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우맨 / 마틴 맥도너  작. 박근형 연출. 최민식 최정우 이대연 윤제문 출연. LG 아트센터. (~5.20)

 

필로우맨(PILLOWMAN)은 이름 그대로 베개로 만들어진 사나이이다. 머리와 몸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빨조차 작고 하얀 베개로 만들어져 온몸이 푹신푹신한 필로우맨의 직업은, 연극 속의 표현을 빌자면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것이다. 지금 참혹한 고통을 겪는 이의 어린 시절로 찾아가 그 아이가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을 설명해주고, 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정신적인 학대를 받은 카투리안이 작가가 되어 쓴 이야기 중 하나이다. 그가 쓴 이야기들에 나오는 잔혹한 유아 살해 사건이 현실 속에서 똑같이 일어나면서 카투리안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카투리안의 작품들이 낱낱이 분석된다. 그리고 그와 그의 형 마이클의 충격적인 어린 시절 비밀도 차츰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쓰고 보면 마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성인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연극은 그보다 깊은 것을 건드린다. 고통에 관한 것이다. 그 길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길을 돌아서는 갈 수 없다면, 그만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 갈 것인가. 걸어가라고, 연극은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고통이 없다면 삶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걸어가 보라고 한다. 내 발을 대지 않으면 그것이 잔디밭인지 자갈밭인지 알 수 없으니까. 고통도 내 발에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으니까.

 

음향이 좋은 공연장의 장점을 잘 살리지 못한 연출이 조금 서운했지만, 최민식님의 발성이 다른 배우들 만하지 못해서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2부에 이르러 오히려 집중도가 높아지는 연출이 좋았고, 감정 몰입과 폭발에 거침이 없는 최민식님의 에너지가 좋았다. (마지막 소녀의 죽음에 대해 듣고 "아아, 어떡해..." 하며 흐느끼는 장면에서 그의 눈물은 연기가 아니었다.) 연극을 보고 온 주말, 나는 결국 내가 선택한 고통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가 정말 고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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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7-05-14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요일을 아주 근사한 공연과 함께 보내셨군요, 근사한 배우에, 근사한 감상까지.

전 토요일에 소마미술관에가서 '반고흐에서 피카소까지'를 보고왔어요. 차례차례 그림을 죄다 훑었건만,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아니,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난 역시 그림보는 눈이 없구나, 슬퍼하며 나왔더랬지요.

네꼬님이 선택한 고통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고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통'을 '선택'했다는 건, 거기에 따른 다른식의 행복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언젠가 마음이 허락하면, 제게 네꼬님의 고통을 들려주세요. 그럼 제가 네꼬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며, 정말 고생이 많군요, 라고 격려해줄게요.

네꼬 2007-05-14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님 / 페이퍼를 다 쓰고 보니 나머지 배우들에 대해선 말을 하지 않았네요. 좋은 연극배우를 만날 때의 경외감을, 다락님도 아시죠? : )

다락님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저를 다독여주실 분이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다락님껜 얘기하게 될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07-05-14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소리도 용서하지 않는 공간에서 음향효과없이 배우들의 음성만으로 온몸이 울리는 연극을 보고 싶네요.
좋은 구경을 하셨나봐요.
이제 새삼 소리에 민감해지고 있답니다.
그게 세상이 내는 소리에 대한 관심이 되겠지요.
님이 연극을 보는 자리에 저도 앉아있었던 듯 전달이 되었어요.
잘 읽고 가요.

홍수맘 2007-05-1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공연, 제주에서는 만나기가 쉽지 않답니다. 저도 이제까지 해봐야 1~2번 정도 본 게 전부였답니다. ^ ^;;;;.
그나저나 님이 선택한 고통이 뭘까요? 어떻게 위로를 해야하나........

네꼬 2007-05-1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 배우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언제나 설레요. 게다가 음영이 뚜렷이 드러나는 최민식님의 얼굴, 좋아라. : )

홍수맘님 / 제가 선택한 고통은.... 사랑의 고통!! 하하하하핫!!!

2007-05-15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