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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상처를 말하다 -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뒷모습
심상용 지음 / 시공아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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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저자와 논쟁하고 또 논쟁했다. 그 논쟁은 초반보다는 후반으로 갈수록 좀 더 길고 복잡해졌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10명이다.

 

책 뒷면에 있는 설명을 그대로 옮겨 적자면,

 

로댕의 그늘에 가려져 결국 정신요양원에서 생을 마친 카미유 클로델

천상으로 가는 여정을 세 발의 탄환으로 앞당긴 반 고흐

아들과 손자의 전사 통지서를 손에 쥐어야 했던 케테 콜비츠

소아마비, 교통사고, 서른두 번의 수술, 바람둥이 남편에 시달린 프리다 칼로

조국의 냉대와 지독한 외로움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권진규

세계 어디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유목민으로 살다 간 백남준

세 아들과의 원치 않는 이별로 평생 이방인으로 살았던 이성자

불안감과 신경쇠약증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은 마크 로스코

가난하고 못생기고 초라한 진짜 자신을 숨기기에 바빴던 앤디 워홀

낙서화로 스타가 되었지만 결국 거리의 부랑아로 세상을 떠난 바스키아

 

돌이켜보니 논쟁이 점점 치열해지기 시작한 시점은 딱 절반을 넘어서서 새로운 절반이 시작되는 순서였던 백남준 편부터였던 것 같다. 세간의 평들이 저자의 관점처럼 그저 새롭다는 측면에만 너무 몰두해서 많은 부분 과대포장 돼있고 왜곡돼 있으며 그로 인해 또 많은 부분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은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비교적 명확하다. 따라서 심상용의 많은 따끔한 지적들은 분명 다소 무분별하고 무질서하게 문화가 잉태되고 소비되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분명 큰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그런 전복적인 관점들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이 적지 않았다. 거기다 그런 자신의 관점들을 상당히 단호하게, 마치 비겁한 자본주의자들과 그들에게 속아넘어간 무지한 대중들을 꾸짖는 듯해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저자가 굉장히 일관된 기준을 갖고 저술을 했기에 나 역시 크게 2가지 부분에서 일관된 반론이 생겼는데, 첫 번째는 백남준이 선두에 있는 현대미술의 특징, 그러니까 기존의 가치관이나 대중의 기대를 전복시키는 것 자체로 충격을 주고, 예술을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었던 많은 흥미로운 퍼포먼스들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본조차 연마하지 않고 특정한 사물에 그럴 듯한 개념만 부여한다고 그것이 훌륭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데에는 예술에 대한 특권의식이나 권위의식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읽혔다.

 

물론, 어떤 분야에서든지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그 고민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한 기술을 숙련시키는 사람은 존경 받고 인정 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말 그대로 ‘Pop’ 하고 튀어나온 생각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치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무엇보다 소위 개념미술이나 ‘Pop 아트라는 것은 그 속성 상 웬만큼 대단한 개념이 부여되지 않거나, 웬만큼 Pop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평론가에게든, 대중에게든, 아무런 감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그 후에 다른 사람이 비슷하게 해서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제일 처음 했다면, ~ 저런 것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던져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때에는 변기를 떼어다 놓고 그것을 이라 이름 붙이는 것만으로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더러운 똥을 가득 담은 깡통을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파는 식의 파격들이 시도되면서 이것이 예술계에서는 격렬한 논쟁을 낳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 비슷한 행동들이나 개념부여만으로는 더 이상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다.

 

그리고 마르셀 뒤샹이나 피에르 만조니의 경우에는, 심상용 씨와 비슷한 관점에서 현대예술과 현대예술에 가치를 인위적으로 부여하는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소위 예술을 좀 한다/안다 자부하며 그것을 뭔가 특권처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함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계속해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앤디 워홀과 역시 백남준 편에서 두드러지게 그가 주장했던 생각에 관한 것인데, 그 인물이 본래 타고난 성정이나 자신이 선택할 수 없게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져있던 상황에 대한 도피, 혹은 태어났을 때부터 그러함을 너무 대단한 것으로 추앙할 필요가 없다며 까발려 놓은 앤디 워홀과 백남준의 성장배경(?)에 관한 얘기들이 참으로 보기 거북했다.

 

앤디 워홀의 본명이 원래는 워홀라라는 촌스러운 이름이었으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그것으로부터 도망가고자 예술을 이용했다는 일관된 지적, 그래서 우리는 앤디 워홀의 작품을 통해서 사실은 워홀라였던 워홀의 껍데기만을 보고 있다는 식의 해석은 좀 그랬다.

 

물론,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면 그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에 불만을 품고 숨기고 싶어했다고 해서 단순히 그것을 비난할 순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앤디 워홀이 본래의 자아를 벗어 던지고 싶어서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 역시도 앤디 워홀이 대단한 지략가였으며 현실에 밝아 예술가라기보다는 사업가로서의 면모가 많이 두드러졌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스러운 워홀라가 사실은 앤디 워홀의 진짜 모습이라는 시각은 불쾌했다.

 

지금 글로는 모두 정리하기 힘든 저자와의 대화 혹은 나 혼자만의 상상 토론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데는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 리뷰를 쓰기까지도 그랬다.

 

저자의 관점들은 때로 나에게 새로운 정보를 줬고 일침을 가했으며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반박하고 싶게 만들었다. 위에서는 주로 반박하고 싶었던 부분에 대해서 썼지만 실제로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나 자신까지도 돌아보게 만드는 고마운 부분이 더욱 많았다는 점은 꼭 밝혀두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줄을 많이 쳤고 그것을 모두 옮겨 적었다. 밑줄의 의미는 놀라움, 새로운 정보, 공감, 깨달음과 함께 반발심이 생겨서 나중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은 것들을 다 포함한다.

 

카미유는 연이은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교회와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었고, (연인으로부터) 배신당했고, (가족에 의해) 유기되었으며, (작가로서는) 과소평가되었고, (정신질환자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었다.

P.50

 

평생 가난한 이웃을 보살피며 살고자 했던 그의 계획은 오래가지 않아 큰 시련에 봉착했다. 사태는 지역의 위원회가 반 고흐의 설교의 웅변술이 목사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그에게 복음 사역자의 활동을 중단할 것을 통보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P.65

 

고통을 받을 때까지는 누구도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기 어려운 법칙이지만, 최고의 법칙이다." (알프레드 드 뮈세 Alfred de Musset)

P.78

 

이는 고스란히 콜비츠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1914 10, 그녀는 막내아들 페터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사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1942년에는 히틀러가 시작한 전쟁에서 사랑하는 손자가 사망했다.

P.94

 

예술이 자의식의 과잉에서 비롯되는 사적 탐닉, 욕망과 상실을 둘러싼 저급한 영성이 벌이는 모노드라마가 되는 것은 일찍이 예견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기몰이를 하는 주제가 자기도취, 자조, 자기 상처 핥기 같은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지는 관계가 무너졌을 때 가장 우선적인 희생자는 바로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P.103

 

그녀에게 그리기는 비워 내고 대상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마음에 거하는 폭군의 흔적들, 곧 자아의 핵심을 향해 짖어 대는 개들을 길들이고, 노예들에게 순종할 것을 명하는 방법이었다.

P.125

 

트라우마는 비가역적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상처의 인식도 치유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제아무리 첨예한 인식도 그 자체로 치유를 대신할 수는 없다. 고통과 깊게 팬 상처에 필요한 것은 치유이지, 인식이 아니다.

P.134

 

만연한 실존주의 맥락 안에서는 고작 출구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최대 용기다. 각성된 자아로 부조리를 견뎌내는 게 유일한 최선이다.

P.134

 

결국 인생이란 출구도 해결책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우연이 유일한 주관자일뿐인 '더러운 여행dirty trip'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P.134

 

권진규가 유독 그랬다. 유독 실존의 추위를 타고, 고통을 감지하고, 더 많이 앓고 아파했다. 희망을 가지기에는 너무나 예민한 사람이었던 것일까.

P.170

 

노예처럼 매매되고 소유되고 세금이 부과되는, 부르주아 계급의 불명예스러운 재산 목록 중 일부로 환원되기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부응해 다른 사물들과 동등하게 변화하소 소멸되고 사라지는 덧없는 예술을 훨씬 더 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P.182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백남준은 관례를 파괴하거나 해체하는 데 동참했던 것 이상으로, 파괴나 해체의 관례화된 흐름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P.185

 

이에 대해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나는 6•25 때 북한군이 우리 집에 들어와 개를 모조리 잡아먹고 달아난 뒤부터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벗어났다."

P.188

 

알프레드 슈츠Alfred Schutz가 말하는 이방인은 '새로 온 사람new comer', 즉 고국을 떠나온 사람으로서 "장차 문화적 잡종이나 주변인으로 계속 남을지 아니면, 자신의 특성과 이방인의 어려움을 다 떨치고 완전히 동화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P.193

 

'백남준 예찬'의 이면에는 '이번엔 우리의 것'이라는 식의 천한 민족주의적 욕망이 혼합되어 있다. 그의 명성을 교두보 삼아 한국 미술의 우수성을 거저 입증하려 드는 꿈틀거리는 욕망 말이다.

P.203

 

그래서 더욱 그림에 매달렸어요. 내가 붓질 한 번 더하는 것이 아이들 옷 입혀 학교 보내는 것이고, 밥 한 술 떠먹이는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죠.

P.214

 

악취가 진동하는 문명의 우물을 퍼 마시는 것 외에는 다른 여지를 찾기 어려운 시대의 난감한 보고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와 판단은 어리석게도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허우적거림과 그것에서 빠져 나오려는 발버둥을 혼돈한다.

P.223

 

어떤 이들은 그들의 작품만 못하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작품보다 낫다. 그런데 찰스 윌리엄스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의 책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P.229

 

그 믿음을 버리기로 작정한 시대의 허공으로 이내 산화되어 버리고 말지라도, 이성자는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예술이 존재의 왜소함을 넘어서는 유력한 길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P.230

 

마크 로스코 자신이 적대시하던 속성이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확실해짐으로써, 자신에 집중하는 것이 회피해야 할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자신과의 대면은 곧 적과 마주하는 것이므로, 그 고조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회피하는 '방어적인 주의 산만' 외에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P.250

 

바스키아의 낙서 형식의 특성은 무정부적인 태도로부터 연유한다. 낙서는 문명과 사회에 대한 반동과 전복의 상징적 언어다. 뉴욕이 유럽의 전위미술을 탐미하는 동안 표현의 무대라고는 음습한 뒷골목과 기차역밖에 가진 것이 없었던 소외 계층의 반항아들에게서 자생된 언어였다. 그 언어는 당연히 제도권 예술의 전통적 표현을 거부한다. 그들의 공간에서 진지함과 숙련된 기술은 실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거칠고 찰나적인 실현만이 가능하며, 언어는 화풀이 수단이 될 때 유효하다. P.307

 

미켈란젤로나 렘브란트의 성취는 반평생에 가까운 학습과 숙련의 결과지만, 요즘에는 어느 날 극적으로 전향을 시도한 패션 모델이나 스포츠 선수가 작가가 된다. 이 시대의 언어는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가치들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P.312

 

분별의 정신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질서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정신적 요인들을 모호한 뒤섞임 가운데서 구분해내려는 진지한 노력이다. P.313

 

진리는 속삭이는 반면, 거짓이 큰소리로 고함을 쳐대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P.318

 

사람들은 내면에서 치고 올라오는 이 가공할 유혹, 곧 자신은 결코 약자가 아니며 권좌를 차지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사력을 다해 매달림으로써 패배자가 되고 만다.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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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 다큐멘터리 만화 시즌 1 다큐멘터리 만화 1
최규석.최호철.이경석.박인하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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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 원미구 길주로 1번지에는 영상문화단지가 있다. 그 안에 있던 야인시대 세트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행사 공간으로 쓰였던 판타스틱 스튜디오는 바로 내일, 3 1일 오후 2시에 허물어진다.

 

건물이 너무 낡아 위험하기 때문에 판타스틱 스튜디오를 허물고 그 자리에는 캠핑장 등 다른 놀이문화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바로 그 영상문화단지 안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 건물이 있다. 만화영상진흥원 건물은 영화상영관, 3D영상 상영관, 만화책 도서관 등이 있는 만화박물관 1동과 만화영상비즈니스센터 1동으로 구성된다.

 

만화영상비즈니스센터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 사무국과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Pisaf) 사무국이 입주해 있고, 다수의 만화가들이 입주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먼저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바로 이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휴머니스트의 기획으로 탄생한 다큐멘터리 만화잡지 창간호이기 때문이다.

 

이 건물에서 일하면서도 알라딘 신간평가단에서 책을 받고서야 알게 됐다. 아마 이 책 속 만화를 그린 작가 분 중 일부는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몇 번 정도는 마주친 사람일 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니 이상하다.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는, 제목을 너무 쉽게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식상하다고. 하지만 만화를 보면서 이 책에 가장 적확한 제목이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냈다. 더 참신하고 새로운 제목은 이 책의 진솔하고 간결한 내용을 생각하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웠을 것 같다.

 

첫 번째 만화부터 울림이 컸다. 다큐멘터리 만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난해 가을 있었던 삼화고속 파업을 취재해 그린 만화다. 사측에서는 이것이 일방적으로 노동자만의 목소리를 담은 편파적인 시각을 담았다고 할 것 같다. 아마도 분명히.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만화를 통해서라도 전해졌어야 했다.

 

 

(일하다 사고가 나서 경찰서에 갔는데 12시간이나 혼자 기다리셨을 걸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나 역시 삼화고속 파업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있는 서울에서 부천을 출퇴근하는 시민으로서, 그저 파업이 빨리 끝나기만 바랐지 내막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게 사실이니까. 만화를 통해 파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버스 기사 분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미안하고 약간은 분한 마음이 너무 크게 생겼다.

 

그럼에도 작가는 만화의 미덕을 그대로 살려 이것을 약간의 따뜻한 유머를 곁들여 너무 진지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게 그려냈다. 좋았고, 고마웠다.

 

첫 번째 섹션은 이렇게 화와 취재, 약간의 각색을 거친 무거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무게가 결코 부담스럽진 않다. 그리고 다른 섹션으로 넘어가면, 4컷 짜리 짧은 만화나 가볍게 웃고 즐길 수 있는 만화들도 많다. 이 모든 만화들의 미덕은 말 그대로 사람 사는 이야기’, 평범한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창간호 잡지는 만화만 담고 있지도 않다. 길지 않지만 전 세계 다큐멘터리 만화의 역사와 맥락 등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다른 이야기들도 함께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꼭 관심을 가져야만 할 세계사 속의 소수약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만화가 많아서 만화를 통해 보게 된다면 참 좋겠다 싶다.

 

다큐멘터리 만화의 효시 격으로 설명돼 있는 아트 슈피겔만의 [] 역시 굉장히 좋은 책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경험한 상처 때문에 자살해 버린 어머니와 살아 남아 두 번째 아내를 맞은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은 과거 이야기, 그리고 작가 자신이 직접 관찰하고 있는 아버지의 현재 모습을 2권의 단행본 만화에 담아낸 것인데, 객관화와 거리 두기를 위해 사람들은 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나치는 쥐의 천적인 고양이로 묘사했다.

 

아우수비츠의 희생자라고 해서 아버지를 무조건 영웅화하지도 않되, 아버지의 비합리적이거나 모순적인 모습도 유머를 통해 정겹게 고발(?)한다. 참 좋은 책이다.

 

 

얼핏 생각하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와 만화라는 장르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충분히 문학성과 예술성을 갖춘 훌륭한 만화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웃음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늘 비주류로 취급돼오고 불량하게 여겨져(실제로 비교적 모범생이었던 나는 국민학생 시절 만화는 나쁜 것이라는 교육으로 인해 그 재미있는 만화를 보지 않았다) 온 만화야말로 소외된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가장 좋은 방식이다.

 

이게 단행본이 아니라 잡지라고 하니, 다음 호를 기다린다. 앞으로도 계속 사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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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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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삿날 밤이면 어른들은 죽은 조상들이 들어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모든 문을 열어놓았다. 나는 늘 제삿날이 아닌 밤에는 그 사람들이 어디서 밥을 먹는지 궁금했다.-14 쪽

나 같은 아이들만 귀를 쫑긋 세우고 시에 귀를 기울였을 뿐, 다른 어른들은 대개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겪고 고통에 찬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다지 관심들이 없었다. 아마 할아버지 또래의 다른 남자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본다 하더라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34쪽

그것이 수많은 키스의 종류 중 프렌치키스라고 하는 것이며...... (중략) 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46쪽

동지애는 여자들의 여성성을 무시하고 그들을 남성처럼 바라본다는 것을 뜻했다. 그렁 분위기 속에서 연애감정은 어느 정고 근친상간이나 동성애의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50쪽

말하자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술이 취해 불콰해진 얼굴로 여럿이 몰려가 창녀와 하룻밤 자는 일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었지만, 학생회 내부에서 연애하다가 생기는 성욕은 개인적인 것이었다.-53쪽

사랑은 그 모든 것이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까닭은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었다.-68쪽

마치 네가 나를 만나러 올 때면 늘 그렇듯이, 번개처럼. 나를 만나러 올 때는 항상 그렇게 달려와, 알았지? 그때는 정말 사랑받는 느낌이거든.-99쪽

우리는 그 누구라도 그 어느 곳에서든 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죽음보다도 더 우연적인 것처럼 보였다.-121쪽

"너와 지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어."라고 쓰고 나면 더이상 쓸 말이 없었다.-132쪽

하지만 며칠 두고 보니 공연히 문상하러 왔다가 자기 일 때문에 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133쪽

변호사는 대단히 건조한 목소리로 "그것 참 재미난 시구나. 그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느냐?"라고 논평했다. 그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었으므로, 사실 변호사는 아무런 의견도 밝히지 않은 셈이었다.-210쪽

문제는 그게 우연한 폭행이었다는 점이었어요. 폭력에 관한 한 제비뽑기를 하는 사회인 거죠.-329쪽

섭동에 대한 문장도 그때 외웠다. 별들의 집단 내에서 각 별들은 중심 주위를 돌게 되는데, 이런 운동을 일으키는 주된 힘은 집단 전체의 중력이다. 그러나 별들은 가까이 지나는 다른 별들로부터 계속 인력을 받는다. 이때 두 천체가 서로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충돌이라 하고, 진행경로를 바꾸면서 서로 비켜가는 경우를 조우라고 한다. 조우가 일어날 때는 섭동을 통해 서로간의 에너지의 주고받음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진행경로와 속도가 변하게 된다. 그게 바로 섭동이다. 천왕성의 경로가 불규칙한 까닭은 그 근처에 있는 다른 행성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353쪽

그때부터 나는 당혹스러운 일 앞에서 당혹스러워 하지 않는 자들을 불신하게 됐다.-362쪽

"아니, 체온에 관한 문제. 1927년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발터 벤야민은 [모스크바]라는 글을 쓰는데, 거기 보면 베를린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없다는 것, 보도가 귀족적으로 넓고 귀족적으로 황량하다는 것이라고 적혀 있거든. 모스크바는 베를린보다는 훨씬 더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는데, 그건 혹독한 추위 때문이었지. 벤야민은 추위 때문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거든. 일기에 보면 나오지."
"벤야민도 사랑하는 사람이 모스크바에 있었나봐요."
"맞아, 아샤란 라트비아 여자가 있었어."-369쪽

"이런 세상에서 제게 필요한 것은 오직 커다랗고 하얗고 넓은 침대군요. 그렇군요."-372쪽

이제는 누구도 꽃을 꽂지 않는 꽃병-378쪽

"그렇게 하면 그게 내가 살아온 삶이 되는 걸까요?"
지금은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 다음에는 논리적으로.-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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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dmswn7796 2012-02-2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arma님 안녕하세요. 블로그에 올리신 글들 재미있게 때로는 생각에 잠겨 한참을 보았습니다. 알라딘 공모댓글 다신것 보고 저도 무척 좋아하는 문장이라 클릭해 들어와보았는데 이런 세계가 있어 즐거웠어요 ㅋㅋ 오늘 산울림극장가서 karma님 같다하는 분께 살며시 말이라도 걸어보려구요 ㅋㅋ

karma 2012-02-27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네, 안녕하세요 :)
어디에 공모댓글을 달았는지 기억이 희미하네요.
그리고 오늘 산울림극장에서는 저를 만날 수 없으시겠지만 언젠가 뵈어요-
 
[오후 네시의 루브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지음 / 이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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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써도 그런데, 책을 써도 그런가보다. 좋아하는 작가나 좋았던 책에 대한 서평은 더 잘 써진다. 애정과 진심이 담기니까 저절로 잘 쓰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오후 네 시의 루브르] 저자의 친절한 해설 중에서도 단연 고야에 대해 쓴 글이 좋았다. 책에서 저자는 고야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걸 말하지 않았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795년 왕립 아카데미 원장, 1799년 수석 궁정화가의 자리에 오른 고야. 그는 명성과 성공에 집착했지만, 내심 상류층을 비난하고 조롱했다. P.93

 

이중성은 고야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처세술이 능한 인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오래된 신분제도나 역사의 흐름을 홀로 무너뜨릴 수 없었던 한 예술가의 한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P.95

 

꼼꼼한 붓질을 구사하지도 않았기에 그림의 표면을 가까이에 보면, 서로 관계 없는 물감 덩어리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상자가 뒤로 물러날수록 형체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전체적 조화가 이루어지며 인물의 내면적 특성까지 화면에 담겨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P.96

 

프란시스코 고야의 <솔라나 후작부인의 초상>을 소개하며 고야에 대해 쓴 글 중 일부다. 특히 고야의 이중성에 대한 변명에서는 그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잘 드러난다. 나 또한 고야를 위한 저자의 변명에 보태고 싶다.

 

예전부터 예술가들은 대부분 모순된 관념과 가치관을 드러내왔다.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작품이나 공식 석상에서의 태도가 실제 삶의 모습과는 다른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예술가들은 대개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다. 때로는 그 이중성과 자기모순이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거나 철저히 감춰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마도 예술가들은 그러한 양극성의 충돌을 통해 내심 겪게 되는 괴로움을 작품으로 승화 혹은 합리화했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나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쉽게 확신이나 확언이나 확답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마음에 느껴지는 예술가들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하나의 가치관을 확고하게 간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다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 작품이 많지 않고 작품 이외에 대한 것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더욱 매력적인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미치광이들의 배> 중 일부.

 

또한, 물은 단단한 뭍과는 달리 언제 변할지 모르며 통제할 수도 없는 까닭에 비이성적인 상태를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물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은 정결한 영혼이라기보다는 악마적 본능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로 그려졌다. 그런가 하면, 혼자 힘으로 건너기 어려운 물을 건너게 해주는 배는 교회나 운명 공동체를 상징한다. P.107

 

나는 이 해설을 보기 전까진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굉장히 현실사회에 불만이 많고 체제전복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는 보스가 굉장히 도덕적인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나라면, ‘언제 변할지 모르며 통제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진 물을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보스가 사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저자는 그러한 비이성적인 상태를 악마적 본능과 미치광이로 연결시켜 보스의 관점을 말한다.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뒤집는 새로운 시각이다. 신선했다.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의 <금세공 작업실의 성 엘리기우스> 속의) 이 볼록거울은 평면 그림에서 제삼의 공간을 창조하는 반 에이크의 선구적인 기법이었다. 감상자가 이차원 그림을 바라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림 속의 등장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삼차원 공간을 공유하게 해주는 효과이다. 회화의 한계적 공간을 뛰어넘어 개념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캥탱 마시의 <돈놀이꾼과 그의 아내>에서) 열린 뒷문 사이로 보이는 안뜰도 비슷한 구실을 하는 장치로서 이는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미술이 창안해낸 특징적인 공간 구성이다. P.115

 

캥탱 마시의 <돈놀이꾼과 그의 아내>에 대한 설명 중 일부이다. 캥탱 마시의 이 그림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작품들 중 더욱 좋아하는 그림이다. 도박판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과 인물에 대한 묘사가 훌륭했다.

 

[오후 네 시의 루브르]는 무척 부러운 작품이다. 칸트가 매일 오후 4시면 항상 같은 곳을 지나가 사람들이 시계 없이도 시간을 알았듯이, 루브르를 거의 매일같이 내 집처럼 드나들며 작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보아왔기 때문에 나온 책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프랑스가 아닌 한국 땅에서, 매일 오후 10~11시면 잠들기 전에 멋진 작품 서너개씩 감상하고 잠들 수 있게 됐다.

 

 

그림 해설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일부에서 알랭 드 보통의 글을, ‘나도 다 아는 얘기’라고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막상 그렇게 잘 설명해보라면 못하듯이, 그림도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것 같지만 막상 혼자 보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은 소설처럼 단숨에 읽을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한 작품, 한 작품씩 찬찬히 보아야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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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맨스티
최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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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맨스티’가 무슨 말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을 반복할 때의 효력은 안다. ‘오릭맨스티’는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 [앨리의 사랑 만들기(Ally McBeal)]에 나오는 괴짜 변호사 존이 당황할 때마다 내뱉는 ‘포킵시(Poughkeepsie)’ 같은 것. 단어라기보다는 소리이며 일종의 주문이기도 하다.

 

많은 어르신들이 이야기한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고, 그 쉬워 보이는 보통의 삶을 사는 것이 실은 가장 힘들다고 말이다. 개인적인 성향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쪽은 아니지만 어르신들의 말은 정말이다.

 

특히 내 나이가 되면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들과 같은 삶의 궤적에 오르기 위해 고공분투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 결혼에는 때가 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못 만나면 결혼정보회사에라도 가입해야 한다. 결혼은 남들 다 할 때 해야 한다.

- 세상에 별 남자, 별 여자 없다. 결혼은 남들 하듯이 적당히 조건 맞고 적당히 마음 맞는 사람 만나서 결혼하면 된다.

- 결혼 준비에도 기본이 있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해가야 한다. 남들 하는 평수, 남들 하는 만큼의 혼수, 남들이 사는 브랜드.

 

그리고 오릭맨스티의 이름 없는 남녀도 서로 그렇게 만난다. 소개팅으로 만나고, 적당히 연애하다가 적당한 때 결혼해서 그냥 적당한 감정으로 적당하게 산다.

 

최윤의 건조한 문장들은 그들의 삶을 더욱 지루하고 메말라보이게 하지만 막상 그 삶을 살고 보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순간도, 행복한 순간도, 또 진절머리 나게 불행하다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남들 다 하는 소개팅을 통해 남들 다 하는 시기에 결혼을 하고 또 남들 사는 것처럼 살면서 남들 다 한다는 낙태도 하고 바람도 펴보고 예상치 못하게 들어선 아이 때문에 당황도 하지만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라고 무덤덤하게, 혹은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최윤의 문장들은 마치 소설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같다.

 

습관적으로 매춘을 해도 아내는 모르고, 꽤 오랫동안 바람을 피워도 남편은 모른다. 서로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지루하게 지내다보면 가끔은 그것이 행복한 일이 아니어도 뭔가 인생에 새로운 사건 하나 일어났음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듯 사건은 일어난다. 일어날 뿐 아니라, 엄청나게 비극적이고 또 추잡하게 끝이 난다. 사건이 일어나는 지점은 내가 이쯤이겠지, 이때쯤 하나 터지겠지 하는 순간을 두어 번 넘긴 후였다. 그래서 그만큼 어마어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이미 그 전에 곪아 터졌어야 할 고름들이 가득 여물기만 하고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폭발력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평범해 보이는 소망과 욕망은 개개인에게 맞지 않는 무리한 레이스를 유발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크게 이탈하는 엄청난 비극을 낳는다.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남들이 사는 패턴을 자신에게 무리하게 끼워 맞추기 때문에 맞지 않을 수밖에 없고, 행복할 수가 없다.

 

엄청난 ‘비극적’ 사건 속에서 또 한 생명은 ‘극적’으로 구조된다는 점이 다소 식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오릭맨스티’는 결국 극적으로 살아남은 한 생명의 입에서 비로소 구현되는 주문이라 의미가 있다. 일반인의 입에서 발음되는 ‘오릭맨스티’는 결코 이 살아남은 자의 ‘오릭맨스티’와 같을 수가 없다.

 

또 결국 살아남아 자신의 비극적 과거를 두려움 없이 마주하는 순간, 그저 남들처럼 살고자 했던 이름 없는 남녀가 처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찾게 되므로 ‘오릭맨스티’는 진정한 한 인간의 존재를 불러내는 주문이라 볼 수도 있다.

 

조지 오웰은 그의 책 [숨 쉬러 나가다]에서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당신 안의 그 느낌, 서두를 것 없고 두려울 것 없던 그 느낌, 당신이 겪어봐서 말해주지 않아도 알거나 겪어본 적이 없어 알 길이 없는 그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p.152

 

오릭맨스티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릭맨스티는 당신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말해주지 않아도 알거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 알 길이 없는 것. 하지만 알게 된다면 살다가 어느 순간 나지막이 오릭맨스티... 오릭맨스티... 하고 발음해볼 지도 모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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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말솜씨 덕분에 실제 그녀가 받아야 하는 대접보다 한결 나은 대접을 받는다. 그래도 바뀌는 것은 없다. p.8

 

결혼은 잘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값싼 숙소를 찾아 서울의 뒷골목이나 도시 외곽을 헤맸을 것이다. 대강만 계산해도 이 방면에서 결혼을 통해 그들이 가상으로 절약해 벌어들인 금액은 상당하다. p.70

 

"악아, 아가는 언제 만들 거니, 응?" p.73

 

여자는 행복하다. 분유나 기저귀 광고에 등장하는 광고 속의 핵가족처럼 행복하다.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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