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놓고 읽지 못했던 책을 하필 책상 오른쪽 귀퉁이에 올려 놓으니 마치 하지 않은 숙제처럼 꺼림칙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정말 재미있어서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책이 아닌 것은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루하고 어렵기만 하다면 이 책이 이렇게 시공간을 넘어 회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아주 묘한 마력과 무게를 지닌 책이다. 솔직히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하긴 힘든데도 불구하고 3권을 또 찾게 된 것을 보면 언젠가는 읽게 되리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런데 사춘기에 접어든 주인공의 첫사랑에 대한 오직 내면에서 일어나는(실제가 아니다) 밀고 당기기의 향연은 초반에 아버지가 아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일부러 초대한 귀한 손님 노르푸아 씨에 대한 장황한 설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저지당하기 일수였다. 도저히 중간까지 독파하기가 힘들어 관두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노르푸아 씨가 가고 나니 사랑하는 소녀 질베르트를 만나기 위하여 드나드는 스완 씨 댁에 이야기로부터 누구나 경험하는 첫사랑의 그 처절한 실패에 대한 그 섬세한 묘사와 해부에 중독되고 만다.
이를테면. 상대는 나한테 크게 관심이 없는데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얼굴을 볼 수 있는 경우)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내가 스스로 그를 만날 기회를 박탈하여 고고하게 나의 애면글면한 마음을 다스리는 그 무용한 노력의 지도에 대한 탐사. 그러니까 나는 너를 이제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너를 일부러 보지 않을 거라는, 너를 향하지만 결국 나에게서 발화하여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 거짓말들, 에서 자유로웠던 첫사랑은 드물 것이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심리의 결마다 펜을 들이밀어 하나 하나 언어로 길어올린다. 놀랍다. 하지만 어렵다. 만연체의 문장은 수시로 출발점을 이탈한다.
그의 첫사랑은 그의 집안에서 더이상 교류를 거부하게 된 귀족 스완이 화류계 여자 오데트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다. 그의 사랑과 그의 시선은 질베르트에게 가 닿은 듯 하지만 묘하게도 그녀의 어머니 오데트에 대한 밀착된 경의, 경멸이 혼재된 애정어린 관찰과 묘파로 이어진다. 그러니 정작 이 소년이 첫사랑의 추억을 바친 자는 그녀의 딸이 아니라 딸의 어머니인 그녀인 듯하다,는 느낌은 오판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야기보다는 그 이야기가 파고드는 속살, 내면에 천착하는 프루스트의 이야기는 소설이라기보다는 누구나 통과한 한 시절에 갇혀 있던 우리의 지난 날에 대한 정밀한 탐사다.
결국 다 읽긴 했지만, 제대로 읽어낸 것같지 않다. 프루스트는 살면서 읽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같다. 내가 나의 사춘기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해 내지 못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