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변한다. 취향도 성격도. 심지어 가치관도. 원래 나에게도 취향이 스릴러, 호러물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십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공수창 감독, 감우성 주연의 <알포인트> 영화를 심야로 보고 일주일 동안 엄마 옆에서 자야 했던 그 일 이후로 모든 호러물을 끊었다. --;; 그 영화가 뭐 그리 무서웠냐,고 반문한다면 글쎄, 유독 그 영화의 다큐멘터리 촬영 기법과 카메라의 시선이 내가 무서워하는 그 지점과 정확히 겹쳤다고랄 수밖에.

 

책도 그렇다. 추리물과 스릴러물은 미야베 미유키 정도만 간신히 읽어내고 되도록 시선을 안 두는 편이다. 본격 장르물이 아니더라도 그런 요소만 가미되면 뭐랄까, 책장 넘어가는 속도는 빠르지만 그 읽고 난 후 잠들기 전의 이런 저런 연상때문에 그리 즐기지 않는다. 겁이 많아서다.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에는 추리물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긴 했지만 그 중심에 놓여 있는 사건 자체가 가지는 응집력 때문인지 대단히 흡인력 있게 읽혔다. 여러 인물과 하나의 사건이 씨실과 날실처럼 치밀하게 직조되어 고도로 치밀하게 무게감 있는 메시지로 응축되고 있었다. 한국소설이 이 정도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하나의 지표를 보여주는 것 같아 소설을 좀처럼 읽지 않는다는 사람들에게도 자신 있게 권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신작을 많이 기다렸다. 신작이 나오자마자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구입했다. 아껴두었다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했으나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었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중심에 놓인 '개', 그리고 그 '개'와 '인간'의 이야기. 그 '개'는 눈덮인 설원을 자유롭게 달리며 때로 인간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큰 개'이다. 그 '개'가 광막한 대지 대신 창살 안의 한정된 공간에 갇혀 사육될 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묘사들을 묵묵히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치열하고 때로 잔인한 '날것'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 같았다. 그러니 소심한 나는 잘 견뎌낼 수가 없다. 다 읽어내지 못한 책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금 부끄럽다. 작가의 발전도 시선의 변화도 온전히 잡아낼 수 없으니 아쉽다. 누군가 다 몰입해서 읽고 하는 이야기에 귀기울이련다.

 

 

 

 

 

일백 페이지 남짓한 얇은 이 책은 아주 청량했다. 지금까지 내가 가본 나라는 딱 두 곳이다. 호주와 일본. 아이를 데리고 간 것은 아이가 네 살 때 북해도. 아, 쉽지 않았다. 7월의 더위 속에서 휴대용 유모차로 끈적끈적한 일본의 여름 안에서 아이와 실랑이하는 일은 얌전한 일본 사람들 속에서 조금 더 남사스러웠다. 이 책 속의 아이들은 이미 사춘기다. 그러니 조금 더 쉬운 것은 사실이다. 사촌남매를 데리고 북유럽의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를 다닌 이야기. 지나친 감상도 딱딱한 가이드도 아닌 그 중간 지점을 잘 포착한 미덕. 언젠가 나도 아이를 데리고 갈 수도 있을 거라는 미망을 품게 하는 이야기.

 

 

 

 

이런 상큼한 가이드 지도도 군데군데 첨부되어 있어 여행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같다. 이 덥고 습한 날, 여행을 꿈꾸는 일은 당연하고 또 너무 먼 일이기도 하다. 어깨선을 넘어버린 이 긴 머리를 귀밑으로 싹둑 잘라버리고 조금 더 시원해지고 조금 더 어려보이기를 꿈꾸는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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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2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는 [7년의 밤]을 재미있게 그래서 빠르게 읽긴 했지만 그 작가의 신작이 기다려진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신작이 나와도 그다지 호감이 가질 않더라고요. 그 때 아마도 구매자평에 '감탄은 있으나 감동은 없다'는 뉘앙스로 썼던것 같아요. 재미있지만 '아 좋구나' 하는 그런 책이 제게는 아니더라고요. 저는 그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무언가가 더 있기를 원하는데, 제가 원하는 게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지금 읽고 있는 책은 70쪽 남짓 읽었는데도 아주 마음에 들어요. 블랑카님 혹시 읽어보셨을까요? 슈테판 츠바이크의 [연민]이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블랑카님도 읽으시면 분명 마음에 들어하실텐데, 혹시라도 안읽어보셨다면 우리 같이 읽어요!!

blanca 2013-06-26 07:03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은 슈테판 츠바이크 책을 읽고 계시군요! 저는 <광기와 우연의 역사> 정도만 맛보았어요. 일단 주문한 책들 먼저 소화하고 뒤따라 갈게요. 작가의 능력이나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취향'이라는 면에서 제가 접근할 수 없는 책들이 있더라고요. 다양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강박인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3-06-2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포인트,는 제가 최고로 치는 한국공포물이에요. 너무나 섬뜩하더라구요. 우리안의 공포감, 그것의 실체를 보여주니 더욱이요. 정유정 신작은 칠년의 밤,보다 더 강한가 보군요. 무장하고 봐야겠어요.^^

blanca 2013-06-26 07:05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당시만 해도 참 획기적인 공포물이었는데. 후속작들은 평가를 못 받았나 보더라고요. 배우들 연기도 좋았고요. 예, 프레이야님의 감상 기다릴게요. 저는 중반까지도 못 읽었어요^^;;

2013-06-26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6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3-06-28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랫동안 님서재에 댓글을 안 남겼네요.
아마 비로그인으로 글은 읽은 듯한데...
정유정, 7년의 밤 읽으며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영화화된다는 애기를 들었어요.
우리지역에 사는 분이라 작가초청하려고 출판사랑 통화했지만 작품구상 들어가면 강연은 안한다고...
작년에 3년도 기다릴 수 있으니 성사시켜 달라했어요.
올 여름과 가을에도 작가초청할 건수가 많아서 다시 알아봐야겠어요.
신작은 다음달 구매리스트에 넣어둘래요.^^

아~ 나는 혼자서 호러영화 잘 봤어요. 여름이면 꼭 봤는데~ 이젠 그런 영화는 보기 싫어졌어요.ㅋㅋ

blanca 2013-06-28 10:27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화 얘기를 들었는데 진척이 있는지 궁금해요. 오호! 순오기님 지역에 사시는군요! 원래 간호사셨다고 들은 것 같아요. 이제 작품이 나왔으니 아무쪼록 성사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이제는 잔잔하고 여운이 남는 영화가 좋아요.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화는 저어하게 되더라고요.

Jeanne_Hebuterne 2013-06-28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러물에서 시작하여 매끄럽게 정유정으로 스며들었다가 다른 부분에서 매듭을 짓는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알 포인트,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이건 1편만), 엑소시스트, 링(대충 지금은 여기까지만)을 보더라도 인간이 느끼는 공포는 참 다양한 것 같아요. 감정의 뿌리를 캐내다 보면 늘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희미한 자국이곤 했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상상을 자극하는 공포에 몹시 예민하게 반응-bgm으로 삐걱대는 문 소리만 들려도 혼자 자지러지는 부류-하는데, 블랑카님을 글을 읽으니 정유정이 궁금해집니다.올여름, 한 번 챙겨보아야 겠어요!

blanca 2013-06-28 10:32   좋아요 0 | URL
쟌느님, 혹시 <7년의 밤>을 안 읽으셨다면 강추드려요. 참 잘 썼더라고요. 감탄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요. 여기 저기에서 하도 칭찬을 해서 값을 하나 싶었는데 저한테는 아주 놀라운 소설이었어요. 저는 겁이 많아요. 번지점프, 스쿠버다이빙, 이런 것 죽을 때까지 못할 것 같고요. 무서운 것은 거의 눈감고 안 보는 수준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