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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인권
토머스 페인 지음, 박홍규 옮김 / 필맥 / 2004년 12월
평점 :
봉급 생활자의 세금 부담 증가에 대한 예산안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고소득자와 저소득자간의 형평성 문제가 거론되는 것 자체가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세금의 본질적인 문제와 국가 차원의 세수 부족안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확실한 대안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비대해진 공무원 조직과 방만하게 운영되는 공기업, 공룡처럼 거대한 힘으로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버티고 있는한 문제는 절대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현대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쟁점이 아니라 몇 백년간 이어져 온 지루하고 식상한 논의다. 다만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세금을 징수하고 사용하는 방법과 철학이 결여된 위정자들에게 분노한 백성들은 정권이 바뀔때마다 자신의 위치에서 이기적 욕망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며 지금까지 겨우겨우 버텨온 것이다.
국가는 도덕의 힘으로는 세계를 통치할 수 없기에 필요하게 된 하나의 형태다. 여기에 또한 국가의 의도와 목적인 자유와 안전이 있다. - 상식, P. 25
18세기 후반 인류 역사상 기억될 만한 두 가지 사건을 꼽으라면 미국의 독립(1776년)과 프랑스 혁명(1789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페인은 이 두 가지 사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상식>을 썼다. 팜플릿 형태의 글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명쾌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 뚜렷히 드러난다. 프랑스 혁명을 비판했던 버크에 대한 반론으로 쓰여진 <인권>은 1, 2부로 1791년과 1792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출판 당시 수만부가 팔릴만큼 주목을 끌었으며 페인의 조국인 영국에서는 출판이 영구 금지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상식>과 <인권> 두 권의 합본 형태로 박홍규가 다시 번역한 <상식, 인권>은 그의 설명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저작 중의 하나로 평가 받을만 하다. 진보니 개혁이니 현실 정치에서는 되먹지 못한 소리들만 개짖는 소리처럼 처량하게 울려 퍼진다. 이념과 갈등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가장 상식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그들에겐 관심이 없는듯 하다. 아니, 관심이 있어도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결국 그것들을 찾아내고 자신의 권리를 지켜나가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국민들 개개인의 몫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아프게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국가와 사회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가 군주국이었음을 감안할 때 페인의 팜플릿이 가지는 혁명적 발상과 인간에 대한 성찰은 놀랄만한 일이다.
인간의 평등권이라는 찬란하고 거룩한 권리는(그 기원이 인간의 창조주에게 있으므로) 생존한 개개인에게마나 관련된 것이 아니라, 뒤를 잇는 사람들의 세대와도 관련된다. 각 세대는 그 앞서간 세대와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그와 같은 원칙에서 각 개인은 그 동시대인과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 - 인권 1부, P. 134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겨우 마칠 정도의 정규 교육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는 페인의 저작은 그의 사상과 당시 역사와 사회를 관통하는 지적 능력을 통해 볼 때 엄청난 독서와 사색을 통한 반성적 사고를 통해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사고 방식과 국가와 인권의 문제를 이렇게 통쾌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은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현재적 관점에서 개혁과 혁명을 논하고 그 태도를 살펴보는 책은 이제 차고 넘친다. 그러나 페인이 살던 18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물론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루소같은 사상가를 통해 사회계약론과 같은 새로운 사상들이나 지적 성과물이 제시되었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현실 정치의 문제를, 특히 미국과 영국의 비교를 통해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 나타난 정신을 이렇게 정확하고 명확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선언하고 있는 저작은 찾기 힘들 것이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논쟁적 문체가 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의 빛나는 정신을 가릴 수는 없다.
자연권은 인간이 존재하는 데 따르는 권리다. 이런 권리에는 모든 지적 권리와 정신적 권리, 그리고 타인의 자연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개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모두 포함된다. - 인권 1부, P. 138
인권은 자연권이다라는 말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인권이 자연권이었던 시기가 있었을까?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가치나 목적보다도 우선시 되어야할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이 지금도 논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페인의 사상과 주장이 유토피아적 환상과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얼마든지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개혁의 권리는 근본적 성격에서 국민에게 있고, 그 합헌적 방법은 그 목적을 위해 선출된 전국적 집회(공회)에 의해 개혁이 추진돼야 했다. 타락한 기관이 스스로 개혁한다는 생각 자체에 모순이 있었다. - 인권 1부, P. 146
그러므로 언제든 국민들은 정부와 정치를 개혁할 합법적 권리가 있다. 정치개혁은 주체는 그래서 언제든 국민의 몫이지 정치가의 몫이 아니다. 잘잘못을 바로잡고 보다 살기 좋은,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토대는 대다수 국민들의 몫이다. 일부 부유층과 권력이 자기 것인양 착각하는 기득권층의 논리가 아니라 이 땅의 민중들의 목소리가 국가와 정치라는 형태로 실현되는 것이 올바른 사회라는 이야기다.
정치의 세계에서 개혁이 불가능한 부분은 없다.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혁명의 시대의 특징이다. - 인권 1부, P. 217
자유는 지구 어디서나 박해를 받아왔고, 이성은 반역으로 간주되었으며, 공포의 노예가 된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했다. - 인권 2부, P. 230
개혁과 혁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개념의 차이를 떠나 속도와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신체의 자유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들을 짚어내자면 끝이 없다. 부정적 사고가 아니라 건전하고 비판적 사고는 끊임없는 이성의 계발과 차가운 자기 반성의 토대위에서만 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며, 불가능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 인권 2부, P. 247
헌법은 국가의 소산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의 소산이다. 따라서 헌법 없는 국가는 권리 없는 권력에 불과하다. - 인권 2부, P. 269
인간의 위대함은 ‘불가능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데 있다고 믿는다. 고전속에 파묻힌 케케묵은 망령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는 이 뼈아픈 진리와 선언들을 되새겨 둘 만하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유를 바라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단순히 달콤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 존재하는 금언으로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불행과의 접촉이 연민의 본질이다. 이 주제를 거론하면서 나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어떤 결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승패를 초월한 고결한 긍지로써 나는 인권을 옹호한다. - 인권 2부, P. 313
시대를 앞서간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에 대한 평가는 각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오늘 다시 만날 수 있는 토마스 페인의 <상식, 인권>은 잡다한 논의를 뒤로 한 채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국가와 정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역작이다. 나와 국가, 나와 정치와의 관계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 옮긴이 박홍규는 페인을 ‘세계의 자유주의자’라고 평가한다. 그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그의 사상과 삶은 숭고하다.
“자유가 없는 곳에 내 조국이 있다”는 유명한 페인의 말은 “자유가 있는 곳에 내 조국이 있다”는 프랭클린의 말에 대한 대답이었나, 바로 그 말이 단순한 미국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세계의 자유주의자인 페인의 삶과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옮긴이 해설, P. 387
2005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