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돌아가셨다,
이 말에는 그러니까 원래 계시던 곳으로 가셨다는 뜻이 함축된다. 원래 계시던 곳, 그곳이 편안하고 환한 천국이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란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는 한때 어린이책을 만들었다. 아마도 조만간 나는 내 자리를 찾아 돌아갈 것이다. 나는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고양이고, 어린이들도 대체로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내가 어린이"책"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고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하였다. 나이가 들면 뚱뚱한(반드시 뚱뚱한!) 할머니가 되어 어린이들이 들락거리는 집에서 평화롭게 죽고 싶다. 이것이 나의 유일하게 변치 않는 소망이다.
어린이책의 작가이거나 편집자이거나 화가이거나 할 것 없이, 대부분의 나 비슷한 사람들은 계기를 갖는다. 나의 동거녀는 권정생 선생님의 단편 '하느님의 눈물'을 읽고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고, 그래서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어린이들이 좋아서 이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한 모임에 갔고, 거기서 지금의 동거녀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도움으로 어린이책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네꼬가 되었다.
하찮은 우연의 반복일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중심에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가 있었다.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에는 화려한 복선도 없고, 굉장한 표현도 없고, 그럴듯한 주장도 없다. 토끼에게, 강아지에게, 너구리에게 어린이의 심성을 심는 권선생님의 동화는 얼마나 촌스러운지 모른다. 기교가 없다. 그런데 사람을 울린다. 그것은 선생님의 동화에 진심이 있기 때문이다. 버려진 강아지똥이 민들레의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된다는 얘기는 자칫 신파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게 그냥 신파가 아닌 것은, 버려진 것이 거름이 되어 생명을 일구게 마련이라는 진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얼마나 많은 편집자와 동화작가와 화가들에게 권정생 선생님이 계기를 주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당사자들도 거기에 스민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권정생 선생님의 촌스러운 동화에 감동을 받고, 바로 그렇게 작가가 된 이들의 작품에 감동을 받고, 그것을 자양분 삼아 좋은 어른으로 자라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당사자들도 거기에 스민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다.
선생님의 동화는 스스로 강아지똥이 되어 이땅에 민들레를 피울 것이고, 민들레는 어디에 자리잡을지 모르는 꽃씨들을 하염없이 하늘로 날려 보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권정생 선생님이, 한평생을 가난하게 살며 "간신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하신 권정생 선생님이, 인세를 고스란히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에게 보내신 권정생 선생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다.
또야 너구리가, 우리 옆집에 오신 하느님이, 몽실 언니가, 비나리 달이가, 우리에게 말한다. 세상이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를. 어린이들에게 좋은 동화를 읽히면 된다. 이 간단한 일을 두고 세상은 참 돌아서 간다.
어떤 아동문학 연구자는 유학 전에 찾아뵌 선생님께서 주신 학자금 10만원으로 백과사전을 샀다고 했다. 그걸 기반으로 지금껏 먹고사는데, 선생님이 가시니 마음 둘 곳이 없다 하였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생각으로 죽음에 냉담했던 나는, 오래오래 내 목에 머무는 아픔을 생각한다. 이것은 슬픔이 아니다. 책임감이다. 선생님이 건너건너, 건너건너 보내신 이 민들레 씨앗을 어디다 꽃피울까 하는 책임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