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룸 - 영원한 이방인, 내 아버지의 닫힌 문 앞에서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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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그렇게나 자주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대교도인가 기독교도인가? 헝가리인인가 미국인인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너무 많은 상반되는 것들이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누워 있는 몸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구분, 단 하나의 진정한 이분법이 있구나. 삶과 죽음,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p623)

 

아마 올해 다른 수많은 책들을 읽겠지만, 이 문구가 내겐 올해의 문구가 되리라는 건 확실하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머리를 둔기로 맞는 듯한 충격이 왔었다. 그래, 뭐라뭐라 이유를 말하고 사상을 말하고 해도 이 문장 하나로 다 해결될 수 있겠구나. 사과를 반으로 나누듯 겹치는 부분 없이 짝 갈라지는 양쪽을 가진 것은 단 하나, 삶과 죽음 뿐이다. 그래, 정말 그렇다. 이 세상 무엇이 삶과 죽음 만큼 단호하게 갈라질 수 있을까. 그러니 우리가 양편으로 나뉘어 상대를 혐오하고 핍박하고 강제하는 것은, 참 넌센스로구나. 라는 생각에 이 대목을 거듭 읽게 되었다.

 

수전 팔루디의 유명한 책 <백래시>를 두고 이 책 <다크룸>을 먼저 읽은 것은, 그 정체성이란 부분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유대인이었고 수용소 생활을 했으나 헝가리인으로 살고 싶었고 그러다가 미국으로 들어와 전형적인 미국적 남자 혹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평생 애썼고 그 과정에서 때아닌 폭력과 강압을 가족에게 휘둘렀었던 아버지가 돌연 70이 넘은 나이에 여성으로 성전환수술을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면, 딸의 입장에서 여성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아버지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이런 여러가지 의문점에 사롭잡혀 600페이지가 훨씬 넘는 이 책을 선듯 손에 잡게 된 거이다.

 

"나는 이제 숙녀니까, 버데르가 이것저것 다 고쳐 준단다." 그녀가 말했다. "남자는 나를 도와야지. 나는 손가락 까닥 안 한다고." 아버지는 나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게 여자로 살아가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 아니겠니." 아버지가 말했다. "하긴 너는 여자의 어려움에 대해서 쓰지. 나한테는 유리한 점만 보이는구만!" (p83)

 

성별을 바꿀 때 그 결심을 할 때, 나와 다른 성별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인지 늘 궁금했다. 물론 선천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성별보다 가지고 있지 않은 성별로서 살기를 마음 깊이 원하게 되는 것도 있겠지만, 사실 성별이 다르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생물학적인 구분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닐진대, 성전환이라는 것을 할 때 다른 성별이 처하게 되는 여러가지 상황을 과연 알고 바꾸는 걸까. 수전의 아버지 말처럼, 여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여성으로서 살기 힘든 점이 몸으로 마구 느껴지지만, 성전환이라는 것을 했을 때는 기존의 성이 가지지 못했던 좋은 점들만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말하자면, 사회적인 진정한 '여성'의 성별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트랜스섹슈얼은 '이전의' 자아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리고 당신의 과거를 삭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그 성별이라고 믿는 성별처럼 '보이도록' 신체를 변형시킴으로써 당신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완고하고 성차별적인 이해에 동조하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은 그런 변형을 통해서 생물학이 운명이 아님을, 그리고 '트랜스'는 젠더에 처진 경계선을 단순히 건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 자체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인가? (p230)

 

수전 팔루디의 이 책이 훌륭한 것은, 그저 아버지가 트랜스섹슈얼이 되었다는 것을 통해 그 일생에 집착하여 구구절절 인생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 누구보다도 복잡한 과거를 가진 그 존재를 통해 역사적이면서 사회적인 의미를 집요하게 파헤쳐 고민한 결과를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트랜스섹슈얼이 되면 그 이전에 가졌던 스스로와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인가. 아버지의 과거를 기억하는 저자는, 여성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수십 년 살아온 정체성과 개인사를 가진 사람이 그것을 전부 버리고 생물학적으로 변해버린 몸만으로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겠는가. 어려운 문제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러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서 젠더의 의미를 찾아낸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반유대주의에는 화수분처럼 수많은 원천이 있었지만, 근대 파시스트 국가를 위협한 유대인다움이란 종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젠더로서의 유대인다움이었던 것이다. (p384)" 유대인 남성의 여성성에 대한 믿음이라. 유대인 여성은 신비롭고 매혹적으로 찬사를 보내면서 유대인 남성에 대해서는 '우스꽝스럽고 멋지지 않은 외모'를 가진 여성적 질환으로 병든 존재 취급을 했다는 것.

 

이런 시스템, 그리고 이런 윤리 속에서 자라나서 동화되고 싶어 안달이 난 유대인 소년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궁금했다. 어린 이슈트반은 자기 '인종'의 남자란 정신질환을 앓는 계집애일 뿐이고, 여자란 여성적인 우아함의 모범으로 귀애함을 받는 문화에서 어른이 되었다. (p386)

 

수전의 아버지는, 어쩌면 평생 주류에 들고 싶었던 존재였는 지도 모르겠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주류. 어린 시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어머니에게 방치되다시피 살았던 어린 시절. 덕분에 번듯한 가정을 주류로 생각하고 나는 가정을 제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가장 컴플렉스에 시달리며 가족을 자신이 만들고자 한 방식으로 정형화시키려 했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세계대전 중에 여러 고초를 겪은 청년 시절. 그래서 유대인이길 거부하고 헝가리에서는 헝가리인으로 미국에서는 미국인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했다. 남성으로 태어나 그다지 귀함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여기고 결국엔 늦은 나이에 자신이 오히려 주류라고 생각하는 여성으로 탈바꿈했다,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정체성은," 아버지가 고심하며 대답했다. "정체성은 사회가 너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야. 사람들이 인정한 대로 행동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적이 생긴단다. 나는 그렇게 살았어. 그래서 아무 문제가 없는 거야." (p517)

어쩌면 한 개인이 살아내기에 너무나 어려운 여러가지 여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한 인간으로서 수전의 아버지를 받아들여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기를 체벌하던 방식 - 로지가 벌을 줄 때 선호했던 방법은 아들을 '어두운 방에(in the dark room)' 가두는 것이었다 (p521) - 처럼 사는 내내 스스로를 '어두운 방에' 두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고. 직업처럼, 사진을 인화하기 위해 암실에 머무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잘 몰랐던 아버지의 역사를 아버지와의 잦은 만남을 통해 듣고 이해하게 되고 친척들을 만나면서 아버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어쩌면 수전은 트랜스섹슈얼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었을 것 같다 싶다.

 

페미니즘이란, 계속되는 만트라에 따르면, '선택'에 대한 것이다.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선택했을까? 그것은 내가 물려받은 것, 내가 조절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역사로부터 이룩해낸 것이 아닌가? 아내와 아이들 위에 군림하는 남자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 때문에 나는 여성 평등을 위해 움직이는 운동가가 되었다. 페미니스트로서 나의 정체성은 아버지가 겪은 '정체성 위기'의 잔해, 자신이 선택한 남성적인 페르소나를 주장하지 못했던 좌절에서 태어났다. 취미이자 피난처였던 페미니즘은 내가 선택한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내가 도망치지 못했던 것은 아버지였다. (p99)

 

그렇게 시작했지만, 결국 수전은 아버지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 혹은 그녀를 더 많이 알게 된 말년을 통해, 그 혹은 그녀를 관통하는 역사를 이해하면서, 용서라기보다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라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인 듯 하다.

 

순전히 트랜스섹슈얼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한 책이었지만 읽는 동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며 복잡해졌었다. 단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성별 하나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럼에도 성별 하나 만으로도 수만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 그런 많은 깨달음이 속에서 교차했던 좋은 시간이었다.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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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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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주는 폐해를 두 여성과 그 주변 인물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으로 가감없이 그려낸 수작이다. 읽는 내내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에 가슴이 아팠고 그 속에서 감내해야 했던 무자비한 폭력에 분노했다. 희망을 보이는 마무리에 적이 안심하면서도 저 속의 사람들 삶은 언제쯤 나아지나 싶어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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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3-19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과 폭력, 슬픔이라니.... 너무 솔직한 감상평입니다. 전 표지로만 봤던 책인데 이번에 작가 이름도 기억해두려구요. 할레드 호세이니.
비연님의 선택을 받았던 책이니까요.

비연 2020-03-20 10:04   좋아요 0 | URL
단발님. 마지막 문장에 완전 감동 먹었습니다.. 흐흐흐흑. (좋아서 우는)
할레드 호세아니의 책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우리한테는 낯선 나라의 현실에 대해 매우 사실적으로 풀어나가면서도 소설적인 재미까지 한껏 담긴 작품인 것 같습니다. 단발님 읽은 감상평도 보고 싶어요~
 
모든 죽은 것 찰리 파커 시리즈 (오픈하우스) 1
존 코널리 지음, 강수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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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파커 시리즈는 처음 접했는데.. 역시 너무나 잔인하지만 작가 특유의 유머들이 곁들여져서 그럭저럭 볼 만은 한 책이었다. 하지만 잔인의 정도가 심해서 사놓은 이 시리즈를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이 되는 시점. 아일랜드 작가인데 이리 잔인하게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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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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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슴아픈 소설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널 위해서라면 천번이라도˝ 라는 이 말이 가슴에 꽂혀서 한동안 갈 것 같다. 아프가니스탄의 불행한 역사를 바탕으로, 두 아이의 우정과 배신과 용서가 한 편의 서사시처럼 펼쳐지는 놀라운 소설이다.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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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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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찬사가 워낙 여기저기서 들려와서 책표지가 정말 맘에 안 듦에도 불구하고 책장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1952년부터 1970년까지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 여섯살박이 어린 카야가 24살이 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오늘 비행기 안에서 마지막 부분들을 읽으면서 오열을 했다... 아 왜 그랬는 지 모르겠다. 사실 내용이 대단히 다른 것도 아닌데, 대단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지막 부분에서는 카야의 마음과 하나가 되면서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이고... 무엇보다 다 떠나가고 버림받은 아이의 성장이야기이며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켜나가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했던 분투기이다.

 

 

엄마가 떠나고 몇 주에 걸쳐서 큰오빠와 언니 둘도 모범이라도 보이듯 홀연히 떠나버렸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다 도망가버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버지는 처음에는 고함을 지르다가 주먹으로 때리고 결국은 제 분을 못 이겨 손등으로 철썩철썩 갈겼다. 그렇게 언니들과 오빠는 한 사람씩 사라졌다. 카야는 훗날 언니 오빠의 나이도 잊고 진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생각나는 건 미시, 머프, 맨디라는 애칭뿐이었다. 포치의 매트리스에는 언니들이 두고 간 양말들이 쌓여 있었다. (p23)

 

 

모든 불행의 시작은 폭력이다. 자격지심에 사로잡힌 아버지는 엄마를 두들겨 패고 그래서 떠나간 엄마를 대신하여 자식을을 패기 시작한다. 그냥 자기 울분에 못 이겨, 자기 인생의 불만을 연약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퍼붓는 가장 졸렬하고 비겁한 인간상. 그 속에서 나 혼자라도 살아야겠다 떠나는 가족들. 그렇게 해서 언니 둘, 큰오빠가 떠난 후 가장 가깝게 지내던 조디 오빠마저 떠나버린 후 카야는 정말 혼자가 된다. 여섯살 짜리가. 두들겨 패는 아빠와 단 둘이. 아.. 정말 이게 뭐란 말인가.

 

 

"다들 왔구나. 그런데 이렇게 많은 숫자는 셀 수가 없는데."

우짖는 새들은 빙글빙글 돌다 자맥질하고 카야의 얼굴 근처에서 떠다니다 옥수숫가루를 던져주자 땅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조용해져서는 가만히 서서 몸단장을 했다. 카야는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모래밭에 앉았다. 커다란 갈매기 한 마리가 카야 곁의 모래사장에 내려와 홰를 쳤다.

"나 오늘 생일이야." 카야는 갈매기에게 말했다. (p33)

 

 

이 부분에서부터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외로운 아이. 생일만큼은 엄마가 돌아올거라 애타게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 엄마. 그렇게 아이는 습지와 동물들과 벗하며 사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요리를 하고 물건을 사고, 돈을 벌기 위해 홍합을 채취하는 아이. 그리고 서서히, 오지 않는 엄마를, 형제들을 마음에 묻고 습지에 스며드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자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p49)"

 

한번쯤 아버지와 낚시를 다니며 평화롭게 지내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은 잠시였을 뿐, 아버지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제 버릇 남 주겠는가. 못난..) 홀연히 없어진다. 정말 혼자 남게 된 카야. 그런 카야를 음으로 양으로 돌봐주는 흑인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부인. 인종차별이 아직도 여전하던 시절, 돌로 맞아도 대꾸도 못하던 흑인 부부는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던 카야를 다정하게 조용하게 도와준다. 옷을 받아주고, 음식을 나누어주고, 무엇보다 정을 준다.

 

그리고 찾아든 첫사랑. 글을 가르쳐주고 수학을 가르쳐주고 습지와 생물을 아끼는 마음이 카야와 같은 조디 오빠의 친구 테이트. 다정하고 사려깊은 테이트의 보살핌 속에서 카야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가고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테이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테이트가 대학을 가고 나서 카야와의 연락을 무정히 끊어버리면서 카야는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리고. 이 아이는 언제쯤 혼자가 아닐 수 있을까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사랑이란 차라리 씨도 뿌리지 않고 그냥 두는 게 나은 휴경지인지도 모른다. (p264)

 

 

이 책은 사실, 테이트 이후에 카야를 이용하러 다가든 체이스 앤드루스의 시체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전과 현재가 교차하면서 카야의 외로운 인생과 체이스와의 악연, 그리고 체이스의 죽음으로 인해 카야에게 쏟아지는 의혹들이 하나하나 전개되어 가는 구조이다. 끝까지 읽고 나면, 뭐랄까. 스포일을 할 수 없으니 더 말을 할 수는 없겠지만, 카야라는 여성상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외롭고 또 외로왔던 한 아이가 자연과 동물들을 벗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감각적이면서도 정감있게 펼쳐지고 그 속에서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의 행태가 대비되어 그려지면서 카야가 그 속에서 세상과 마주하는 방법을 어떻게 터득하는 지를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외로움을 아는 이가 있다면 달뿐이었다.

예측 가능한 올챙이들의 순환고리와 반딧불이의 춤 속으로 돌아온 카야는 언어가 없는 야생의 세계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한창 냇물을 건너는데 발밑에서 허망하게 쑥 빠져버리는 징검돌처럼 누구도 못 믿을 세상에서 자연만큼은 한결같았다. (p267)

 

외로운 사람들, 핍박받는 사람들은 서로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다. 점핑과 메이블 부부가 카야에게 보여준 사랑은 온갖 잘난척은 다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착한 부부가 그런 중에도 흑인이란 이유로 받는 차별을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모습은 분노를 넘어서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카야의 외로움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고, 그 시절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며 지낼 수 있었는가를 서글프게 그리고 있기도 하다.

 

 

"깜둥이 노인네가 마을로 가네. 조심해라, 깜둥아, 그러다가 넘어지지 말고."

소년들은 발끝만 보고 걷는 점핑을 놀려댔다. 한 소년이 허리를 굽히고 돌멩이를 주워들어 점핑의 등에 던졌다. 돌은 툭, 소리를 내며 점핑의 어깨뼈 바로 밑에 명중했다. 점핑은 비틀, 하고 고꾸라졌지만 다시 걸었다. 소년들이 배를 잡고 웃어대는 사이 점핑은 길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소년들은 돌멩이를 더 많이 주워 들고 뒤를 따라갔다. (p129)

 

 

좋은 책이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생태학자가 첫 번째로 낸 소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선이 날실과 씨실처럼 엮여 들어가고 그 속에 다양한 인간군상을 담아냄과 동시에, 한 아이의 외로움과 사랑과 성장을 개연성있게 잘 그려내어서 읽는 동안 내내 상당히 몰입되는 책이었다. 마지막 부분까지 다 읽어내려가다 보면 아마 나처럼 가슴 뭉클함에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카야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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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1-08 0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을래요! 그리고, 앞으로 비연님께 더 많이 써달라, 더 많이 쓰시라 강권하는 단발머리가 되겠습니다.
길게, 기~~일게 써주소서!!!

비연 2020-01-08 08:48   좋아요 0 | URL
이 책... 마음에 들어하시리라..^^ 더욱 강권하는 단발님에 힘입어 더욱 열일 아니 열쓰하는 비연이 되기로 ㅋㅋㅋ

카스피 2020-01-09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서재의 달인 등극 축하드리며 새해복많이 받으셔요^^

비연 2020-01-09 21:29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저 북플마니아만 된 ㅠㅠ 서재의 달인은 안되었지만 축하 감사해요! 올해는 좀더 활발히 활동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