행복의 종류도 다양할 것이다. 가장 적은 비용과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최대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이 있겠지만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행복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알베르토 망구엘이 더듬었던 ‘독서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책에 미친 사람들과도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그것이 책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15세기 초에 "나는 어디에서든 행복을 추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자그마한 책과 함께하는 좁은 구석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 P. 223


060829-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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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기억,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 - 어린 시절의 체벌과 학대가 이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서
앨리스 밀러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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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지나가도 몸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는다. 그것이 가장 큰 슬픔이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마음보다 먼저 몸이 아프다. 앨리스 밀러의 새 책 <폭력의 기억>은 어린 시절의 체벌과 학대가 이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보고서이다.

20세기 프로이트 이후 인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변화했고 그 영향과 파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무의식에 대한 상식 수준의 지식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까지 가지게 된다. 꿈을 해석하면 그 사람의 억눌린 자아와 억압된 욕망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인간의 해방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프로이트라는 거목 때문에 생긴 그늘이다. 정신과 의사인 앨리스 밀러는 철학과 심리학 사회학까지 공부했다. 이런 배경이 <폭력의 기억>을 읽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만큼 이 책은 폭넓은 측면에서 ‘폭력’에 대한 잔인한 기억을 되새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폭력은 단순한 물리적 폭력을 말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지속적이고 충격적인 모든 체벌은 물론 언어 폭력과 정신적 학대에 이르기까지 개인에게 가해진 모든 억압을 띤 형태를 일컬어 ‘폭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는 시기의 문제이다. 유년기라는 시기는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사회화의 과정을 거쳐 그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기호들을 받아들이고 사회적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은 고통스럽다. 개인보다 사회의 가치가 주입되며 선악, 오호의 가치 판단을 넘어 개인의 선택과 판단은 억압된다. 어린 시절은 백지상태와 같다. 흰 종이에 악몽을 그려 넣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잔혹극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시기에 벌어지는 체벌과 학대는 일방적인 폭력이다.

둘째는 부모와의 관계이다. 타인과의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 부모와의 관계는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부모가 완벽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윤리와 도덕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절대 가치를 주입한다.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부모에 대한 공경은 논리와 이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세상의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종적 인간관계의 전형으로 부모 자식 관계를 들 수 있다. 군사부일체라는 봉건적 인식태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이러한 가치가 빚어내는 폐해에 대해 모두가 침묵한다. 침묵의 카르텔은 세대를 뛰어넘어 전수된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부모가 된 상처받은 어린아이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것이 폭력인줄도 모른 채.

저자가 말하는 문제의 핵심은 어린 시절 ‘폭력의 기억’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태도는 세습된다는 데 가장 큰 문제가 있다. 모든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돌려지기 때문에 원인을 알지도 모른 채 심각한 분열증상과 육체적 고통, 거식증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고통을 수반한다. 그 고통은 개인 차원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확대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해결책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네 부모를 믿지 말라’는 말의 전도 유망함에 대해 이야기했던 박홍규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모든 인간관계가 상하, 종적 관계를 벗어날 때 비로소 개인의 가치는 소중하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폭력의 기억’은 그 기억을 벗어나기 위한 과정과 방법에 대해 실증적으로 이야기한다.

이 책이 흥미롭고 의미있는 것은 1부의 ‘진실을 외면한 사람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체홉, 카프카, 니체에서부터 랭보,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에 이르기까지 ‘폭력의 기억’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이다. 2부 ‘몸의 메시지’에서는 그 폭력이 어떤 식으로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치며 반응하게 하는지 확인시켜 준다. 마지막으로 3부 ‘거식증’에서는 아니타 핑크의 일기를 통해 저자의 이론을 실제로 보여준다.

정신과 의사의 임상 실험 일지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하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인간에 대한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나 자신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폭력’이라는 거북한 단어의 뉘앙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온, 혹은 겪어온 세월을 넘어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자세와 행동의 변화이다.

실천과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 이론은 관속의 시체 같다. 삶이 존재하기 때문에 죽음이 의미있고 소중하듯이 살아 움직이는 못하는 이론은 현실과 유리된 박제와 같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다 지나간 일이라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책을 보라. 그리고 우리의 부모와 부모가 된 나와 우리의 아이들을 돌아보라.


0610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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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 프런티어21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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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에게 있어 ‘혁명’은 어떤 의미였을까?

철지난 유행가를 부르듯 어쩌자고 슬라보이 지젝은 레닌을 들고 나왔나. 궁금하고 의아스럽다. 전위적(?)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이 분석하는 레닌이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레닌도 궁금했고 지젝의 분석도 구미가 당겼다. 이 책은 재밌고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지만 지젝다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지젝답다는 말은 대중 문화 특히 영화에 관한 깊은 이해와 분석으로 독자의 이해를 도와가며 스스로의 논리에 동조를 구한다.

충분히 매력적인 글이고 다면적인 측면의 시각과 분석이 드러나는 책이다.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문제가 되지만 지젝은 유럽의 변방 철학자로 분류된다.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에 빚지고 있는 지젝의 글들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철학적 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다면 그의 논리와 체계를 따라가기 힘들다. 라캉의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에 대한 이해 없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역사적 사건들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젝의 매력은 풍부한 상상력과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이 책에서도 많은 영화를 인용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적절하고 그럴듯한 분석과 인용은 내용과 개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현실 상회에서 벌어졌던 역사에 대한 분석이 이 책의 전제이기 때문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철학자가 바라보는 역사 깊이 읽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역사적 사건과 상황을 분석하는 일과 이 책은 무관해 보인다.

그렇다고해서 레닌이라고 하는 한 개인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이 역사, 사회적 상황과 무관할 수는 없다. 독일에서 벌어졌던 홀로코스트를 비롯해서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현실 상황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바라보는 지젝 특유의 관점이 나타난 이 책은 ‘레닌에 관한 13가지 연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레닌을 통한 현실 읽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당연하게도 지젝의 관심은 과거 역사 속의 레닌에게 있지 않다. 이 책의 제목 <혁명이 다가온다>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90여 년 전의 붉은 혁명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레닌이 성공시켰던 1917년의 10월 혁명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조명 작업을 지젝이 할 리가 없다. 혁명의 핵인 레닌에 관한 다양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오늘을 바라보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과연 혁명은 다가오는가? 지젝은 분명하게 결론을 말하는 대신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반문하는 형식을 취한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독자들의 상상력과 이성의 힘을 이끌어 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좌파인 지젝의 말에 귀기울이는 많은 사람들과 변죽을 울리는 철학과 문학의 짬뽕을 떠올리는 독자 사이에 간극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독자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존재에 대한 욕망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무척 ''폭력적''이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열정이란 정의상 대상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심지어는 수신인이 기꺼이 승인할지라도, 그 혹은 그녀는 항상 두려움을 갖거나 놀라면서 이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 P. 111

완전한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에 대해 전적으로 무차별적이다. - P. 116

사랑이란 종교적 믿음과 같다. 나는 당신의 긍정적인 특징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의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당신의 긍정적인 특징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P. 122

‘레닌은 이웃을 사랑했는가’에서 지젝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근본적으로 ‘사랑’이라는는 것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것같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보여주었던 대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논리적 접근은 일반적 견해에서 벗어나 신선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어떤면으로든 그의 글들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철학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아카데미즘에 갇힌 박제된 논리라면 지젝의 글들은 다시 야생으로 돌아온 사자와 같다. 좌파의 길에 언급하는 그의 확언들은 그것이 비록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에 불과하더라도 새롭게 여겨진다. 그가 말하는 ‘좌파의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의 궁극적인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파의 제3의 길이라는 꿈은 악과의 협정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오케이, 혁명 없이, 우리는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성공한 방식인 것을 받아들이지만 최소한 우는 복지사회의 성과를 구해내고 거기에 더해 성적,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용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 P. 207


06101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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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0-2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의 제3의 길은 지젝이 빈정거리며 비판하는 노선입니다. '혁명 없이' 자본주의(악)와 타협하겠다는 태도를 그는 탈정치시대의 문화적 다원주의라고 규정하면서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습니다. 그러한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하신 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cognizer 2006-10-23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을 단순한 근본주의자로 보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좌파의 제 3의 길에 대한 비판을 이 책에서 다시 언급한 부분을 눈여겨 보면 지젝을 '혁명가'로 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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