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조선에 고장원님이 쓰신 SF관련 글입니다.
http://cinema.chosun.com/site/data/html_dir/2000/01/11/200001110000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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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의 문학성에 관하여 - (1)
2000년 01월 11일 17:05
한국에서 과학소설 번역의 문제점
최근 몇 년간 창작 과학소설들이 가물에 콩나듯 눈에 띄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과학소설의 주류는 영미권의 작품들을 번역한 것들이다. 이 땅에서 과학소설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좀더 넓어짐에 따라 번역 작품의 선택 폭도 비교적 다양해지는 추세라서, 이제는 SF 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고전들이나 미국 SF황금기의 명작들 뿐만 아니라 80~90년대의 최신작품들도 간간이 서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그 절대적인 수량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SF의 다양한 기호를 골고루 맛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SF 번역물들의 번역 수준이 대부분 함량 미달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전문 번역가들과 실력있는 문인들이 SF번역을 기피하기 때문인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SF번역에 대한 홀대는 곧바로 'SF의 문학적 수준 미달'이란 선입관을 조장하고 고착화시킬 우려가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번역되는 해외 SF작품들은 주로 과학소설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열성파들이 각개격파식으로 번역을 마무리 지어 출판된 것들이다.
어쩌다가 유명한 문인이 출판사의 간곡한(?) 요청으로 과학소설의 번역을 맡게될 경우에도 그는 마치 중요한 역작을 끝마친 뒤에 몸을 가볍게 푸는 심정으로 SF의 번역에 착수한다.(어떤 문인은 그러한 심경을 서문을 통해 공공연하게 피력하기까지 한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분들은 제임스 블리쉬의 '우주도시' 한국어 번역판을 서점에서 찾아보기 바란다.)
이러한 빈곤의 악순환은 결국 과학소설에서 언어 사용과 문장의 문학성이 주는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현상을 조장하게 되고 출판사들은 해외의 훌륭한 작품들을 조잡하게 번안(정확한 번역이 아니라는 의미에서)해 시장에 내던지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이는 무협지에 대한 편견 때문에 김용의 걸작들이 싸구려 무협지 수준으로 번안되는 현상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편견을 거두고 낯선 형식의 작품을 진지하고 성의있게 번역했을 때는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 해답의 단서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와 '타나토노트'가 명쾌하게 보여준다. 베르베르의 독특한 작품들이 한국에서 오랫 동안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는 작품 자체의 창의성과 출판사의 대대적인 홍보전략 덕분도 있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프랑스어를 낯익은 우리말로 유려하게 풀어낸 이해욱의 번역솜씨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해욱의 번역문을 읽다보면 남의 생각을 더듬더듬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듯 막힘없이 부드러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심지어 표지를 보지 않고 '개미'나 '타나토노트'를 읽기 시작했다면 우리나라의 국내 창작소설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미국의 SF작가 씨어도어 스터전은 '과학소설의 9할은 쓰레기다. 하지만 모든 것의 9할은 쓰레기다!'라는 말로 과학소설에 대한 편견에 비수를 들이댔다. 그렇다. 주류 문학이라 해도 해당 작가가 삼류냐 거장이냐에 따라 작품이 공정하게 판가름나듯이 과학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과학소설의 문학적 함량미달 운운'하는 자세는 편협한 엘리트 문학의 시각을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글이 한국에서 과학소설의 문학성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데 티끌 만큼이라도 기여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다음 글은 과학소설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었던 뉴 웨이브 운동과 문학적인 실험정신이 돋보였던 일부 작가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SF의 뉴 웨이브: 과학소설의 문학으로서의 거듭나기
과학소설이 이 장르문학을 찾는 독자에게 주는 가장 큰 카타르시스는 뭐니 뭐니해도 자연과학을 기반으로 한 논리적인 비약, 즉 독창적인 허구가 주는 경이감이다. 그러한 외경심을 불러 일으키는 형태가 때로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시간 줄기의 가닥을 새롭게 꼬아나가는 시간여행담(멀리는 H. G. 웰즈의 '타임머쉰'에서 복거일의 '역사 속의 나그네'에 이르기까지)이 되기도 하고 우주 모험담(E. E. 스미드의 '우주선 종달새호'시리즈에서부터 할 클레멘트 (Hal Clement)의 '중력의 임무' (Mission of Gravity)에 이르기까지)이 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인공지능 컴퓨터, 로봇, 유전자 공학 , 사이버 스페이스, 등 이미 실현되었거나 앞으로 조만간 구현될 미래의 모습과 연관지어지곤 한다.
과학소설은 그 본질상 논리적인 비약이 독창적일 수록 자연히 해당 장르 소설로서의 흥미가 높아지고 작품으로서의 평가도 아울러 올라가게 된다. 이 점은 '과학소설이 1차적으로 아이디어 문학'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설사 허무맹랑한 결말이 나오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공인된 과학적 사실이나 적어도 논리적인 개연성을 갖춘 유사과학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면 마땅히 과학소설로 간주되는 것이 이 장르의 고유 속성이다. 이것은 추리소설이 밀실 살인사건의 미스테리(완전범죄?)를 얼마나 독창적인 해법으로 독자 앞에 선보이는가 하는 장르 고유 규칙과도 견주어질 수 있다.
(물론 과학소설은 과학의 진보가 사회와 인류에게 미치는 보편적인 문제, 과학의 이율배반성 등을 심도있게 다룰 수 있는 장르라는 점에서 추리소설과 같은 격에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이다. 추리소설과 과학소설의 차별성에 관해 좀더 심도있는 글을 읽고 싶은 사람은 스타니스와프 램 (Stanislaw Lem)의 비평서 '미시세계' (Microworlds)에 실린 논문 '과학소설: 절망적인 케이스와 몇가지 예외SF:A Hopeless case --- with Exceptions'를 읽어보기 바란다.)
하지만 그 뿐이면 다인가? 19세기말 태동하여 20세기 초엽 과학소설이 간신히 장르의 고유 틀을 자리잡아갈 무렵에는 그 정도로 충분하였다. 사람들은 우주인과 우주선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면서 광선총이 언제 발사될까 조마조마 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사회가 다변화되고 과학소설의 독자층과 작가층이 더욱 다양해지면서 한가지 미진한 문제가 숙제로 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과학소설의 '문학으로서의 거듭나기'였다. 초기 과학소설은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과학적인 아이디어의 독창적인 실험실로 만족했다. 그러다보니 적지않은 작품들이 일반적인 의미의 문학이라기 보다는 재치있고 통찰력있는 정보 모음이나 사고 실험실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타임머쉰이나 공룡들을 비틀린 시공간에서 만나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통속적인 과학소설가들은 여전히 진기한 괴물이나 특수장치 등을 고안해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지어내려고 안간힘 썼지만, 1960년대 들어 그러한 타성에 반기를 든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물론 여기서 과학소설의 초기 거장들이 이룬 업적까지 도매급으로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아서 클라크나 로버트 앤슨 하인라인, 씨어도어 스터전, 올라프 스태플든, 올더스 헉슬리, 필립 K. 딕, 아이작 아시모프, 제임스 블리쉬 그리고 이밖에도 적지 않은 작가들이 과학소설의 토양을 풍요롭게 다져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1960년대의 과학소설계는 통속적인 삼류작가이건 통찰력있는 작품을 펴내는 작가이건 간에 어느 정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장르의 정체상태에 머물고 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젊은 작가들은 과학소설이 과학에 모태를 두고 있는 동시에 진정한 문학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움직임을 이름하여 SF의 '뉴 웨이브' 운동이라 한다. 이들은 문학적으로는 문체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사회적으로는 급진적인 정치성향을 띠었다. SF 연구가 스콜즈와 랩킨에 따르면, '뉴 웨이브'란 넓게 보아 SF를 위해 테크놀로지적 비전 만큼이나 모험적이고 진보적인 언어와 사회적 관점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주1)
'토성으로의 여행따위의 진부한 얘기에는 싫증이 났다... 우리는 실험을 원한다. 우리는 자유로워지고 싶다. 윌리엄 버로우즈처럼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고 싶은 것이다.'
'뉴 웨이브'가 최초로 구심력있는 운동 형태를 갖추게 된 계기는 영국의 SF작가 마이클 무어콕 (Michael Moorcock)이 1964년 잡지 '뉴 월즈 (New Worlds)'의 편집장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이후 이 잡지는 같은 생각을 가진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싣는 주요 거점이 된다. 스콜즈와 랩킨은 이 사건을 초기 SF의 선구자 존 캠벨이 잡지 '어스타운딩 스토리즈'의 편집장으로 부임한 일에 비견한다.(주2)
이러한 변화의 1차적인 조짐은 영국 작가 브라이언 올디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 무어콕이 편집장으로 부임하기 전부터 '뉴 월즈'에 작품을 기고해온 그는 이후 무어콕과 의기투합하여 주류 문학작가들(주3)의 독특한 문체를 현대 SF에 접목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실례로 올디스의 'Barefoot in the Head, 1969년'는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올디스는 제임스 발라드 (James Graham Ballard)와 함께 뉴 웨이브 SF를 본격적인 문학실험의 매개체로 삼으려 했다.(주4)
영국에서 미국까지 건너온 뉴웨이브 운동은 당시 과학소설계에 첨예한 논쟁을 일으켰지만, 결과적으로 뉴 웨이브 운동은 외계 우주에서 화려한 활약보다는 내우주에 몰입하고 심리학과 인문과학을 강조했으며 현대문학의 특징인 실험적 기법을 다양하게 도입함으로서 장르 SF의 상투성을 파괴했고, 덕분에 당시 침체에 빠져있던 영미권 SF도 활력을 얻게 되었다. 이로서 SF와 주류 문학 사이의 경계선은 좀더 모호해지게 되었다. 하긴 어떤 SF작가는 앞으로 백년 후에 나올 당대 시대상을 담은 주류 소설은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SF나 다름없으리라고 예측한 바 있다.
영국에서 먼저 불어온 SF의 이같은 문학적 정체성 논란은 미국의 거장들에게는 불쾌한 뒷통수치기로 보였지만 미국에서도 당시 로저 젤러즈니 (Roger Zelazny), 사무엘 R.딜레이니 (Samuel R. Delany), 토마스 딧쉬 (Thomas M. Disch), 조안나 러스 (Joanna Russ), 노만 스핀래드 (Norman Spinrad) 같은 신진작가들은 '뉴월즈'에 기꺼이 작품을 기고했다.
아울러 기성 작가들 가운데서 할란 엘리슨 (Harlan Ellison)이나 로버트 실버버그 같은 이들도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을 표방하면서 이러한 흐름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특히 할란 엘리슨이 펴낸 두 권의 선집 '위험한 전망' (Dangerous Vision, 1967년)과 '다시, 위험한 전망' (Again, Dangerous Vision, 1972년)은 미국에서도 뉴 웨이브가 일반화되는데 기여했다.
위에서 거론한 작가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로저 젤러즈니는 주류문학의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하며 특히 SF장르에만 한정시킬 경우 최고 정상급으로 분류된다. 그의 작품에 대한 서평들은 흔히 '명석하고 유려한 스타일', '간결함과 화려함이 절묘하게 배합된 아름다운 산문', '세련된 대화체의 매력' 등을 언급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로저 젤러즈니가 단순한 아이디어 메이커가 아니라 대학시절부터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세익스피어, 휘트먼, 토마스 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및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에 관해 관심을 보였고 1962년 그가 영문학 석사 학위로 받은 논문 주제가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 1세 시대 연극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과학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석사 졸업후 미국 클리브랜드 사회보장국에 근무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의 문체는 시적이고 아카데믹하며 현학에 가까우리 만큼 문학적인 인유, 강렬한 신화적 상징으로 충만해 있다.
'당신은 칼리칸자로스예요.'
그녀는 느닷없이 선언했다.
나는 왼쪽으로 돌아누운 다음 어둠을 향해 미소지었다.
'발굽도 뿔도 모두 사무실에 두고 와 버렸는데.'
'그 얘기를 알고 있군요.'
'이름은 노미코스가 맞아.'
손을 뻗쳐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이번에 세계를 파괴할 작정으로 왔나요?'
나는 웃으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생각해보겠어, 만약 지구가 그렇게 부서질 운명이라면...'
(로저 젤러즈니, '내이름은 콘라드' (This Immortal),
도서출판 시공사, 1995년, 11쪽)
위의 인용문은 젤러즈니의 초기 걸작 중 하나인 '내 이름은 콘라드'가 시작되는 첫부분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인 불카누스에 비유한다. '발굽도 뿔도 모두 사무실에 두고 와 버렸는데.'라는 구절은 신화적인 비유를 과학소설의 현실과 절묘하게 배합시켜 놓은 부분이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지나친 자기 도취와 감상벽이 젤러즈니의 약점으로 지적되긴 하지만 그의 산문은 신화와 시적인 서정성이 잘 조화를 이룰 경우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자적인 허구의 공간을 견고하게 만들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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