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적'이라는 것은 어떤 이미지를 연상시킬까. 코코샤넬과 각설탕, 소피 마르소와 바네사 파라디, 마리 앙투와네트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고향인 그곳은 무언가 조금 더 근사하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프랑스에 가본 적도 없고 제2외국어로 잠깐 공부했던 불어의 99%를 망각한 나로서는 큰 감회는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주 달달하고 감각적인 책인 줄만 알았다. 진지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뉴스위크>의 해외 통신원과 <뉴욕 타임스>의 지국장을 지내며 수년 동안 프랑스에서 지낸 저자 일레인의 이야기는 가볍지 않다. 그녀는 프랑스를 무작정 칭송하지도 않고 싸잡아 매도하거나 속단하지도 않는다. '유혹'이라는 키워드로 프랑스적인 것들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프랑스는 다채로운 프리즘으로 재조명되고 진지하게 때로는 더없이 흥미롭게 재해석된다. 에펠탑, 베르사유 궁전, 향수, 정치인들, 란제리, 3성급 셰프, 와인, 심지어 잔 다르크까지 유혹의 엔진이 장착된 채 정교하게 가공된 '갈고닦은 아름다움'과 '쾌락에의 관용'으로 다시금 이야기되고 그 이야기는 더없이 유혹적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다시 이야기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좀 더 색다른 면, 뒤안의 이야기들과 함께 그것들을 더 잘 어루만게 된다. 앎과 깨달음의 즐거움들은 끊임없이 연마된다.
게다가 프랑스는 아이들까지 우아하단다! 태어난 지 4개월만 지나면 엄마의 수면을 더이상 방해하지 않고 공공장소에서도 얌전하고 심지어 코스요리까지 무난하게 소화해 낸다. 그런 엄마들은 금세 날씬한 몸매로 빠르게 직장에 복귀하고 육아를 험난한 여정이나 자신의 커리어의 장애물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 관찰자 역시 윌스트리트저널의 경제 섹션 여기자로 미국인이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면서 엄마가 되고 육아가 되는 과정에서도 프랑스 여자들은 매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과 부담을 받는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것은 프랑스적인 것의 장점이기도 하고 가혹한 사회적 시선이기도 하다. 아이도 온전한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하고 정중한 배려를 하는 그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그리고 절제와 적절한 규제의 사회적 합의를 온건하게 도출해 낸 그 민주주의적 방식에 있어서는 칭찬 받아 마땅하겠지만 프랑스에서는 뚱뚱한 여자나 관리하지 않은 외모, 전업 주부는 설 곳이 없는 곳이다,라는 대단히 경직된 편견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에 대한 또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용인되는 것들보다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 곳들로 느껴졌다.
죽을 때까지 이성한테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양날의 검을 가지고 있다. 유혹의 이데올로기는 젊음과 아름다움, 자기애가 뭉뚱그려져 자칫 인생이나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 쇠락, 노화에 대한 두려움과 저어함을 증폭시킬 수 있다. 또한 그 반대편의 것들에 대한 거부감의 온건한 표현이기도 하다. 온순하고 예의바른 아이들로 가득한 공공장소는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의 또다른 형상화일런 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론은 우아함을 동경하면서 정작 발은 뜨거운 노면을 디디고 사는 지금이 더 다이나믹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저기'가 근사해도 나는 '여기'가 좀 더 좋다. 참, 미국의 여류언론인들이 그려낸 프랑스가 물론 '다'라고 보면 곤란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