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는 아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장님에 귀머거리, 벙어리였다. 잔혹한 짐승들의 핵 주위에 있는 '불구'의 무리였다. 거의 모두가 비겁했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p.46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늙은 뱃사람의 노래> 중 인용된 싯구는 이 책의 '제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이것은 지옥이다."라고 절규했던 프리모 레비는 40년이 지난 뒤 젊은이들에게 이 악의 현현이 점점 멀고 희미하게 물러나는 것에, 아니 이 악령이 다른 형태로 부활을 꽤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물러나는 기억들을 다시 고찰하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먼 기억 앞에서 엄정하다. 심지어 그것을 '의심스런 출처'라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고찰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지평으로까지 확대된다.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10개월간 생활한 그의 처절한 체험은 <이것이 인간인가>에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저서 중 한 장의 제목인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는 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와 절멸한 자에 대한 레비 나름의 관찰과 분석을 기반으로 한 탐사의 보고였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이것이 인간인가>가 스스로 살아낸 세월이다. 살아남은 자가 언제나 최고는 아니였다,는 그의 이야기는 씁쓸한 진실이다. 심지어 그는 최악의 사람들이 생존했다,고까지 절규했다. 완전한 증인들은 가라앉았다,는 그의 냉소적인 목소리는 자신의 생환 그 자체마저 다시금 어떤 부책감과 죄책감에 기댄 체로 거르려는 엄중한 도덕적 결벽을 보인다. 그의 자살은 어쩌면 이러한 그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진 자신에 대한 단죄일런지도 모른다. 아니, 비록 그가 도저히 이해할 수도 감히 용서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도 어려웠던 가해자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신뢰 그 자체를 말살당하고 나서 그가 삶의 소멸까지 온전히 자연의 힘에 맡기기는 힘들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고 그 인간들이 뿜어내는 숨결로 덮인 삶을 긍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수용소를 하나의 복잡하게 얽히고 계층화된 소우주로 보고 '권력'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탐욕, 이기심, 자만을 가해자 뿐만 아니라 희생자, 그 둘 사이의 회색지대에 이르기까지 객관화된 시선으로 엄정하게 고찰해 간다. 권력은 마모되지 않고, 부패된다는 그의 경고는 울림이 크다. 수용소의 SS들 뿐만 아니라, 좌절한 사람들도, 억압받는 사람들도 자발적으로 권력을 원했고 거기에 기생하여 자신의 존엄을 저버리고 생존해 나가기를 바랐다는 그의 이야기는 인간 세계에서 권력층과 거기에 기생하는 특권층에 대한 투쟁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에 대한, 그리고 그럼에도 그 투쟁이 영원한 지향이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빅터 프랑클처럼 그는 차마 희망과 인간이 역경을 딛고 올라서는 저력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화학자이자 작가로서 성공한 그의 여생도 그가 1년도 채 안 있었던 그 지옥 같던 수용소에서 듣고 보고 당한 것들에 대한 상처와 가치관의 혼란과 인간성에 대한 실망을 상쇄키시지는 못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어 증언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자신에게 기록했던 이 참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엄중하게 경고한다. 그의 경고는 섬뜩하고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극한 상황에 처해 보지 않고는 우리 자신조차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유효하다.

 

룸코프스키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에 담벼락이 둘려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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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6-2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림을 주는 책이군요.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되어도 앞으로 시간이 많이 흘러도
반성하고 성찰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되겠습니다.
저절로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길 기대할 수 없고 공식적으로 거론해야 하는
엄숙한 시간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 같아요.
늘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blanca 2014-06-23 10:35   좋아요 0 | URL
페크님, 수용소 관련 책을 모아 읽었는데 절로 기분도 음울해 지고 인간과 세계의 진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게 되더라고요. 안 그래도 나이 들어가는 게 이런 것을 알며 어느 정도 냉소적이 되고 체념도 하게 되고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