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였던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집에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비디오가 눈에 띠었다. 부모님이 외출을 한 틈을 타 큰 기대를 가지고 봤지만 실망했던 기억. 숲의 음산한 분위기. 그리고 실비아 크리스텔의 두툼한 입술의 잔상만 남아 있다.

 

나중에서야 그 원작이 데이비트 허버트 로렌스의 것이며 고전 반열에 올라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채털리 부인은 몽환적인 에로티시즘으로 대변된다.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을 읽고 그가 얼마나 사물이나 현상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작업에서 치밀하고 섬세한 자신만의 재능을 가졌는 지에 알게 되자 그의 대표작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 다시 제대로 다가가고 싶었다. 오해와 곡해만으로 이 광부의 아들이었던, 스승의 아내와 사랑에 빠졌던, 항상 이단아였던 작가를 인식하고 싶지 않았다.

 

 

 

 

 

 

 

 

 

 

 

 

 

 

민음사 판대신 펭귄 클래식을 택하게 된 이유는 도리스 레싱의 서문이 있다는 것과 아무래도 책의 가로 판형이 민음사판보다는 조금 더 넓어 보기 편한 면도 있었다. 다만 펭귄 클래식에서 아쉬운 점은 각주가 아니라 미주라는 점이다. 주가 많은데 일일이 책의 뒷면에서 찾아 봐야 한다는 게 사실 쉽지 않다. 나중에는 다 읽고 주석만 몰아 읽었다.

 

이 글은 과거에 대한 기도이며, 우리로 하여금 계절과 조화롭게 사는 시대, 세월의 커다란 수레바퀴 속에서 조화하며 살아가는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호소하고 있다. 그가 쓴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이 글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마치 어떤 주문처럼 이 글을 따라가게 되고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지 모르는 연약한 이의는 모두 설득당하여 제기할 수 없게 된다.

- 도리스 레싱 <서문> 중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도리스 레싱의 서문은 로렌스의 생애에 대한 개관과 더불어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 대한 의미를 그녀의 명료하고 직설적인 어조로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 로렌스가 이 작품을 죽기 4년 전 썼다는 사실과(그는 페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최종판인 제3판을 가장 최고라 주장했다는 점, 우리가 만나게 되는 작품이 바로 그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또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1차 세계대전 후의 상흔과 인간에 대한 실망, 좌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그 시대적 배경에 주목하는 것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환기도 있다. 어두운 질곡에서 피어오르는 인간애에 대한 기대, 남녀의 진정한 소통이 가지고 오는 환희는 더 남다른 것일 수밖에.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p.51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귀족 계급인 클리퍼드 채털리와 부유한 지식인 계급 출신의 코니의 결혼. 1920년 이 부부는 탄광촌의 굴뚝이 뿜어내는 수증기과 연기의 영향권에 있는 렉비의 대저택으로 돌아온다. 이 이야기가 가지는 기본적인 갈등구조가 암시되는 부분이다. 클리퍼드는 참전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왔고 코니는 그런 남편의 시중을 들며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고사되어 간다. 클리퍼드는 저택 가까이의 탄광촌의 광부들을 사람으로 보기보다 탄광촌의 부속품으로 여기며 자신의 육체적 죽음을 사변적 탁상공론으로 위장하곤 한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했지만 진정 원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가라앉아 있다. 코니가 사냥터지기 멜로즈를 만나 육체적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20세기 초엽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문득 문득 적나라하고 과감하다. 로렌스가 뒤에 덧붙인 말처럼 외설이라는 것은 정신이 육체를 경멸하고 두려워할 때, 그리고 육체가 정신을 증오하고 저항할 때에만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러한 솔직과감한 성에 대한 묘사에 움찔 움찔 놀라는 21세기 독자들은 아직도 그 외설이라는 말에 끄달리는 중인가 보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학창시절 인기를 끌었던 하이틴 로맨스나 삼류 외설물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렌스의 언어로 걸러 올린 인간의 육체에 대한 탐구, 교감에 대한 묘사는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단발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더 근원적인 본능, 실재에 대한 예리한 탐사에서 나온 진실의 핵을 겨냥하고 있다. 귀부인과 사냥터지기의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구획, 계급, 관념에 대한 도전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그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의 교감은 상투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중요한 사람이요. 적어도 내 자신에게는 말이요. 나는 내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소.-p.224

 

사냥터지기 멜로즈는 비굴하지 않다.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를 쓰고, 왈패 같은 전처가 있고 클리퍼드의 손에 좌지우지 되는 하찮은 업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자긍심과 자존감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멜로즈는 로렌스의 하나의 분신 같은 인물이다. 그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사회가 부여하는 신분 상승의 기회, 타협, 물질에의 굴욕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코니와 함께 있을 때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녀를 속박하지 않고 그녀에게 속박되지 않는다. 도무지 아씨와 사랑에 빠진 머슴으로 보이지 않는다. 로렌스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육체 그 자체가 아니라 어딘가에 끄달리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비겁하지 않은 진정한 자아의 표현이다. 이 모든 것을 가로막는 것으로 그는 언어의 위선, 전쟁, 기계화, 사회적 압력 등을 거론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내재화한 인간 자신이 자신을 끊임없이 고문하는 것으로 돌아온다. 에로티시즘을 빌려, 외설이라는 비판에 대항하며 그가 정작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시쳇말로 야한 대목들은 전체의 깊이와 그 진정성 안에 조화롭게 포용된다.

 

"인생이란 언제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꿈 아니면 광란인 듯했다."는 로렌스의 이야기는 잔혹하지만 때로 아름다운 진실에 접근해 있다. 알면서도 또 그러는 것. 그게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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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5-16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전에 한 권짜리로 읽었거든요(출판사가 기억나지 않아요),
마지막에 사냥터지기가 채털리 부인에게 편지를 쓰잖아요. 자신의 성기와 그녀의 성기에 이름을 붙여서요(그 이름도 기억나지 않네요;;). 그 장면도 인상깊었고, 그녀를 둘러싼 부자 남자들은 그녀를 성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한것도 인상깊었어요. 최근에 읽은건 로렌스의 단편이었기 때문인지, 단편이 진짜 끝내준단 생각이 들어요. 창비에서 [패니와 애니]로 나왔던데, 블랑카님, 로렌스의 단편도 도전해보세요. 정말 좋아요. 저는 이제 [아들과 연인]을 읽어봐야겠네요. 단편 읽고 완전 반해서 [아들과 연인]을 사두었거든요. 블랑카님은 [아들과 연인]을 먼저 읽으셨으니 저랑 읽는 순서가 반대네요.

블랑카님이 이렇듯 소설을 읽으시고 감상을 얘기해주시는 게 전 참 좋아요.
:)

blanca 2013-05-16 13:36   좋아요 0 | URL
아, 로렌스의 단편도 좋아요? 꼭 읽어볼게요. 그 <무지개>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아들과 연인> 꼭 읽어보세요. 로렌스의 자서전 같아요. 로렌스의 필력, 그 감성의 결은 정말 남다른 것 같아요. 결코 평범하게 살고 갈 수는 없는 시선, 표현력을 지닌 것 같아요. 개인적인 삶은 파란만장하고 좀 서글픈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