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알고 있던 한 여자가 이 책을 읽은 이야기를 해왔다. 그녀의 삶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 삶을 수용하는 태도는 어떤지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최근의 삶속에 이 책이 주는 메세지가 있든지 아니면 이 책을 빌어 마음 속에 억눌렸던 무엇인가를 대리충족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무엇이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이 책이 궁금해졌다.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아니면 그녀의 삶에서 결핍된 어떤 욕구를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차갑게 느껴질 정도의 파란색 커버 위에 적혀 있는 '단순한 열정'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그토록 자신의 욕망과 열정에 모든 것을 바쳤던 한 여자가 그 사랑의 감정이 지난 후에 그토록 냉정하고 감정을 배제한 채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적어 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듯한 표현 속에 어쩌면 그토록 광기에 가까운 열정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는지도 역시 놀랍다. 사랑은 기억을 붙들고 자라며 그 기억은 또 다른 집착과 욕망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으로서 받아들일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난생 처음으로 상대방을 위해서 모든 일과가 맞추어진 듯 돌아가는 시간을 응시하게 된다. 모든 것들의 의미는 상대방을 통해서 보이게 된다. 그저 의미없이 지나가는 사람 하나의 모습에도 그의 모습이 투영되고 구름끼어 시커멓게 된 하늘에서도 그를 생각한다. 라면에는 계란을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그로부터 비롯되고 저녁 식사는 어떤 것으로 할것인지도 부재한 그를 통해 드러난다.
연하의 유부남과의 사랑에서 그녀는 사랑의 덧칠된 색깔마저도 감당해야 한다. 때로는 그와 그의 처와의 잠자리가 떠오르는 불편도 물리쳐야 하고 길거리에서 그의 가족과 만나는 것을 피해야 하는 압박에 사로잡힌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 사랑이 부여하는 집착과 금기는 의외로 많다. 때로는 이러한 이유로 시작되지 못한 사랑을 접기도 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미 자신을 모두 휘어잡은 그 지랄같은 사랑 앞에 속수무책 당할 뿐이다. 때로는 그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사랑이 또 다른 욕망을 낳고 그 욕망 속에서 더욱 큰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지루한 일상에 싫증이 났던 것일까? 인생을 살기 위한 또 다른 에너지를 갈망한 것일까? '단순한 열정'이란 이름은 의미없는 잡다한 일상에서 강렬하면서도 단 하나의 의미를 통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마음을 불러들인다. 우리는 늘 일탈을 꿈꾸는 또 하나의 자아를 갖고 있다. 주어진 직장과 가족에 안주하며 느끼는 안정감의 뒷면에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욕망은 자꾸만 기형적이고 왜곡된 형태의 일탈을 꿈꾼다.
때로는 그 욕망 속에 몸을 던지고 싶은 유혹도 느낄 때가 있다. 기혼자에게도 삶의 로맨스는 필요하다는 궁색한 변명이 아니다. 어떤 사랑이든지 그 사랑이 한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앉게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이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틀 때문에, 배우자에 대한 의무감과 사랑 때문에, 그 바탕 위에 놓여진 많은 사회적 관계 때문에 이미 많은 삶의 감정들을 미리 접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성숙해지고 싶다. 지금은 사람을 남,녀라는 구분없이 그 사람의 매력을 느끼고 좋아하고 만나고 싶다. 그리고 주어진 사회관계와 인연 속에서 만남을 다하고 미련없이 그들을 보내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나스스로가 만든 마음의 경계선 앞에 서서 주저하며 그 사람들을 다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저 좋은 만남과 배움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옭아매고 있는 관계의 사슬이 나를 붙들고 있을 때가 많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 관계의 사슬이 한 사람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과 배움의 기회를 자유롭게 주면서 동시에 사람사이의 신뢰와 사랑을 키워갈 수 있을때 삶이 더욱 아름답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낙이불음, 애이불상. 즐기되 음란하지 않으며 슬프되 몸을 상하지 않을 경지가 필요하다. 사랑이 나에게 와서 지나가는 그 차가운 뒷면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이 나에게 어떤 상처도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나는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