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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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8년 18세의 소년이 독재정치를 향해 쏘아올린 화살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고등학교 2, 3학년의 나이에 정치권력의 부당성과 정의를 고민했고 그 대안에 대해 글로 적어놓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33살의 나이로 전염병으로 세상을 버렸다. 하지만 그의 짧은 생은 그 누구보다도 더 위대했으며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세월호 사건, 사자방 국회청문회, 대한항공 땅콩 회귀 사건 등등 무수한 사건들이 우리들을 관통해 지나가지만 권력의 지배 속에 자발적 복종을 멈추고 자유를 누리려는 진정한 시민들은 소수다. 세상이 이러한 것은 이 세상에 우리들의 마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우리들의 시선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들이 그들이 가진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기만 하면 스스로의 자양분을 잃고 자멸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권력의 횡포 속에 우리 사회는 고통스러워 한다.

  그런데 개개인이 기존 권력에 맞서 싸우면 거대하고도 산같은 절대권력과 맞부딪치게 되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권력의 횡포에 익숙해지고 또 적응하게 된다. 그러나 습관처럼 되물림되는 '자발적 복종'에서 벗어나는 길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에티엔 드 라 보에시

그는 1554년 보르도의회 고등재판관으로 근무했고 이 글을 포함해 29편의 시와 여러 글들을 친구인 몽테뉴에게 맡긴다. 몽테뉴는 그의 사후 대부분의 그의 글을 출판하였지만 당시의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서 이 책만은 출판하지 못했다. 당시의 왕정질서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1574년 세상의 빛을 보았고 프랑스 대혁명과 아나키즘 운동에 사상적 영향을 주게 된다.

  참 통렬한 통찰이다. '자발적 복종'

그렇지 아니한가? 이 사회의 주류 자본 문화며 정치권력이며 그 모든 종류의 권력은 자발적 복종에 기인한다. 우리들 마음 속에 그들에게 에너지를 제공해주지 않는 한 적어도 내 삶 속에서만은 그것이 더 이상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권력의 부당성을 말할 수 있게 되고 비판을 할 수 있게 되고 자본의 부정적인 면에 삶이 휘둘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자발적 복종을 떨쳐버리기만 하면 된다. 참 쉽지 않은가?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계급사회의 등장과 더불어 세습되고 습관화된 복종을 떨쳐버릴 자 누구인가? 돈으로부터 상품화폐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 누구이며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소신으로 행동하고 살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자신의 생활에서 매 순간 깨어 습관화된 시선을 탈피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며 그 의미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치열한 자기고민과 시대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이 없이 어찌 철저하게 자신의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절대권력의 가까운 시녀가 되어 사는 일이나 절대권력의 지배 하에 작은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소시민적 삶이나 복종의 삶은 같은 것이지 않은가?

  진정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세상의 힘으로 불어오는 국가권력과 그 부정의에 맞서 자신의 삶을 온통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내가 자발적 복종의 영역 밖에 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러하니 '자발적 복종'은 인류의 역사를 관통해 흐르는 역사의 물결 속에 휩쓸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무겁지만 않을 수도 있다. 나 자신의 삶으로 돌아와 물질적인 삶보다 정신적인 삶을 중요시하고 상품화폐적 인간관계보다 정과 나눔의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자발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삶을 조용히 실천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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