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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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직업적인 화학자이다. 그의 글은 화려하고 기교적인 문체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이 감동적인 이유는 그의 진솔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미 내 머릿속에 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저 밖으로 나오게 해서 종이 위에 쓰기만 하면 되었다."라고 그가 말했듯이 이미 삶의 강렬한 체험으로서 그에게 남겨져있던 과거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깊었던 절망과 잔인함의 기억들이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글 위로 옮겨진 생명체였던 것이다. 그러니 밥벌이의 지겨움으로써 쓰여진 글처럼 뇌에서 집어짜내듯 써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그저 그 쏟아져나오는 이야기들을 병두껑을 열어서 내보내는 것만이 살아남은 그의 육체가 할 일이었던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제목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다.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하는 그의 물음 속에서 나는 인간존재의 깊은 바탕에서 올라오는 희망의 메세지를 읽는다. 보통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잊을 수 없는 고통과 깊은 절망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의 타락을 그려낸다. 물론 이 책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극한 상황을 아주 담담히 그려낸다. 마치 자신의 영혼이 빠져나와서 자신의 몸의 경험을 관조하는 듯한 자세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무감각이 아니라 그 삶의 악조건 속에서도 사람들이 밟아가는 마음의 타락에 저항하면서 휴머니즘을 지켜갔던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겪으며 내뱉었던 극한의 절망의 말들, 하지만 절망이지만은 않은 말들을 들어보자.

"오,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대등하게 바람과 맞설 수 있다면...영혼이 없는 텅빈 벌레로 사는 이 곳에서는 그럴 수 없다."

"오늘은 무지개 빛의 가벼운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변함없는 물웅덩이 위로 맑은 하늘이 비친다."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다. 수용소는 뚜렷하고도 거대한 생물하적, 사회학적 실험실이다."

"궁핍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 뿐."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한시도 쉴 수 없다. 모두 절망적일 정도로 잔인할 정도로 혼자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 단 하나의 드넓은 길이라면 구원의 길은 이와는 반대로 수없이 많고 험하고 가파르며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다."

  수용소는 특수하게 환경지워진 하나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또한 삶이 있고 삶의 희노애락이 존재하는 지금 이 곳과도 같은 인생이 펼쳐진다. 육체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사는 엘리아스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함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그 결함들 덕분에 살아간다는 그의 지적은 옳다.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권력을 향한 투쟁은 치열하고 그 수용소 내에서도 인간적인 따스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을 꼭 닫아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앞에 한 인간으로서 존재한 게 아니라, 그의 손에 좌우되는 도구였던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운 의심이 든다." 우리 사는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무것도 의심을 하지 않고 또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삶이 일상화되어버린 곳. 외부의 고통이나 타인의 죽음을 그저 아무 생각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자기보호기제가 작동하는 그 곳에서는 "어느날 내일이라고 말하는게 아무 의미를 갖지 않을 때까지"라는 모토가 삶이 되게 살아야 한다. 그런 환경에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무감각해지는 마음의 타락이 보편적인 공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의 생존을 위한 보호막을 작동시키되 권력구조에 의해 마음마저 타락시키지는 않는다. 그곳에서도 삶의 의미를 묻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생존을 나눈다. 나치의 패배가 확실시되고 수용소의 구조가 파괴되는 시간동안 그는 병든 자들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킨다. 공동의 생존을 위해 협동하고 공동노동하고 노인과 병자를 보살핀다.

  그가 말하듯 순전히 운으로 살아남아서 이 글을 쓰게 되기까지 그의 아우슈비츠 경험은 그의 인생을 더욱 폭넓고 깊게 만들어주었다고 말한다. 물론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죄스러움을 간직한 채 말이다. 나아가 그는 전체주의가 20세기에 아우슈비츠와 같은 비극을 만든 데에는 유대인의 역사적 행위에서도 그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 눈여겨보인다. 자신이 역사적으로 탄압받았다는 이유로 전세계에 흩어져서도 자신들의 유대감을 지나치게 강화하고 타 민족들의 눈에 띄게 단결하여 선을 그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아마 이러한 극단적 시오니즘이 선량한 유대인마저도 배반한 또 다른 전체주의는 아니었을까?) 결국 전체주의는 '우리'와 '타인'의 구별에서 시작된다. 독일의 나찌가 개인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로서 게르만족과 유대족의 구별을 지은 것처럼...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자신의 삶의 성숙으로 받아들인 그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태를 보고 눈을 감고 있지 않는다.

"우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가지, 즉 도덕적인 것과 정치적인 면에서 베긴에 반대할 수 있다. 먼저 도덕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해도 베긴과 그의 동료들이 보여주었던 잔인한 오만함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정치적인 주장도 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지금 완전한 고립의 상태 속으로 추락하고 있다..... 우리는 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현재 이스라엘 지도부의 실수에 판결을 내리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감정적인 연대감을 억눌러야 한다."

  그의 말대로 전체주의는 얼굴을 바꿔서 우리 사회의 곳곳에 그 모습을 숨기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우리와 타인의 구별을 조장하는 어떤 작은 선동조차도 그것의 얼굴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역사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그 전체주의의 흐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의식없이 동조하게 되거나 침묵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전체주의의 반대입장에 선다는 선언적인 말로서 그 책임을 다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전체주의는 아주 교묘하고 세련되게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며 정치인의 모습으로 상류층의 모습으로 아니면 노동조합의 모습으로 심지어는 소외받는 자의 모습을 하고서 우리 앞에 나타날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나아가서 나의 마음 속에 불현듯 나와 타인을 구별짓고 우리와 그들을 나누어서 타인과 그들에 대한 적대감이 싹틀 때에 우리는 이놈의 전체주의가 시공간을 넘어서 우리의 마음을 선동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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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2-07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읽으셨군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람의 한계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하세요.

프레이야 2007-02-07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써 외면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으로 공범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됩니다. 그 시대 독일인들이 갖고 있었던 생각들을 읽고 섬칫 했습니다. 부록에...

파란여우 2007-02-07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경식씨의 단골 손님인 프리모 레비.
시를 쓰는 일 하나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걸어 나온 이 사람의 자살은
목구멍을 울컥 적십니다.
몸에 문신으로 새긴 수인번호 174517의 삶은 우리가 지닌 민족주의의 허상이 남긴
공동의 상처입니다. 상처에 더께가 앉아있다고 잊혀지는 건 아니라고 봐요. 우리의 전체주의를 지적하셨는데 배트남전에서 우리가 자행한 죄질을 아직 용서를 빌지 않고 있지요. 이주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고. 개인의 전체주의 신념이 막강한 권력을 얻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다 봐서 알고 있으면서 오늘 날 반복하고 있는 인간. 스스로 인간임에 간혹 살갗이 부르르 떨려요.

달팽이 2007-02-0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그러게요. 인간에게 실망하다가도 왠지모를 희망도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니까요.
혜경님/동감입니다. 내가 그 속에 놓였을 때 과연 내 양심을 속이지 않고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우님/시원하게 설명해주시네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민족주의. 그것도 전체주의의 변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의 선량한 마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도 늘 있었음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