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릭맨스티
최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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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맨스티’가 무슨 말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을 반복할 때의 효력은 안다. ‘오릭맨스티’는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 [앨리의 사랑 만들기(Ally McBeal)]에 나오는 괴짜 변호사 존이 당황할 때마다 내뱉는 ‘포킵시(Poughkeepsie)’ 같은 것. 단어라기보다는 소리이며 일종의 주문이기도 하다.

 

많은 어르신들이 이야기한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고, 그 쉬워 보이는 보통의 삶을 사는 것이 실은 가장 힘들다고 말이다. 개인적인 성향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쪽은 아니지만 어르신들의 말은 정말이다.

 

특히 내 나이가 되면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들과 같은 삶의 궤적에 오르기 위해 고공분투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 결혼에는 때가 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못 만나면 결혼정보회사에라도 가입해야 한다. 결혼은 남들 다 할 때 해야 한다.

- 세상에 별 남자, 별 여자 없다. 결혼은 남들 하듯이 적당히 조건 맞고 적당히 마음 맞는 사람 만나서 결혼하면 된다.

- 결혼 준비에도 기본이 있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해가야 한다. 남들 하는 평수, 남들 하는 만큼의 혼수, 남들이 사는 브랜드.

 

그리고 오릭맨스티의 이름 없는 남녀도 서로 그렇게 만난다. 소개팅으로 만나고, 적당히 연애하다가 적당한 때 결혼해서 그냥 적당한 감정으로 적당하게 산다.

 

최윤의 건조한 문장들은 그들의 삶을 더욱 지루하고 메말라보이게 하지만 막상 그 삶을 살고 보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순간도, 행복한 순간도, 또 진절머리 나게 불행하다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남들 다 하는 소개팅을 통해 남들 다 하는 시기에 결혼을 하고 또 남들 사는 것처럼 살면서 남들 다 한다는 낙태도 하고 바람도 펴보고 예상치 못하게 들어선 아이 때문에 당황도 하지만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라고 무덤덤하게, 혹은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최윤의 문장들은 마치 소설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같다.

 

습관적으로 매춘을 해도 아내는 모르고, 꽤 오랫동안 바람을 피워도 남편은 모른다. 서로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지루하게 지내다보면 가끔은 그것이 행복한 일이 아니어도 뭔가 인생에 새로운 사건 하나 일어났음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듯 사건은 일어난다. 일어날 뿐 아니라, 엄청나게 비극적이고 또 추잡하게 끝이 난다. 사건이 일어나는 지점은 내가 이쯤이겠지, 이때쯤 하나 터지겠지 하는 순간을 두어 번 넘긴 후였다. 그래서 그만큼 어마어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이미 그 전에 곪아 터졌어야 할 고름들이 가득 여물기만 하고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폭발력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평범해 보이는 소망과 욕망은 개개인에게 맞지 않는 무리한 레이스를 유발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크게 이탈하는 엄청난 비극을 낳는다.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남들이 사는 패턴을 자신에게 무리하게 끼워 맞추기 때문에 맞지 않을 수밖에 없고, 행복할 수가 없다.

 

엄청난 ‘비극적’ 사건 속에서 또 한 생명은 ‘극적’으로 구조된다는 점이 다소 식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오릭맨스티’는 결국 극적으로 살아남은 한 생명의 입에서 비로소 구현되는 주문이라 의미가 있다. 일반인의 입에서 발음되는 ‘오릭맨스티’는 결코 이 살아남은 자의 ‘오릭맨스티’와 같을 수가 없다.

 

또 결국 살아남아 자신의 비극적 과거를 두려움 없이 마주하는 순간, 그저 남들처럼 살고자 했던 이름 없는 남녀가 처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찾게 되므로 ‘오릭맨스티’는 진정한 한 인간의 존재를 불러내는 주문이라 볼 수도 있다.

 

조지 오웰은 그의 책 [숨 쉬러 나가다]에서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당신 안의 그 느낌, 서두를 것 없고 두려울 것 없던 그 느낌, 당신이 겪어봐서 말해주지 않아도 알거나 겪어본 적이 없어 알 길이 없는 그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p.152

 

오릭맨스티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릭맨스티는 당신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말해주지 않아도 알거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 알 길이 없는 것. 하지만 알게 된다면 살다가 어느 순간 나지막이 오릭맨스티... 오릭맨스티... 하고 발음해볼 지도 모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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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말솜씨 덕분에 실제 그녀가 받아야 하는 대접보다 한결 나은 대접을 받는다. 그래도 바뀌는 것은 없다. p.8

 

결혼은 잘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값싼 숙소를 찾아 서울의 뒷골목이나 도시 외곽을 헤맸을 것이다. 대강만 계산해도 이 방면에서 결혼을 통해 그들이 가상으로 절약해 벌어들인 금액은 상당하다. p.70

 

"악아, 아가는 언제 만들 거니, 응?" p.73

 

여자는 행복하다. 분유나 기저귀 광고에 등장하는 광고 속의 핵가족처럼 행복하다.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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