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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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에서 책을 보내줄 테니 리뷰 쓰실 분 답장 주세요, 했을 때 냉큼 답장을 보낸 것은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우선 책이 공짜래 라는 반가움과 현대문학에서 냈으니 일단 믿고 받아도 되지 않을까 라는 신뢰감 등등이 결합하여, 내 손가락은 내 뇌에서 발생하는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냥 먼저 답장 버튼을 눌렀고 그렇게 내 개인정보를 날림으로써 공짜책+리뷰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책이 왔길래, 살짝 갸우뚱 하는 순간을 지난 후, 아하 하고 뜯어보니 이 책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700 페이지 가량의 두꺼운, 갈색 표지. 첫인상은 상당한 무거움. 그 두께와 그 색깔.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은 후회. 아 이 바쁜 와중에 이걸 어떻게 읽고 리뷰를 쓰겠다는 것이냐 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버렸다. 어쨌든 책을 일단 받았고 책임감 강한 비연은 그날 저녁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라는 이 책을 왜 읽게 되었느냐 를 설명하기 위해 서문을 이리 길게 할애한다. 헥헥.

 

내용도 모르고 받아든 책은, 러시아 이야기였다. 1922년의 어느 법정. 러시아의 전통적인 귀족, 경마 클럽 회원이자 차르의 자문역인 분의 대자인, 니즈니노브고로드의 로스토프 가문의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이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라는 시로 인해, 메트로폴 호텔에 감금되는 형을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 당신은 당신이 그리도 좋아하는 그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오. 하지만 절대 착각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이 한 걸음이라도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총살될 테니까." 를 언도받는다는 것. 그러니까 일종의 가택 연금. 로스토프 백작은 파리에 있었고 그냥 그렇게 망명을 해도 되었을 것을 혁명 이후 러시아로 다시 돌아와 이런 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로스토프 백작이 메트로폴 호텔에 구금된 약 30 여년간의 이야기가 이 책의 주된 줄거리이다.

 

이런. 호텔 안에서만 뺑뺑 도는 이야기라니. 이를 어쩌나. 그 이야기가 700 페이지라니. 라는 약간의 좌절감이 엄습하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이 저자는 어떻게 700 페이지를 호텔 안에서의 이야기로 다 메꾸려고 하는 것이지? 라는 의아함과 함께. 하지만, 먼저 고백하건데 이 책은, 그러니까 로스토프 백작의 30년 호텔 구금기인 이 책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그 어느 책보다 재미있고 그 어느 책보다 진지하며 그 어느 책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백작은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이 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 궁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p52)" 그렇게 해서 백작은, 러시아의 마지막 르네상스적 인간에 속하는, 시와 예술과 문화에 정통하고 음악과 와인과 음식에 대한 조예가 깊으며 인간에 대한 이해와 예의가 몸에 깊숙이 밴 로스토프 백작은 호텔에서의 나름의 삶을 꾸리게 된다.

 

백작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기를 맞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9살배기 여자아이인 니나였다. 우연히 이발소에서 멋진 콧수염을 날려 버리게 된 백작이 식당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찰나에 니나가 다가왔다.

 

"그거 어디 갔어요?' 아이가 다짜고짜 물었다.

"뭐 말이니? 뭐가 어디 갔다는 거니?"

아이는 백작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아저씨 콧수염 말이에요."

...(중략)...

"그게 말이다." 백작이 대답했다. "여름을 보내려고 제비처럼 다른 곳으로 날아갔단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아이들이 모방하는 것을 좋아할 거라는 생각에서 한 손을 파닥이며 탁자에서 공중으로 움직여 제비가 날아가는 흉내를 냈다. (p70)

 

이렇게 시작된 니나와의 우정은, 그저 겉으로 들어난 호텔에 익숙했던 백작에게 호텔의 뒷면 구석구석을 찾아볼 수 있게 하는 계기를 주었고 수선실의 마리나를 알게 되었다. 함께 여러 장면들을 엿보고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고... 호텔에서 옛 친구인 미시카를 만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고 호텔의 많은 사람들과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 전설적인 식당 보야르스키의 에밀과 안드레이와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백작은 백작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도 있는 이 곳에서 웨이터 주임을 하겠다고 요청하게 된다. 그 전 1926년 6월 22일, 백작은 호텔의 처마 위에 올라 일생을 마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간혹 그 곳에서 함께 하던 늙은 잡역부가 건네준, 고향의 맛이 감도는 꿀을 음미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게 되기도 했다. 고향. 니즈니노브고로드. 이 곳은 백작에게 일생을 통해 버팀목이 되어준 곳임이 틀림없다.

 

호텔 안에서도 사랑은 있어서 여배우와의 밀회도 있었고 러시아의 유력 인사에게 개인 교습을 하기도 하고 미국인들과 친분을 쌓기도 하면서, 백작은 나름의 긍정적인 성격과 기품있는 태도와 그러면서도 잃지 않고 유지되던 유머러스함으로 삶의 지평을 넓혀갔다. 격조높은 집안에서 무엇 하나 부러운 것 없이 성장한 백작이, 어쩌면 그 호텔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수도 있고 자기 혼자 만의 세계에 갇혀서 우울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백작은 모두를 합리적이고 겸허하게 대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했으며 어떤 일도 하챦게 여기지 않는, 정말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귀족의 기품을 가진 자로서 수많은 사람들과 쉼없는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주며 자신의 인생도 즐기는 모습을 유지하였다.

 

무엇보다 불쑥 니나가 맡기고 간 딸 소피야는 백작의 인생에서 큰 기쁨이 되었다. 난생 처음 여자아이의 양육을 맡게 된 백작의 허둥거림과 여러 생각들은 읽는 이에게 웃음을 띠게 하는 면이 있다. 영민하고 똑부러지고 세상에 대해 외향적인 태도를 가졌던 니나와는 달리, 소피아는 얌전하고 차분하고 성실하면서도 빛나는 아이였다. 그렇게 소피야는 로스토프 백작의 딸이 되어갔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딸. 책의 후반부에서 소피야에게 보여주는 백작의 사랑은 진실되고 놀라왔다.

 

"사실 그 부탁을 하려고 왔는데... 하지만 당신이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우리의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 건 소피아예요, 방금 전 당신과 소피야 둘이 있는 걸 보면서, 당신의 본능적인 자상함을 보면서, 소피아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금새 편안함을 느끼는 걸 보면서, 소피야에게 필요한 것은, 특히 지금과 같은 시기에 그 애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엄마의 손길이라는 확신이 갑자기 들었어요. 엄마의 방식. 엄마의..."

그때 마리나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알렉산더 일리치. 저한테 그걸 요구하진 마세요. 그건 백작님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예요." (p393-394)

 

미시카가 오랜 수형 생활을 마치고 백작을 다시 찾았을 때, 백작의 호텔 친구들의 따뜻함과 잘 지내고 있는 백작의 모습을 바라보며 남긴 말은, 백작이 수십 년간 호텔에 갇혀 있었음에도 결코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자기도 반가왔다며 작별 인사를 마친 미시카는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더니, 잠시 멈춰 섰다. 분주히 돌아가는 풍성한 주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신사적인 안드레이와 가슴 따뜻한 에밀의 얼굴을 바라본 다음 백작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 옛날 너에게 평생 메트로폴을 떠날 수 없다는 연금형이 선고되었을 때, 네가 러시아 최고의 행운아가 되리라는 걸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가 말했다. (p460)

 

책의 말미. 1954년. 백작의 활약은 읽는 내내 통쾌했고 멋졌다. 항상 시간을 흐르는 대로 두고 일초 일분에 연연해하지 않던 백작은, 정말로 일생일대의 행동을 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자 누구보다 치밀하고 구체적인 계획 하에 매분 매초를 세어가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눈치챌 수 없도록. 그렇게 해서 이루어낸 일은... 아 읽어봐야 한다. 주먹을 쥐고 초조해서 나 혼자 침대 위에 벌떡 일어나 한자 한자 읽어내려갔던 그 순간을 함께 느껴봐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마음에 아릿함이 스미는 그 장면.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될 것 같다.

 

책 속에서는 백작의 생활 곳곳에서 몽테뉴와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이야기하고, 미국과 프랑스와 영국과 러시아를 이야기한다. 호텔 안의 늘 비슷한 생활이 있을 지라도 세상은 변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특히나 그 당시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고 그 영향은 호텔에도 고스란히 미쳤다. 그런 변화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배웠던, 익혔던 귀족으로서의 자긍심과 기품을 유지하는 백작의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카사블랑카>. 이 영화의 비유는 너무나 적절하여 다시한번 봐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험프리 보가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가 그랬던가.. 라는 기억에 자리하지 않은 그 잠깐의 장면을 보기 위해서 정말 <카사블랑카>를 조만간 보게 될 듯 싶다.

 

몰랐는데, 오바마 前 미국 대통령이 2017년에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 11권 목록 중에 이 책이 들어 있단다. 저자인 에이모 토울스의 책은 우리나라에 <우아한 연인>으로 번역되어 나온 게 있고, 이 분은 한 권 쓰는 데 4년씩을 잡고 있다니 우선 <우아한 연인>부터 사서 읽고 다음 책을 목빼고 기다릴 예정이다. 최근에 읽은 소설 가운데, 이 <모스크바의 신사>는 최고의 소설이었다. 아마 내게도 올해의 가장 감명 깊었던 책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될 확률이 매우 높은. 강추한다.

 

* 앞에도 썼지만, 이 리뷰는 현대문학에서 책을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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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8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8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18-07-08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왕~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비연 2018-07-08 14:02   좋아요 1 | URL
꼭꼭 읽어보시라고 추천요~^^

stella.K 2018-07-08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니 이렇게 좋아하시면서
저한텐 신청 거절하길 잘했다고 하시면 반칙 아닙니까?ㅋ

근데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읽었으면 써야죠.
돈 주고 샀으면 적어도 리뷰를 써야한다는 의무는 지지 않아도 되고,
쓴다고 해도 아무 때나 쓸 수 있잖아요.
근데 기한을 정하고 그 안에 써야한다면
예전에 이렇게라도 해서 글 쓰는 습관을 들여야지 했는데
지금은 반대가 됐어요.
결국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겠죠.
전 이 책 중고샵에 혹시 나오면 그때 한번 읽어볼까 해요.ㅋ

비연 2018-07-08 18:57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께 잘했다고 했던 게 이제야 기억이 나네요. 이런^^;;;;
스텔라님도 읽고 나면 저처럼 좋아하실 것 같은데..
사실 리뷰 쓴 지 한참만이에요. 의무로 쓰겠다고 생각하니 금새 읽고 바로 쓰게 되네요.
공짜로 받지 않아도 읽으면 쓰고 그래야 하는데 말이죠ㅜ (반성중)

레삭매냐 2018-07-08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구 달리다가 로맹 가리의 다른 소설 때문에
잠시 유보되었습니다.

빨랑 <별을 먹는 사람들>부터 먹고 나서,
아니 읽고 나서 재도전해야겠습니다.

비연 2018-07-08 21:24   좋아요 0 | URL
아. 꼭 읽어보시길. 꼭 재도전!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허풍선이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2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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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가 거듭되어도 전혀 실망이 되지 않는 해미시 멕베스 시리즈. 갈수록 내용이 알차지고 짜임새도 좋아져서 읽는 즐거움이 상당하다. 특히, 해미시 멕베스의 캐릭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유쾌한 유형으로 그 매력은 늘 빛난다. 이번 내용도 흥미진진하고 매우 재미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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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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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이론이 낡은 이론을 무효화하거나 대체하는 게 아니라, 낡은 개념들을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재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고 역설했다. 그는 유명한 직유법으로 이 개념을 확장했다.

 

비유법을 사용하여 설명해보겠다. 새로운 이론을 만든다는 것은 낡은 헛간을 부수고 그 자리에 마천루를 세우는 것과 다르며, 그보다는 산을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위로 올라감에 따라 시야가 새롭고 넓어지며, 출발점과 다채로운 환경 사이에서 예기치 않았던 관련성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은 변화무쌍한 산행길에서 장애물을 통과하여 마침내 널따란 시야를 확보한다. 그러나 출발점은 아직 존재하며, 크기가 아무리 작아 보이고 시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더라도 여전히 시야에 들어온다. (p226)

 

 

올리버 색스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이 에세이는, 무엇보다 스쳐 지나간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돋보였다. 많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시대에 맞지 않아서 당시의 과학자들의 생각과 달라서 등등의 이유로 그냥 묻혀 있다가 오랜 세월 후에 다시금 대두되곤 한다. 어쩌면 여건이 맞아떨어져서 또 어쩌면 몇몇의 천재들이 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의 위 말처럼 이 모든 것이 '발전'이라는 것의 진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발견되고 어쩌면 그 가는 길 중에 외면당하고 회피되고 거부당하기도 하면서 직선으로 쭉 가는 게 아니라 지그재그로 움직여가면서 어느 순간에 다시금 길을 찾아 그 출발점을 확인하게 되는 것. 그것은 누구 하나의 힘이 아니며 역사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온 토대 위에 누군가 벽돌 하나 더 올림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일 게다. 뉴턴마저도 이전 세대를 부정하고 자신의 이론이 독창적임을 강조했다고는 하지만, 누구든 "거인의 어깨"를 빌리지 않고는 발전이라는 것, 새로움이라는 것을 일구어내기 힘들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올리버 색스의 글을 읽으면서,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 노익장으로도 끊임없이 이런 시선을 가질 수 있고 이런 글을 써낼 수 있었던 그가 평생 지녔던 것은 무엇일까. 한편으론 그가 가졌던 그 많은 지식들, 그 치밀한 시야들이 이젠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글로써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으니, 나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고 그도 누군가에게는 '거인'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기억은 고정되고 활기 없고 간편적인 수많은 흔적들을 고스란히 재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반응이나 경험들을 바라보는 전반적 태도‘와 ‘이미지나 언어의 형태로 저장된 세부 사항‘을 기초로 하여 상상력이 가미되어 구성되거나 재구성된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암기와 반복의 경우에도 기억이 늘 정확한 것은아니다. 따라서 기억의 정확성을 절대시할 필요는 없다. (p109)

인간의 기억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취약하며 불완전하지만,굉장히 유연하고 창의적이다. 출처에 대한 혼동과 무차별성은 역설적으로 큰 힘을 발휘한다. 어디 한번 생각해보라! 만약 모든 지식에 출처가 표시된 꼬리표가 붙어 있다면, 우리는 종종 엄청난 양의 부적절한 정보에 압도당할 것이다. 출처에 무관심한 우리의 뇌는 ‘우리가 읽고 들은 것‘과 ‘타인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쓰고 그린 것‘을 통합하여, 마치 1차기억인 것처럼 강렬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고,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예술, 과학, 종교가 포함된 문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동정신common mind에 참여하고 기여함으로써 보편적인 지식연방commonwealth of knowledge을 구성하게 된다. 기억은 개인의 경험뿐만이 아니라 많은 개인들 간의 교류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34)

멀린 도널드Merlin Donald는 <현대 정신의 기원Origins of the Modern Mind>에서, 모방문화mimetic culture를 문화와 인지능력 진화의 핵심 단계로 간주한다. 그는 흉내, 모방, 미메시스mimesis를 명확히 구분한다.

첫째, 흉내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 가능한 한 정확한 사본duplicate을 만들기 위한 시도다. 따라서 누군가의 얼굴 표정을 정확히 재현하거나 앵무새가 다른 새의 소리를 정확히 모사하는 것은 흉내에 해당한다. 둘째, 모방도 대상을 재현하지만, 똑같이 따라 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부모의 행동을 따라 하는 자녀들은 모방을 하는 것이지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니다. 셋째, 미메시스는 모방에 표상representation이라는 차원을 첨가한다. 그리하여 흉내와 모방을 통합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며, 하나의 사건이나 관계를 재현하는 동시에 표상한다. (p148)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타인이나 주변의 문화로부터 아이디어를 차용한다. 아이디어는 늘 공중에 떠돌아다니며, 우리는 종종 의식하지 않고 오늘날 유행하는 구절과 언어들을 차용한다. 우리는 언어를 발견하고 그것을 빌려 와, 각자 개별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해석한다. 우리는 언어를 차용하는 것이지, 발명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남의 것을 차용하거나 모방하거나 베끼거나 영향받는가‘가 아니라, ‘차용하거나 모방하거나 베낀 것을 갖고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다. 다시 말해서, ‘남의 것을 완전히 소화시켜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자기 자신의 경험, 생각, 느낌, 입장과 혼합하여 얼마나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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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5-27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수고했어용, 토닥토닥^^*

비연 2018-05-27 21:32   좋아요 0 | URL
^_______^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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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고 재미있는 책이다. 열두살 아이가 우연히 다섯살 동네 아이를 죽이게 되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심리적 묘사와 마을의 변화, 그리고 십이년이 지나 다시 찾아온 위기와 마지막의 반전까지.. 숨쉴틈 없는 전개를 보이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흡인력이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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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서점 국내 미출간 소설 3
크리스토퍼 몰리 지음, 박선경 옮김 / 현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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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이고 헌책방 이야기이고, 무엇보다 책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미프린씨 이야기라 좋았고 책에 얽힌 음모가 밝혀지기까지의 과정이 흥미진진했다. 다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서 집중이 안 되고 자꾸 책을 덮고 싶게 만든다는 게 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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