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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ㅣ 현암사 동양고전
홍자성 지음, 조지훈 엮음 / 현암사 / 1996년 4월
평점 :
세상 맛을 속속들이 알면 비가 되든 구름이 되든 다 맡겨 둘 뿐 눈 뜨고 보는 것조차 귀찮아지고, 인정이 무엇임을 다 알고 나면 소라고 하거나 말이라고 하거나 부르는 대로 맡기고 그저 머리만 끄덕일 뿐이로다.(후80)
야채의 뿌리를 뜻하는 ‘菜根’. 기름진 고기와 배부른 일상에서 야채의 뿌리를 씹듯 그 향과 그윽한 맛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 이야기가 ‘菜根譚’이다.
홍자성의 이 책은 다른 고전과 달리 그 뜻이 쉽고 명쾌하며 일상 생활속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적절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대한 충고이자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특정한 사상과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일반적인 인간의 속성에 대한 경고와 금언들이 마음밭의 행복을 찾아준다. 그래서 때로는 울림과 감동이 없는 따분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채근담은 전집 225장과 후집 134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것을 시인 조지훈이 자연의 섭리, 도의 마음, 수신과 성찰, 세상 사는 법도로 다시 순서를 재배열하고 역주를 다는 방식으로 엮었다. 각 장 사이에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뒤섞어 다시 배열하고 주제별로 묶어 놓아도 그 뜻에 손색이 없다. 조지훈의 역주 또한 읽을만해서 단순한 주석과 도움말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
나아가는 곳에서 문득 물러섬을 생각하며 울타리에 걸리는 재앙을 면할 것이요, 손 댈 때 문득 손 놓음을 꾀하면 호랑이를 타는 위험에서 벗어나리라.(후29)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 어찌 이름에서 숨는 것만 하겠으며, 일에 익숙한 것이 어찌 일을 줄여 한가로움을 누림만 하랴.(후31)
읽다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면도 있어 지루하기도 하다. 시대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인간 삶에 대한 통찰과 수신의 덕목들로 가득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며 생의 목적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데 도움이 될 만하다. 곁에 두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번씩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책이다.
남의 작은 허물을 꾸짖지 말고 남의 비밀을 드러내지 말며 남의 지난 잘못을 생각지 말라. 이 셋으로써 덕을 기르고 해를 멀리할 수 있다.(전105)
공을 세우고 업을 일으키는 사람은 대개 허심탄회하고 원만하나, 일에 실패하고 기회를 잃는 사람은 반드시 집착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전197)
성질이 조급하고 마음이 거친 사람은 한 가지 일도 이룰 수 없고, 마음이 온화하고 기질이 평안한 사람은 백 가지 복이 절로 모인다.(전209)
남의 나쁜 점을 꾸짖되 너무 엄해서는 안 되니, 그 말을 받아서 감당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전23)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갖춘 이도 있고 못 갖춘 이도 있거늘 어찌 나 홀로 모두 갖추기를 바라겠는가.(전53)
밑줄 친 내용들이 모두 생활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당연한(?) 내용들이다. 되짚어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물질적인 행복이 아닌 참다운 마음의 평화와 안전을 찾을 수 있겠다.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겠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설과 반어, 대구와 대조, 적절하고 화려한 비유 때문에 어렵고 공허한 도덕적, 실천적 삶의 원리들이 오히려 쉽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장점이다. 무엇보다도 전체를 읽지 않아도 그 뜻과 의미를 새겨가며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가 될 듯 싶다. 내용을 평가해서 무엇하랴. 그저 나름대로의 의미는 얼마든 새겨지는 것이고 밑줄이 늘어갈 수록 세월이 흐른다는 이야기가 될 테지만.
음침하게 말이 없는 선비를 만나거든 아직 속마음을 보이지 말라. 발끈하여 성을 잘 내는 사람이 잘난 체하거든 모름지기 입을 다물라.(전122)
몸가짐은 지나치게 깨끗하지 말 것이니, 모든 더러움과 욕됨을 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할 것이요, 사람과 사귐에는 너무 분명하지 말 것이니 착한 사람과, 몹쓸 사람 또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를 모두 포용해야 한다.(전188)
냉철한 눈으로 사람을 보고, 냉철한 귀로 말을 들으며, 냉철한 뜻으로 느낌을 감당하고, 냉철한 마음으로 이치를 생각하라.(전206)
풀뿌리를 씹어가며 살 수 없고 공기청정기를 메고 다니며 호흡할 순 없으나 가끔은 머리를 맑고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영혼의 청량 음료가 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2005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