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 하버드 중국사
디터 쿤 지음, 육정임 옮김 / 너머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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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나라는 10세기 전후까지의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문화적 꽃을 피운 시기이다. 그리고 가장 상업이 발달한 시기였으며 가장 개혁이 많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신진관료의 출현에 따른 개혁적이고 참신하고 능력있는 관리들이 합리적이고도 깊이있는 정책을 통해 송나라를 이끌었던 시기이고 황제는 그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효율적인 인재등용책을 통해 그 지배를 공고히 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고 또 가장 학문적 사상적 기술적 상업적 발전과 번영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송나라의 번영의 원인을 우선은 문치주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송태조는 자신의 개국을 도왔던 무인세력들에게 신뢰를 주면서 무장해제를 시킨 후 정신적이고 학문적으로 깊이 있는 문인들을 등용했고 그들의 정신적 수준으로 송나라를 통치하게 되고 이는 불문율이 되어 후대의 황제들에게 되물림되는 문화적 전통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황제이든 간에 당대의 가장 훌륭한 문인들을 등용하려는 노력을 보였으며 그것이 송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것으로 안다.

 

  그 밖에도 송나라는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발달하여 상품화폐관계가 정착화되었다. 개봉을 중심으로 꽃피웠던 상업과 화폐제도는 송나라를 세계 인구의 절반이 사는 곳이며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소득이 높고 문화적 번성을 구가했던 사회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북방 민족들이 아무리 괴롭히고 지배하고 억압해도 송나라가 가진 우월적이고 매력적인 문화에서만은 동화되고 만 점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송나라는 북방의 민족에 대해 무력과 전쟁으로 상대하지 않고 비록 굴욕적이고 때에 따라서는 비참하리만큼 몸을 낮추어서 실리를 얻고 평화를 추구했다. 그들에게 조공으로 바치는 물량이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송의 경제적 능력으로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되었다는 점과 문치주의에 근거한 성숙한 시대판단과 형세판단으로 더욱 오래 평화적으로 왕조가 존속하는 방법을 찾았다는 점은 역사에서도 많은 교훈을 남겨 준다.  그래서 송대에는 그 평화와 번영의 바탕 위에 시와 사, 문학과 예술이 꽃피는 시기가 되었다. 한유, 구양수, 소식, 육유, 정이 정호 형제 등의 사상가와 문학가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펼쳤는가 하면 왕안석, 주자 등의 개혁적이고도 학문적인 사상의 통일을 이루어서 송대는 그 후 천년의 역사를 써내려갈 사상적 기초를 마련한 시기라고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살다간 많은 사람들, 때로는 역사적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다운 평범한 삶을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을 지도 모를 그 많은 지배와 전쟁의 역사 속에 세상의 중심으로서 가장 큰 나라였던 송나라의 평화롭고도 행복했던 한 시대의 꿈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매력적인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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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EBS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제작팀 지음 / 해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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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이는 아프다. 아니, 이 시대의 젊은이는 아프다. 혼자서 점심을 먹고 시간을 쪼개어가며 즐겁지도 않은 공부를 하고 스펙쌓기를 하고 또 직업을 찾아 헤맨다. 초등학교때부터 공부 공부 하는 강요와 내 인생을 위해선 공부 밖에 없다는 암묵적 동의로 입시교육환경 속으로 빠져들면서부터 특목고 대학 취업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야 한다. 그 통로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지나가고 또 그 길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한다.

 

  그런데 대학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서울대학에 오면 인생의 고민이 끝이 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지방대학에서도 자기만 열심히 해서 실력을 갖추면 그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다. 외국의 유명대학에 나오고 스펙을 많이 쌓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이런 저런 학벌과 스펙도 없는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다. 대학이 어느 때부터인가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행복하게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진로를 결정하고 직업을 선택하는 공간이 아니라 어찌됐든 좋은(??) 직업을 선택해서 잘먹고잘살아야 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정작 대학입시를 보며 달려온 학창시절 모두가 부정되면서 생기는 깊은 절망감을 극복하기가 너무 힘들다. 세상이 원한다고 해서 그 길을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제 그 세상이 외면한다. 그러니 인생이 위축되고 대학생활이 힘들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것일까?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는 무엇일까? 기업이라는 조직에 분명 비용보다 효율이 큰 사람이겠지. 그게 기업의 이윤논리이니 그 사람의 연봉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기업에 이득을 안겨다줄 사람일 것이다. 그 인재라는 것은 현 시대에 과연 무엇일까?

 

  최근에 오면서 기업에서도 창의성과 열정, 인성과 긍정성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덕목이란 것이 대부분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와 자아존중감과 긍정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런 덕목은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에 대한 이해와 기준이 있을 때에 비로소 만들어진다. 그런데 우리들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서 한 번의 실패에 가로막혀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청춘들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안타깝고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자신에 대한 긍정성과 희망과 실패로부터 배워서 더욱 나아가려고 하는 의지와 삶 전체에 대한 신뢰와 긍정이 바로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인성이라면 그것을 배우는 학교교육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된다.

 

  멘토들을 통해서 다섯 대학생들이 자신감을 가져가는 과정을 보게 되었다. 누구나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기질은 장점과 단점이 있다. 때로는 장점이 단점이고 단점이 장점이다. 어느 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기질과 자신으로부터 배우려는 의지와 열정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재의 기준이 된다. 인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과 자신에 대한 신뢰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용기를 잃지 않는 자가 결국은 세상의 기준으로도 인재가 된다.

 

  스티브잡스, 빌게이츠, KFC 창업자 커넬 샌더스, 광고천재 이재석 등을 보라.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하고도 절망하지 않고 그 실패에서 배워 더욱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시켰는지....우리들은 아니 우리 사회는 너무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실패의 미덕을 인정하지 않고 실패의 교훈을 되새기지 않아 그 실패 한 번에 쓰러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세상의 장애물을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거기에 기꺽이지 않고 자신을 끊임없는 긍정과 꿈의 희망으로 가져가는 것이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인재가 된다. 그럴려면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나아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대학에서의 배움과 가르침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과연 우리들의 배움터는 문제가 없는가? 우리 교육이 문제라면 그 대안적 교실을 또는 대안적 배움을 실현하는 모델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소개하면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스라엘의 하브루타 교육법, 조벽 교수님의 교수법, 샌델 교수님의 교수법 등 틀에 박힌 수업을 탈피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교수님들의 수업을 소개하면서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더 나아가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왜 대학에 가야 하는가? 의 물음은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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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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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8년 18세의 소년이 독재정치를 향해 쏘아올린 화살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고등학교 2, 3학년의 나이에 정치권력의 부당성과 정의를 고민했고 그 대안에 대해 글로 적어놓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33살의 나이로 전염병으로 세상을 버렸다. 하지만 그의 짧은 생은 그 누구보다도 더 위대했으며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세월호 사건, 사자방 국회청문회, 대한항공 땅콩 회귀 사건 등등 무수한 사건들이 우리들을 관통해 지나가지만 권력의 지배 속에 자발적 복종을 멈추고 자유를 누리려는 진정한 시민들은 소수다. 세상이 이러한 것은 이 세상에 우리들의 마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우리들의 시선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들이 그들이 가진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기만 하면 스스로의 자양분을 잃고 자멸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권력의 횡포 속에 우리 사회는 고통스러워 한다.

  그런데 개개인이 기존 권력에 맞서 싸우면 거대하고도 산같은 절대권력과 맞부딪치게 되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권력의 횡포에 익숙해지고 또 적응하게 된다. 그러나 습관처럼 되물림되는 '자발적 복종'에서 벗어나는 길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에티엔 드 라 보에시

그는 1554년 보르도의회 고등재판관으로 근무했고 이 글을 포함해 29편의 시와 여러 글들을 친구인 몽테뉴에게 맡긴다. 몽테뉴는 그의 사후 대부분의 그의 글을 출판하였지만 당시의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서 이 책만은 출판하지 못했다. 당시의 왕정질서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1574년 세상의 빛을 보았고 프랑스 대혁명과 아나키즘 운동에 사상적 영향을 주게 된다.

  참 통렬한 통찰이다. '자발적 복종'

그렇지 아니한가? 이 사회의 주류 자본 문화며 정치권력이며 그 모든 종류의 권력은 자발적 복종에 기인한다. 우리들 마음 속에 그들에게 에너지를 제공해주지 않는 한 적어도 내 삶 속에서만은 그것이 더 이상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권력의 부당성을 말할 수 있게 되고 비판을 할 수 있게 되고 자본의 부정적인 면에 삶이 휘둘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자발적 복종을 떨쳐버리기만 하면 된다. 참 쉽지 않은가?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계급사회의 등장과 더불어 세습되고 습관화된 복종을 떨쳐버릴 자 누구인가? 돈으로부터 상품화폐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 누구이며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소신으로 행동하고 살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자신의 생활에서 매 순간 깨어 습관화된 시선을 탈피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며 그 의미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치열한 자기고민과 시대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이 없이 어찌 철저하게 자신의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절대권력의 가까운 시녀가 되어 사는 일이나 절대권력의 지배 하에 작은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소시민적 삶이나 복종의 삶은 같은 것이지 않은가?

  진정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세상의 힘으로 불어오는 국가권력과 그 부정의에 맞서 자신의 삶을 온통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내가 자발적 복종의 영역 밖에 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러하니 '자발적 복종'은 인류의 역사를 관통해 흐르는 역사의 물결 속에 휩쓸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무겁지만 않을 수도 있다. 나 자신의 삶으로 돌아와 물질적인 삶보다 정신적인 삶을 중요시하고 상품화폐적 인간관계보다 정과 나눔의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자발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삶을 조용히 실천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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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0년, 돈의 배반이 시작된다 - 부자 아빠가 되는 마지막 기회
로버트 기요사키 지음, 고영태 옮김 / 흐름출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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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둘러보면 선진국 대부분의 국가는 국가채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미국, 남미, 멕시코, 일본, 한국, 유럽에서 그리스는 이미 경제적으로 파산하였고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국가부채의 증가는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정치는 국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는 민주주의적 방식을 유지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돈을 찍어내고 사업을 지원하고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국가 및 지자체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고 이는 어느 순간 급속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올 것이고 우리들이 준비하는 퇴직연금은 코를 풀고 난 휴지조작의 신세로 전락하게 될런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한국 사회를 둘러보아도 이는 정확이 일치한다. 우선 인구의 감소부분을 보면 한국의 출생률은 세계적으로 최저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이것이 결혼적령기 시기로 반영되는 주택수요는 급감하게 될 것이고 주택가격은 하락할 것이다. 부동산 경기의 거품이 꺼질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된다.

  두번째는 자산가치의 하락이다. 한국도 2015년 3월 드디어 기준금리가 1%대로 하락했다. 이는 정기예금만으로 더 이상 부를 축적하기는 커녕 유지하기조차 힘든 상황이 펼쳐진다는 말이다. 개인 부채는 부동산 담보대출의 증가로 급격히 늘어났다. 부동산 거래는 거의 없어졌고 전세값만 오르고 있다.

  세번째는 일자리 감소와 청년 실업의 문제다. 이는 다시 가계소득의 감소와 경기 침체로 이어질 것이고 연금재정이 부실해지고 연금개혁압박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다시 공무원이나 교사들은 노후 연금소득의 감소로 인해 금융위기에 노출될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대처요령은 이렇다.

 

첫째, 금융교육에 투자하고 현금흐름을 지배하라. 금융교육은 평생교육이어야 하고 현금흐름 4분면에서 기업가와 투자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 세금의 규칙은 불공정하고 현금흐름의 사분면을 알면 세금을 덜내게 되고 그것이 이자율이 낮은 앞으로의 시대에 최고의 투자방법이 된다.

셋째, 부채를 활용하라. 은행에 부채가 없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다. 저축을 잘 하는 것 역시 자랑이 아니다. 이자율이 낮으면 저축은 고스란히 가치의 하락을 수반한다. 진정한 투자자는 부채를 활용하여 그 부채에 대한 이자지급보다 부채로 인한 현금흐름을 지배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넷째, 투자는 위험을 관리하는 것이다. 현금흐름 4분면의 투자로 위험을 분산하고 보험에 가입한다.

다섯째, 돈을 위해 일하지 마라. 돈이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어라. 자산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만나면 휴지조각에 불과하게 된다. 자산의 흐름이 현금흐름을 지속하게 만들어내야 하는 투자방식을 활용해야 한다. 이 모든 동기의 배후는 남에게 많이 배풀고 남에게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야하는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 각 국 마다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기업에 대한 세금감면 및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자리라는 게 외국의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나 선진국의 임금상승으로 인해 사업장을 임금이 싼 지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물론 투자의 확장으로 인한 사업장 확대도 있지만 글로벌 기업에서 이와 같은 경우는 흔치 않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과 현금흐름의 4분면에 대한 입체적 금융교육과 활용이 그의 답이다.

 

  그는 경제학자나 대학에 갇힌 학문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평생 자신의 금융교육에 투자한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현재 다양하고 입체적인 투자의 경험으로 부자아빠를 실현한 사람이다. 그의 현실 경제에 대한 분석과 설명이 세계 각국에서 중산층의 몰락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시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의 다음 저서 '부자들의 음모'로 넘어가면서 나대로의 미래대비와 노후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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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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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분의 솔직함을 믿는다. 아니 정치인으로서는 서툴렀지만 그의 양심과 지성을 믿는다. 이미 학자로서 나는 오래 전에 그의 복지정책에 관한 저서를 읽었으며 경제학카페를 통해 우리 사회에 건강한 경제학자로서의 경제적 비전을 제시하던 한 시선과 만났다. 또한 가슴 속의 정의로움이 사회에서도 통용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한 인생과도 만났다. 나와는 띠동갑이다. 내가 열 두 살 어린 한 갑자 인생후배가 된다. 그처럼 뛰어나지도 못하고 그처럼 사회적 능력이 없고 그처럼 세상을 자신의 시각으로 보아내지 못해도 그의 글을 따라가면서 많은 공감과 시선의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따뜻함과 정의로움에 대한 갈망 그리고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반항심이 비슷해서일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은 그의 개인사에 가까울수도 있고 주관으로서 풀어쓴 한국현대사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그리고 한 정치인으로서 시대의 중심부를 살아간 한 사람으로서 바라본 한국현대사에 대한 몸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베이비붐세대에 태어나 군사독재정부시대에 학창시절과 성장기를 보내고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정의를 위해 시대의 호흡을 함께하려했던 대학시절과 우리 현대사의 내가 투표한 그리고 유이하게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시기에 대한민국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간 한 솔직한 인간의 고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가 시대의 한 가운데를 바라보고 회피하지 않았고 또 그 속에서 온몸으로 살아갔기에 그의 개인사는 한국현대사로서도 손색없는 글이 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선 서문을 읽으면서 현대사의 굴곡을 거쳐가면서도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우리사회의 민주주의가 성장하고 경제적 성장을 통해 시대가 진보해가고 있다는 '자부심'이란 말로 희망의 미래를 보여준다. 한 시대 속에 갇힌 인간이 볼 수 없는 학자적 근기와 넓은 시각이 내겐 시원한 설명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사를 설명하는 어떤 통사나 역사보다도 더 시원한 통찰을 하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 내부에 아직 남아있는 질병적인 사고나 고정관념과 질곡들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설명해낸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대한 설명 또한 공감이 많이 간다. 성장의 시대를 질주해온 우리들의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존재보상을 받기 위한 마지막 정치적 무대가 바로 이번 대선이었다는 설명도 또한 명쾌하다.

 

  20세기는 대한민국(아니 한국이라는 말이 더 좋다.)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제에 대한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잘 살아보자는 목표를 향해 달려온 세월이었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묻혀버린 시간들이었다. 인권과 자아실현과 고차원적 욕망은 잠시 유보해두고 우선 인간적인 삶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온 역사였고 이를 정치가 이용했건 시대가 그런 정치를 요구했건 그 시대적 특징은 그렇게 볼 수 있겠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의 물질적 삶이 충족되면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요구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한국처럼 급속하게 성장을 이룩한 사회만이 갖는 고통스럽고도 무거운 변화를 가져왔다. 성장이 빠를수록 그 노화의 속도도 빨라지고 있고 사회의 성장동력도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이것이 우선 앞으로 우리 사회게 해결해야할 숙제가 되고 있다.

 

  한국사회가 생존경쟁의 정글에서 병영으로 그리고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변해온 데에는 그 속에서 자각된 주체의 활동과 희생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미래사회의 주인인 지금의 젊은 세대들 또한 물질적 풍요로움을 기반으로 자라 부족함이 없고 기성세대에 비해 물질적 욕구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도 과거의 유산 위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들이 창의성과 주체성으로 자각있는 역사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사회의 미래는 밝은 것이다. 물론 그들 앞에도 두 가지의 길이 놓여져 있다. 시대는 달라도 시대적 소명과 공기는 달라도 그들 역시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로서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다스리고 보다 인류보편적 가치에 눈을 떠서 광장을 무대로 민주주의의 주체로 등장할 것인지의 고민이 가로놓여있다고 보면 된다. 결국엔 그 역사적 자각과 세상을 위한 마음이야말로 기성세대에 발잡히지 않고 미래사회의 무대로 나아갈 수 있는 엔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북관계도 저자가 제시한 매슬로우의 욕구위계단계에서 생존의 욕구차원의 대응관계에서 벗어나 자아실현의 관계로까지 서로 발전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바람직한 통일의 새역사를 열어갈 수 있는 것이며 한국의 미래가 그 때에야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열쇠가 바로 지금 우리가 품은 의지며 마음인 것이다. 우리의 미래세대는 우리보다 더 뛰어나고 창조적인 에너지로 그 세계를 열어가야 하겠지만 기성세대와 미래세대가 그 소통과 열림 속에 가치와 비전을 이어받고 공감하여 더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선배세대의 피와 희생 속에 물려받은 유산을 더 멋지게 가꾸어 그들의 미래세대에게 전달해 주어야 할 사명감을 갖는다면 그것이 저자가 바라는 미래는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모처럼 한국현대사를 시원하게 그리고 희망의 마음으로 읽었다. 보수와 진보라는 통념을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남북관계나 민주주의의 발전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려한 그의 학자적 양심에도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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