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돌아가셨다,

이 말에는 그러니까 원래 계시던 곳으로 가셨다는 뜻이 함축된다. 원래 계시던 곳, 그곳이 편안하고 환한 천국이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란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는 한때 어린이책을 만들었다. 아마도 조만간 나는 내 자리를 찾아 돌아갈 것이다. 나는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고양이고, 어린이들도 대체로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내가 어린이"책"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고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하였다. 나이가 들면 뚱뚱한(반드시 뚱뚱한!) 할머니가 되어 어린이들이 들락거리는 집에서 평화롭게 죽고 싶다. 이것이 나의 유일하게 변치 않는 소망이다.

어린이책의 작가이거나 편집자이거나 화가이거나 할 것 없이, 대부분의 나 비슷한 사람들은 계기를 갖는다. 나의 동거녀는 권정생 선생님의 단편 '하느님의 눈물'을 읽고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고, 그래서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어린이들이 좋아서 이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한 모임에 갔고, 거기서 지금의 동거녀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도움으로 어린이책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네꼬가 되었다.

하찮은 우연의 반복일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중심에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가 있었다.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에는 화려한 복선도 없고, 굉장한 표현도 없고, 그럴듯한 주장도 없다. 토끼에게, 강아지에게, 너구리에게 어린이의 심성을 심는 권선생님의 동화는 얼마나 촌스러운지 모른다. 기교가 없다. 그런데 사람을 울린다. 그것은 선생님의 동화에 진심이 있기 때문이다. 버려진 강아지똥이 민들레의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된다는 얘기는 자칫 신파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게 그냥 신파가 아닌 것은, 버려진 것이 거름이 되어 생명을 일구게 마련이라는 진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얼마나 많은 편집자와 동화작가와 화가들에게 권정생 선생님이 계기를 주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당사자들도 거기에 스민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권정생 선생님의 촌스러운 동화에 감동을 받고, 바로 그렇게 작가가 된 이들의 작품에 감동을 받고, 그것을 자양분 삼아 좋은 어른으로 자라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당사자들도 거기에 스민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다.

선생님의 동화는 스스로 강아지똥이 되어 이땅에 민들레를 피울 것이고, 민들레는 어디에 자리잡을지 모르는 꽃씨들을 하염없이 하늘로 날려 보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권정생 선생님이, 한평생을 가난하게 살며 "간신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하신 권정생 선생님이, 인세를 고스란히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에게 보내신 권정생 선생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다.

또야 너구리가, 우리 옆집에 오신 하느님이, 몽실 언니가, 비나리 달이가, 우리에게 말한다. 세상이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를. 어린이들에게 좋은 동화를 읽히면 된다. 이 간단한 일을 두고 세상은 참 돌아서 간다.

어떤 아동문학 연구자는 유학 전에 찾아뵌 선생님께서 주신 학자금 10만원으로 백과사전을 샀다고 했다. 그걸 기반으로 지금껏 먹고사는데, 선생님이 가시니 마음 둘 곳이 없다 하였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생각으로 죽음에 냉담했던 나는, 오래오래 내 목에 머무는 아픔을 생각한다. 이것은 슬픔이 아니다. 책임감이다. 선생님이 건너건너, 건너건너 보내신 이 민들레 씨앗을 어디다 꽃피울까 하는 책임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07-05-19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진 않지만, 저는 이분을 여태 몰랐어요. 그러니까 네꼬님이 '돌아가셨다'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그분을 몰랐지요. 그런데 네꼬님은 이렇듯 진심을 가득 담은, 그래서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써내셨어요.

저는 그분을 몰라서 여기에 어떻게 댓글을 멋지게 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네꼬님의 진심을 이 글에서 읽었기에 어떤 댓글을 멋지게 달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다만, 이 곳에서 멋진 댓글 말고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추천을, 있는 힘껏, 정말 힘껏, 그 힘에 마음을 실어서 더 힘껏 누르고 가요.

비로그인 2007-05-21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이에게 열 권 가까이 책을 사주었으면서도,그리고 책을 읽었으면서도 그 가치를 잘 못느꼈어요.
님이 말씀하신 책임감에 대해서는 마음에 담으렵니다.
열심히 살아야지요.

마노아 2007-05-19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이 뿌려준 씨앗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싹을 틔우고 있어요. 그 싹이 또 다시 열매를 맺고 있구요. 참으로 아름답게 살다가 가신 분이세요. 고맙고, 안타까워요.

네꼬 2007-05-20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님 / 촌스러운 글인 줄 알지만, 저를 위해 쓴 거예요.잊지 않으려고요. 이러나 저러나 부끄럽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속삭님 / 상심이라기보다요, 어딘가에는 써두어야 할 것 같았어요. 책무, 같은 거죠.

승연님 / 아무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저도 이해하고 있어요. : )

마노아님 / 아륻답게 살아요. 모범이 있어서 우린 외롭지 않지요. : )
 

 

시 같지 않은 시 3

김용락 


도법 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경북 안동 조탑리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댓평 오두막에 막 도착했다

들판에 벼 낟가리가 쌓이고

조선무의 흰 잔등이 무청을

늦가을 푸른 하늘로 밀어올리며

턱턱 갈라진 흙 사이로 힘있게 솟구치는

어느날이었다 


권선생님 왈


“사진 찍고 이칼라면 오지 마라 안 카디껴!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다니면 농사는 누가 짓니껴?


이 많은 사람들이 산이나 들을 마구 짓밟고 다니면

작은 생명들이 발에 밟혀 죽니더

인간들에게 생명평화인지 몰라도

미물에게는 뭐가 될리껴?

차라리 집 안에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되레 생명평화 위하는 길 아이니껴?”


스님, 순례단원, 지역 시인, 카메라를 맨 기자는

묵묵부답 잠시 말을 잃었다.





-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어제 오후에 소식을 듣고도, 뉴스가 나올 때까진 설마 하고, 잠자코 있었다.

애국자가 없다면 세상이 평화로워질 거라고 하셨던 선생님.

언제나 소박한 동화로 가장 깊은 곳을 울리셨던 선생님.

5월은 선생님이 떠나시기에 가장 좋은 달이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 역시, 잠시 말을 잃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5-18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7-05-1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5월은 어린이들과 함께 선생님을 기억하는 달이 되겠지요. 저도 그래요.

홍수맘 2007-05-1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까 아영엄마님의 서재에서 알았어요.
정말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답니다.

2007-05-18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7-05-1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맘님 / 저도 안타까운 마음이에요. 좋은 곳에 계실 테니, 함께 기도해요.

속삭님 / 그러셨군요. 함께 찡한 마음입니다.

네꼬 2007-05-18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고맙습니다. (.. )

비로그인 2007-05-18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마늘빵 2007-05-18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알았습니다. 이 분의 존재를.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통해 그 분의 존재를 알게 되는군요.

2007-05-18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7-05-1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 네, 별 건 없고, 제 마음 뿐입니다.

아프님 / 저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되어요.

속삭님 / 맛 좋네요. : )
 

 밤늦도록 잠은 오지 않고, 아침에는 늦잠을 자고, 낮에는 조는 생활의 반복.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휴가를 냈다.

“밥도 안 먹고 잠만 자야지.” 결심하면서도

‘설마 동물이 그럴 수 있겠어?’ 하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거의 결심대로 되었다. (난 정체가 뭐냐?)


오후 2시쯤 일어나 거실로 기어 나와

소파에 누워서 TV보다 잠들기를 반복하고 보니 4시.

비가 추적추적 온다. (휴가 내기 정말 잘했다.)

밥도 좋지만 이 날씨에는 예의상 라면을 먹어준다.

고춧가루를 잔뜩 넣어서.

상을 물리고 다시 소파에 기어 올라가

응, 조금 있다 일어나서 옷장 정리해야지, 해야지, 해...야......

 

 



....지.

 

정신을 차리니 9시가 다 되어간다.

집에 있으면서도 ‘거침없이 하이킥’ 을 놓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 (윤호야 미안해!)

그러나 늘 그렇듯 반성은 하지 않기로 하고 다시 잠 모드.

10시 반이 되어 돌아온 동거녀에게 배고픔을 호소하였더니

뚝딱 김치전을 부쳐준다.

나는 늘 그렇듯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근데 너 다시 잠이 오겠니?”

라는 동거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12시 10분에 해주는 ‘CSI’ 를 보다가 졸아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는 새것처럼 빛나고

머리가 맑다.

자, 나는 기지개를 켜고

산책을 시작하는 고양이다.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스탕 2007-05-17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고냥이가 음식을 품고 잠이 들었네요. 자다 배고프면 언제라도 먹을수 있게.. ^^;;
저도 결혼전에 가끔 그랬어요. 출근 안하는 일요일에 깨우지 말라고 하고 잠이 들면 종종 저녁 6시가 다 되록 자고 그랬죠.. 그때가 좋았어요~~~

네꼬 2007-05-17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스탕님 / 하하. 오죽 졸리면 쥐를 품고 잠이 드나 생각했는데, 하하하. 자다 깨서 먹고 도로 잘 수도 있겠군요!

Mephistopheles 2007-05-17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지구상의 고양이가 아니세요...이름하여 우주고양이...=3=3=3

네꼬 2007-05-1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아니 메피님 / 남의 과거사 들춰놓고 어딜 가세욧? =3=3=3

홍수맘 2007-05-1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냥 ' 안고 자고 있네!'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스탕님 답변에 ㅋㅋㅋ 웃고 갑니다.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신 거죠? 좋은 하루 되세요.

2007-05-17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향기로운 2007-05-1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음식을 품고 잠을 자다니.. 도저히 용서가 안돼욧~~ ^^ㅋㅋㅋ

다락방 2007-05-1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은 참 예뿌네요. 말도 이쁘게 하도, 행동도 이쁘게 하고. 하다못해 페이퍼의 글씨체와 글씨색도 예뻐요. 잘 자고 일어난 네꼬님 화이팅 ☆

네꼬 2007-05-17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맘님 / 역시 무스탕님은 댓글의 귀재이셔요. 오늘 컨디션은 굿이에요, 굿굿굿!

속삭님 / 네. : )

향기님 / 그저께까지 제가 바로 저랬답니다. 저 고양이가 이해가 되어요. =_=

다락님 / 아이고, "까부순다"고 해도 우아한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 다락님도 화이팅이어요! (그날의 회식 이야기는 따로... 호호홋.)

antitheme 2007-05-1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내고 부담없이 푹 잘 수 있는 하루 부럽습니다.

네꼬 2007-05-1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티님 / 부담은 있었다는... 그러나 눈 딱 감고 하루 쉬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에요. : )

비로그인 2007-05-1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이 녀석은 내 애완고양이야. 밤에 잘 때 아주 따뜻하거든.
물론, 처음엔 힘들었어. 이 덩치 큰 녀석 먹이고 키우려다보니. 하지만 이젠 좀 컸다고
자기가 알아서 밥벌이 해오잖아.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어? 내가 키운 보람이 있지."
그런데, 어이~! 쳐다봤으면 관람료라도 내지 그래? 먹다 남은 생선이나 음식도 괜찮아."

생각의 전환 ^^

네꼬 2007-05-17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 꺅! 좋아라. ♡! ('좀 컸다고 자기가 알아서' 넘 멋져요!)

네꼬 2007-05-17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잘했죠? 헤헤.

2007-05-17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5-17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응~? (웃음)

이매지 2007-05-17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푹 좀 자고 싶어요 ㅎㅎㅎ
주말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ㅎㅎ

네꼬 2007-05-18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앗, 그랬단 말이죠! (이건 하이킥에 대해) 아니 그럴 수가! (이건 아침의 사건에 대해.)

엘신님 / 으응~? (나는 으응~소리 하나로 모든 것을 말해!)

이매지님 / 금요일부터 준비하셨다가 주말엔 보란듯이 자는 거예요. 아주 실컷!

마늘빵 2007-05-18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응!

네꼬 2007-05-1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 으..응..?

비로그인 2007-05-18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풋.

네꼬 2007-05-18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 싱긋.
 

 

필로우맨 / 마틴 맥도너  작. 박근형 연출. 최민식 최정우 이대연 윤제문 출연. LG 아트센터. (~5.20)

 

필로우맨(PILLOWMAN)은 이름 그대로 베개로 만들어진 사나이이다. 머리와 몸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빨조차 작고 하얀 베개로 만들어져 온몸이 푹신푹신한 필로우맨의 직업은, 연극 속의 표현을 빌자면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것이다. 지금 참혹한 고통을 겪는 이의 어린 시절로 찾아가 그 아이가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을 설명해주고, 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정신적인 학대를 받은 카투리안이 작가가 되어 쓴 이야기 중 하나이다. 그가 쓴 이야기들에 나오는 잔혹한 유아 살해 사건이 현실 속에서 똑같이 일어나면서 카투리안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카투리안의 작품들이 낱낱이 분석된다. 그리고 그와 그의 형 마이클의 충격적인 어린 시절 비밀도 차츰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쓰고 보면 마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성인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연극은 그보다 깊은 것을 건드린다. 고통에 관한 것이다. 그 길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길을 돌아서는 갈 수 없다면, 그만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 갈 것인가. 걸어가라고, 연극은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고통이 없다면 삶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걸어가 보라고 한다. 내 발을 대지 않으면 그것이 잔디밭인지 자갈밭인지 알 수 없으니까. 고통도 내 발에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으니까.

 

음향이 좋은 공연장의 장점을 잘 살리지 못한 연출이 조금 서운했지만, 최민식님의 발성이 다른 배우들 만하지 못해서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2부에 이르러 오히려 집중도가 높아지는 연출이 좋았고, 감정 몰입과 폭발에 거침이 없는 최민식님의 에너지가 좋았다. (마지막 소녀의 죽음에 대해 듣고 "아아, 어떡해..." 하며 흐느끼는 장면에서 그의 눈물은 연기가 아니었다.) 연극을 보고 온 주말, 나는 결국 내가 선택한 고통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가 정말 고생이 많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07-05-14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요일을 아주 근사한 공연과 함께 보내셨군요, 근사한 배우에, 근사한 감상까지.

전 토요일에 소마미술관에가서 '반고흐에서 피카소까지'를 보고왔어요. 차례차례 그림을 죄다 훑었건만,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아니,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난 역시 그림보는 눈이 없구나, 슬퍼하며 나왔더랬지요.

네꼬님이 선택한 고통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고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통'을 '선택'했다는 건, 거기에 따른 다른식의 행복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언젠가 마음이 허락하면, 제게 네꼬님의 고통을 들려주세요. 그럼 제가 네꼬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며, 정말 고생이 많군요, 라고 격려해줄게요.

네꼬 2007-05-14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님 / 페이퍼를 다 쓰고 보니 나머지 배우들에 대해선 말을 하지 않았네요. 좋은 연극배우를 만날 때의 경외감을, 다락님도 아시죠? : )

다락님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저를 다독여주실 분이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다락님껜 얘기하게 될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07-05-14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소리도 용서하지 않는 공간에서 음향효과없이 배우들의 음성만으로 온몸이 울리는 연극을 보고 싶네요.
좋은 구경을 하셨나봐요.
이제 새삼 소리에 민감해지고 있답니다.
그게 세상이 내는 소리에 대한 관심이 되겠지요.
님이 연극을 보는 자리에 저도 앉아있었던 듯 전달이 되었어요.
잘 읽고 가요.

홍수맘 2007-05-1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공연, 제주에서는 만나기가 쉽지 않답니다. 저도 이제까지 해봐야 1~2번 정도 본 게 전부였답니다. ^ ^;;;;.
그나저나 님이 선택한 고통이 뭘까요? 어떻게 위로를 해야하나........

네꼬 2007-05-1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 배우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언제나 설레요. 게다가 음영이 뚜렷이 드러나는 최민식님의 얼굴, 좋아라. : )

홍수맘님 / 제가 선택한 고통은.... 사랑의 고통!! 하하하하핫!!!

2007-05-15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슬프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황지우, 「뼈아픈 후회」

 

--

 

처음 해보는, 취중 페이퍼.

시간 많이 걸렸다.

취한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5-13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7-05-13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그대의 닉네임을 좋아해요. : ) 여전히 취한 채로.

2007-05-13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7-05-13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님의 서재로 가요. : )

다락방 2007-05-1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일찍부터
-이정하


아침 일찍도 오시던군요.
그대인가 했더니, 아침 일찍도 오시는 비.
내 우울함의 시작.

그립다는 것은 그대가 내 곁에 없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런 그대가
내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내 가슴 한 쪽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립다는 것은 다시는 못할 짓이다.


네꼬 2007-05-13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님 / 그래서... 아침에 울면 종일 울게 돼요. 다시는 못할 짓이죠. : )

2007-05-13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7-05-14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어제는 햇빛과 바람이 참 좋았는데. (얼마나 좋았는지 아시면 아까워서 땅을 치실 거예요.) 자자, 다음 주엔 약속이 없어도!!(ㅠㅠ) 방황을 적극권유! 냥냥!

마노아 2007-05-14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뼈아픈 후회하지 말아요ㅠ.ㅠ

네꼬 2007-05-1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 그래요, 우리 그러지 말아요. ㅠ_ㅠ

2007-05-18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7-05-18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님의 주말 계획은 어떻게...? 저는 제대로 나들이 나들이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