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는 글을 쓰는 일의 무게를 실감하고 작가의 사회적 책무에 용기있게 반응했던 사람이다. 그런 면면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작품들은 대단히 재미있다. '고전'의 반열에서 그 만큼의 가독성을 자랑하는 작품들도 드물지 않을까. 발자크의 '인간극'처럼 그도 '루공마카르'총서를 기획해 한 가문과 그 배경이 된 시대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려 했다. 하나 하나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지만 사실 더 큰 이야기의 조각으로도 자리매김한다. <목로주점>의 알코올 중독자 부부의 말 안듣던 딸 나나는 그의 <나나>에서 성장한 팜므파탈로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이자 파멸의 매개체로 독립하여 등장한다.

 

 

 

 

에밀졸라는 역경을 딛고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쓰는 그 숱한 이야기의 주인공들과는 애저녁에 결별하였다. 대신 그는 환경의 절대적인 영향 속에서 자신의 의지, 희망, 노력 등을 유린당하며 함돌되어가는 지극히 약하고 평범한 인간군상에 밀착하였다.이것을 현실적이라고 혹은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이라고 이야기하여야 할 지 그의 노련한 내러티브 실력 앞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연기력도 가창력도 없이 그저 육감적인 외적 매력으로 어필하며 무대에 서는 여배우 나나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 애정, 물질 들을 제대로 관리하거나 제어하지 못하고 방탕하고 난잡하게 살다 시간과 육체적 쇠락 앞에서 파멸하는 모습에 대한 속도감 있는 이야기는 통속적이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고 슬프고 허무하기도 하다.

 

위에서 아래까지 모든 남자는 나나 앞에서 타락한다. 그녀 앞에서 세상은 유치하고 쉽고 더럽다. 에밀졸라는 모든 겉치레의 휘장을 벗겨 버리고 인간 내면의 가장 추악한 욕망, 내밀한 속살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그는 '짐승'을 그린다. '나나'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다. 졸라는 '나나'를 밟고 건너가며 이야기한다. 세탁부로 어떻게든 가족과 함께 열심히 먹고 살아가려 했지만 결국 술에, 돈에 삶을 저당잡히고 말았던 제르베즈의 딸은 자신의 몸을 팔아 물질적 결핍은 해소했을 지 모르지만 또다른 방식으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픈 결론을 맞고 만다. 에밀 졸라가 그려낸 사회의 하류층의 삶의 파멸은 영원히 돌고 도는 그 궤도 밖으로 탈출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그러한 그들의 결핍과 물질적 욕망을 유린하고 이용하는 상류층의 위선도 덧붙여 있다.

 

'나나'는 에밀졸라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고발'의 한 방편이 된 감이 있다. 그래서 나나가 그렇게 되어가는, 그럴 수밖에 없는 과정에 대한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져 아쉬웠다. 그래도 이 더운 여름, 에밀 졸라의 '나나'를 만나는 것은 물질만능 자본주의 사회의 무서운 일면이 '나나'의 시대와 얼마 만큼 떨어져 있는 것인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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