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근담 현암사 동양고전
홍자성 지음, 조지훈 엮음 / 현암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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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맛을 속속들이 알면 비가 되든 구름이 되든 다 맡겨 둘 뿐 눈 뜨고 보는 것조차 귀찮아지고, 인정이 무엇임을 다 알고 나면 소라고 하거나 말이라고 하거나 부르는 대로 맡기고 그저 머리만 끄덕일 뿐이로다.(후80)

  야채의 뿌리를 뜻하는 ‘菜根’. 기름진 고기와 배부른 일상에서 야채의 뿌리를 씹듯 그 향과 그윽한 맛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 이야기가 ‘菜根譚’이다.

  홍자성의 이 책은 다른 고전과 달리 그 뜻이 쉽고 명쾌하며 일상 생활속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적절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대한 충고이자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특정한 사상과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일반적인 인간의 속성에 대한 경고와 금언들이 마음밭의 행복을 찾아준다. 그래서 때로는 울림과 감동이 없는 따분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채근담은 전집 225장과 후집 134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것을 시인 조지훈이 자연의 섭리, 도의 마음, 수신과 성찰, 세상 사는 법도로 다시 순서를 재배열하고 역주를 다는 방식으로 엮었다. 각 장 사이에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뒤섞어 다시 배열하고 주제별로 묶어 놓아도 그 뜻에 손색이 없다. 조지훈의 역주 또한 읽을만해서 단순한 주석과 도움말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 

나아가는 곳에서 문득 물러섬을 생각하며 울타리에 걸리는 재앙을 면할 것이요, 손 댈 때 문득 손 놓음을 꾀하면 호랑이를 타는 위험에서 벗어나리라.(후29)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 어찌 이름에서 숨는 것만 하겠으며, 일에 익숙한 것이 어찌 일을 줄여 한가로움을 누림만 하랴.(후31)

  읽다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면도 있어 지루하기도 하다. 시대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인간 삶에 대한 통찰과 수신의 덕목들로 가득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며 생의 목적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데 도움이 될 만하다. 곁에 두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번씩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책이다. 

남의 작은 허물을 꾸짖지 말고 남의 비밀을 드러내지 말며 남의 지난 잘못을 생각지 말라. 이 셋으로써 덕을 기르고 해를 멀리할 수 있다.(전105)

공을 세우고 업을 일으키는 사람은 대개 허심탄회하고 원만하나, 일에 실패하고 기회를 잃는 사람은 반드시 집착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전197)

성질이 조급하고 마음이 거친 사람은 한 가지 일도 이룰 수 없고, 마음이 온화하고 기질이 평안한 사람은 백 가지 복이 절로 모인다.(전209)

남의 나쁜 점을 꾸짖되 너무 엄해서는 안 되니, 그 말을 받아서 감당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전23)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갖춘 이도 있고 못 갖춘 이도 있거늘 어찌 나 홀로 모두 갖추기를 바라겠는가.(전53)

  밑줄 친 내용들이 모두 생활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당연한(?) 내용들이다. 되짚어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물질적인 행복이 아닌 참다운 마음의 평화와 안전을 찾을 수 있겠다.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겠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설과 반어, 대구와 대조, 적절하고 화려한 비유 때문에 어렵고 공허한 도덕적, 실천적 삶의 원리들이 오히려 쉽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장점이다. 무엇보다도 전체를 읽지 않아도 그 뜻과 의미를 새겨가며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가 될 듯 싶다. 내용을 평가해서 무엇하랴. 그저 나름대로의 의미는 얼마든 새겨지는 것이고 밑줄이 늘어갈 수록 세월이 흐른다는 이야기가 될 테지만.

음침하게 말이 없는 선비를 만나거든 아직 속마음을 보이지 말라. 발끈하여 성을 잘 내는 사람이 잘난 체하거든 모름지기 입을 다물라.(전122)

몸가짐은 지나치게 깨끗하지 말 것이니, 모든 더러움과 욕됨을 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할 것이요, 사람과 사귐에는 너무 분명하지 말 것이니 착한 사람과, 몹쓸 사람 또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를 모두 포용해야 한다.(전188)

냉철한 눈으로 사람을 보고, 냉철한 귀로 말을 들으며, 냉철한 뜻으로 느낌을 감당하고, 냉철한 마음으로 이치를 생각하라.(전206)

  풀뿌리를 씹어가며 살 수 없고 공기청정기를 메고 다니며 호흡할 순 없으나 가끔은 머리를 맑고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영혼의 청량 음료가 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200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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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주의자의 꿈 -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
조희봉 지음 / 함께읽는책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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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꾸는 꿈이 있고 나름의 방식대로 책을 읽고 사거나 빌리며 보관하거나 선물한다. 책을 읽는 목적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책을 선택하는 방식이고 책을 구하는 방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실용적 목적의 책읽기를 가장 혐오한다. 나름의 이유와 방법이 있겠지만, 또한 목적없는 책읽기가 어디 있을까마는 가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작주자의 꿈>의 저자 조희봉은 그런면에서 가장 순수하게 책에 접근하고 있는 아마추어 정신을 갖고 있어 아름답다. 오히려 책읽기가 밥벌이 수단과 연결되거나 현학적, 과시적 기타 다양한 불순한(?) 독서와 구별되는 저자의 책에 대한 애정과 독특한 방식들이 눈길을 끈다.

우선 ‘전작주의’는 깊이와 정도가 다를 뿐 누구나 한번쯤 시도해 보는 방법이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면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는 것이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방식은 아니다. 다만 저자처럼 이윤기나 안정효 등 몇 백권에 달하는 번역서와 저작들을 가진 작가일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절판되거나 구하기 헌책방에도 없는 책들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작가에 천착하는 일은 책읽기의 깊이와 넓이를 확충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의 취미이고 열정으로 개인적 만족감에 머무른다. 하나의 방법론으로 나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집착과 소유욕이 되어 책읽기와는 다른 수집에 대한 욕망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몇몇 작가들의 경우 장르와 내용, 종류와 상관없이 구입하는 작가들이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정호승의 경우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었다. 시에 주력하던 정호승은 1993년 그의 시집과 동명 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1~3>을 내놓는다. 주저없이 초판을 사 읽었다가 작가에 대한 실망감으로 낭패를 보았다. 범작이었으나 개인적으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작주의는 위험하고 소모적인 책읽기가 될 수도 있다.

<전작주의자의 꿈>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물론 저자의 결혼 주례 스토리다. 이윤기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1호 제자’로 인정받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부러운 모습이다. 책과 무관한 일을 하며 그만큼 책에 대해 열정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사진으로 자랑하는 그의 책꽂이가 부럽다. 예전부터 상상만으로 꾸몄던 방식을 실행에 옮긴 모습이 장관이다. 널빤지와 벽돌만으로 낭비되는 공간없이 8단으로 쌓아올린 그의 책꽂이는 저자의 책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명 사진이다. 가구점에서 구입한 90cm 책장 5개가 넘쳐 정기구독하던 <현대문학> 7년치는 책장 위로 올라가 벽돌처럼 쌓여 있다. 누구나 넓고 깨끗한 책장과 여유 있는 공간을 원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저자와 같은 방식은 하나의 모범 사례처럼 보인다. 곧 시도해야겠다.

“나는 시간을 무익하지 않게 쓸 수 있을 방법이 있을 때는 절대로 책을 읽지 않습니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은 내게 금과옥조로 여겨진다. 더 즐겁고 행복한 일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먼저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이 책을 읽어 온 역사는 정말 짧다. 달리 생각하면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무식하거나 인생이 불행하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다만 자기만의 독서법과 책에 대한 사랑법을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삶에서 책이 주는 역할과 의미를 되새기고 책을 선택하고 읽고 활용하는 방법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반면교사가 된 책이다.

어떤 식으로든 삶은 살아지고 우리는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여전히 두렵기만 한 백지같은 인생을 채워나갈 무엇인가를 바보처럼 아직도 책에서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먼 후일 내 삶의 자세를 뒤돌아 볼 뿐일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책읽기 과정과 방법론을 점검하고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나름의 방식들을 점검하는 데 요긴한 책이다. <생산적 책읽기 50>처럼 건방지게 책읽기를 가르치거나 항목별로 실용적 책읽기를 강의하는 식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저자가 들려주는 수줍은 책에 대한 짝사랑 이야기로 들린다. 사진으로 보이는 넉넉함만큼 여유를 잃지 않는 열정이 되길 소망해 본다. 그래도 나는 책으로 손이 간다. 손을 잡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는 방법 밖에 또 어쩔 것인가.


200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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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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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하늘 멀리 헬리콥터 한 대가 흰 구름을 배경으로 날아간다. 벌써 가을이 당도해 버린 것인가. 지난 번에 주문한 <서재 결혼 시키기>는 책에 관한 여러 책들 중 하나다. 독서에 관한, 책에 관한 타인의 취향이 궁금할 때 가끔 환자(?)들의 책을 읽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증상과 성향들을 보여 재미있다. 물론 부분적으로 나도 비슷한 증상을 경험했고 그렇게 지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중의 하나는 책읽는 부모를 만나는 일이라고 한다.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양질의 도서를 책장 가득 채워주는 것보다 아이와 함께 조용히 책읽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 분위기가 집안 전체를 가득 메운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앤 패디먼은 바로 그런 집에서 자란 대표적인 경우이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는 과정보다 서재를 합치는 일련의 과정들이 흥미롭게 보인다. 영혼을 합치는 작업을 눈으로 확인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은 저자가 살아온 과정을 책이라는 주제로 묶은 수필집이다. 성장배경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와 연결시켜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불편하고 딱딱한 이야기가 아니라 위트와 유머 넘치는 글솜씨로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웃음을 만들어준다. 권위적이거나 목에 힘주고 설교하거나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로 독자들을 긴장시키지 않는 방법을 저자는 알고 있는 듯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들과 인연을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끔씩 책을 읽는 행 위 자체를 돌아보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여전히 책읽기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사는 나에게 생활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유쾌하고 즐겁게 여겨진다. 결국 살아가는 일들이 모두 자연스럽게 자신이 읽고 쓰는 일로 연결되어 버린 앤 패디먼은 행복해 보인다. 누구나 그렇게 자연스런 행복을 원한다.

  어느집에나 같은 책 두권이 꽂혀 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읽고 선물했던 책과 선물받았던 책들이 가장 많은 경우다. 양이 많지 않아 나란히 꽂아두고 나름의 추억으로 삼는다. 패디먼 일가처럼 교열에 관한 편집증적 증상을 보이지는 않지만 직업병 수준에 가까운 맞춤법과 표준어에 대한 관심은 글쓰기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수많은 오탈자를 담고 있는 일상적인 생활들이 더 정겹다. 엘리베이터에 앞 게시판에 붙혀놓은 반상회 안내문에 아저씨들의 실수가 짜증으로 여겨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언제나 세상을 정확하고 꼼꼼하게만 살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표지의 인용부호가 패디먼의 삶을 요약하는 훌륭한 문장이 된다. 그녀의 전 생이 책으로 가득하다는 말이니 달리 설명이 필요없다. 수많은 책에 관한 책중에 하나임이 틀림없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손색없는 아주 괜찮은 책이다.


200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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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움과 폭력 살림지식총서 29
류성민 지음 / 살림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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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본질적으로 성스럽다기보다는 폭력적이다.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인간은 사회적 질서와 규칙을 잘 지키는 규범적 동물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본능적으로 폭력적 성향이 내재해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갈등과 대립 상황에서 폭력은 가장 쉽고 단순한 문제 해결 방법이었을 것이다. 힘의 논리는 자연에서 벌어지는 가장 단순하고 손쉬운 문제 해결방법으로 여겨진다.

  원시 공동체 사회를 이루면서 인간의 이성은 조금씩 발달하기 시작했다. 근대적 국가가 성립되고 형벌제도가 도입되어 개인의 복수가 국가권력에 의해 대신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기 전까지 폭력은 당연한 개인간의 문제 해결 수단이었다. 이것이 종교제의와 결합되면서 희생제의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의 출발을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에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과정에서 동물을 희생제의로 삼는 것은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의 제목을 뒤집어 <성스러움과 폭력>으로 류성민은 폭력에 대한 논의를 종교의식과 희생제의라는 주제로 풀어내고 있다. 종교행사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들에게 가한 필요 이상의 가학적 폭력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다각도로 진행된 논의를 먼저 보여준다. 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하던 논의는 결국 희생제의가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폭력적 성향을 잠재우는 역할로 희생제의는 제 역할을 다 해냈을까? 희생제의가 폭력을 잠재울 수 있는 사회적 장치로 충분한 역할을 했을까? 여기에 대한 의문과 대답은 여전히 미흡하다. 짧은 분량 속에 여러 가지 논의를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한계로 느껴진다. 아무튼 제한된 분량 속에서 폭력의 의미를 종교적 의미와 결합시키고 ‘희생제의’라는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했기 때문에 성스러움이라는 다소 거리가 먼 개념과 결합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희생제의를 거행하면서 엄청난 폭력이 행사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폭력이 폭력을 예방하고 최소화하기 위한 방책이라는 분석은 폭력을 통한 폭력의 극복이라는 역설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희생제의는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윤리적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39페이지)

  윤리적 덕목의 실천을 통해 폭력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로부터 예수와 신약성서의 저자들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견해였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가 발전시켜온 종교의 기본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폭력 성향과 사회 윤리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논의의 초점이 종교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희생제의에 관한 견해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반박할 만한 견해가 떠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희생제의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죄와 사람을 구분지어 흔히 쓰는 말이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가 그것이다. 이 말 속에는 희생제의가 표방하는 중요한 윤리적 의미가 숨어있다. 죄와 사람을 분리하여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할 희생제의가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래서 예수는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영원’이라는 시간적 개념속에서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희생제의를 통해 억제되고 예방되어 온 폭력은 이제 사법제도를 통해 효과적으로 제어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사족처럼 마지막에 언급한 현실 관점에서 바라본 폭력의 의미에 대한 논의이다. 학교 폭력을 비롯하여, 조폭의 직접적 폭력, 사법제도에 의해 행해지는 사형이라는 공인된 폭력,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부패 척결 과정에서 드러나는 희생양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폭력과 희생 제의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어 아쉽다. 종교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 측면에서 드러나는 폭력에 대한 논의가 깊이 있게 다루어지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학문적 영역을 벗어난 이야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쉬운 논의는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현실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

  자식을 위해, 학생을 체벌을 한다는 것도 정당하지 못하다. 희생제의에서 자신이 자신을 대신하는 동물에게 폭력을 가하듯이 체벌은 스스로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희생양을 만드는 정치 노닐도 비판받아야 한다. 희생제의에서의 희생양은 양을 희생하는 사람들 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곧 자기희생인 것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 대신에 그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폭력의 순환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88페이지)


200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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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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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본몬 4페이지)

  강유원의 <책과 세계>는 이렇게 도발적인 선언으로 시작된다. 상식과 타성에 젖어버린 책에 대한 생각들을 일순간 뒤집어버리는 한 마디가 통렬하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전인류의 40%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이들을 미개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책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읽어도 읽어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 대지와 호흡하고 하늘을 우러르며 두 뺨에 스치는 바람이 일러준대로 살아가는 삶이 더 행복하거나 인간적(?)일 수 있다.

  지식을 위한 방편이라고 하기엔 시대가 너무 달라졌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나무를 베고 종이를 만들어 책을 찍어내는 일이 유효한가?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전들을 들쑤셔본다. 국가론, 갈리아 전기, 우정론, 신국, 신학대전, 군주론, 리바이어던, 백과전서를 거쳐 국부론, 종의 기원까지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킨 고전의 의미를 재해석해보는 것으로 대부분의 내용을 할애하고 있다.

  책이 가지는 매체로의 속성 또한 다양하다. 진흙판에서 죽간, 최근의 e-book에 이르기까지 매체 자체가 가지는 역할과 의미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인간을 중심으로 결국 책은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책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인류가 발전(?)을 거듭하며 문명을 이룩해 오는 과정에서 책의 역할과 의미를 강조하며 그래서 ‘책’은 중요한 것이다는 교훈적 결론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책의 재조명 작업 정도로 불릴 수 있겠다.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평했던 어느 역사의 말을 되새겨본다. 15세기 이후 축적된 인류의 이성과 문화의 발달이 현재의 관점에서도 지속 가능한 일인가? 고전을 통해 자아를 들여다보는 일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이며, 무언가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게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실일 수도 있다고 저자에게 설득 당했다.

  물론 수많은 반론과 각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책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탐색 없이 책읽기에 몰두하거나 아이들에게 책 읽히기에 목매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살펴야 한다는 의미 정도는 읽어낼 수 있다. 아울러 단 한권의 책, 고전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과 의미들을 다시 한번 새겨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닌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 역사와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 현재를 조망해 볼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에는 현재의 고전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넓게 보고 깊이 읽는 안목이 절실히 필요해진다. 얼마나 더 들여다보아야 안개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길이 보일런지......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공포는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요, 탐욕은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즐거움에 의해 생겨난다. (본문 11페이지)

  저자의 말처럼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가지 힘 중에 나는 늘 탐욕을 탐한다. 누구나 그런가? 고통을 즐기고 즐거움을 음미하는 듯한 태도는 가식이다. 고통스러운가? 아니면 즐거운가? 어느 쪽인가? 그것이 직접적으로 몸에 가해지는 일들이라면 더욱 본능에 충실해진다. 책과 무관한 인용일 수 있으나 생각해보면 온몸이 떨리는 즐거움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은 개인마다 다르지 않은가. 오늘도 공포를 통한 고통이 아니라 탐욕을 통해 즐거움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를 포함한 전 인류를 위해 건배할 일이다.


200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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