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신간] 세계화 속의 비정규직 이야기 〈부서진 미래〉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왜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늘 더 빼앗겨야 할까. 더 이상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이 사회는 삶의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가고 있다.
  
  주류 삶과는 너무 다른 맨 밑바닥 층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얼음 작살이 깊이 꽂힌 것처럼 서늘하게' 다가오도록 하는 책이 나왔다. 르뽀문학교실 수강생들이 우리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의 얘기를 묶어 펴낸 〈부서진 미래〉(김순천 외, 삶이 보이는 창)이 그것이다.
  
  '세계화'가 만들어낸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일상의 곳곳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가정복지도우미 이점순 씨, 서울대병원 간병인
정금자 씨, 미등록 이주노동자 라주 씨, 기간제 교사 원경미 씨, 영화 스태프 최진욱 씨, 노숙인 이곤학 씨…. 우리는 이미 곳곳에서 '물처럼 고통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그들의 고통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그 침묵의 이유에 대해 대표저자 김순천 씨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그 고통들이 전쟁이나 강제이주, 해일로 왔다면 뭔가가 좀 더 뚜렷해지고 해결점이 명확히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온갖 합법적인 것, 도덕적인 것, 능력 있는 것'으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왔다."

그랬다. 사람들은 다들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이 사회의 끝자락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온갖 선진적인 조치들은 '노동빈민층'을 만들어냈다.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제가 철야 서너 번을 포함해서 120시간을 했는데, 110만원 받았어요. 3주 동안 하루도 못 쉬었는데, 거의 쓰러질 정도였죠. 철야를 3번인가 4번 했어요. 여기는 철야수당도 안 주고 철야하면서 간식 먹은 시간까지 빼요. 100시간 잔업하면 114만 원인데, 4대 보험 공제하고 나면 100만 원 조금 넘겠죠." (기륭전자 노동자 은미)
  
  비정규직의 고용은 저임금 노동자를 유연하게 사용해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논리로 합리화된다. 그러니 이들은 당연히 '적절한' 임금을 받을 리 없다. 2004년 1700억 매출액에 220억 원의 당기 순이익을 올렸고, 2005년 무역의 날에는 1억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하기도 했던 기륭전자이지만 이 회사 계약직 노동자들의 초임은 64만1850원(2005년 9월 인상 이전). 나라에서 정한 최저임금보다 고작 10원 많은 금액이다.
  
  2005년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4인 가구 최저생계비는 113만6332원. 기륭전자의 여성 노동자 행난 씨는 혼자 번 돈으로 네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녀는 거의 매일 밤 10시까지 일을 해야만 가능한 80시간 잔업을 해도 이 돈을 벌 수 없다.
  

지호만 해도 그랬다. 지호는 IMF 사태로 아버지의 건설사업이 실패한 열 세 살 때부터 이제 파릇파릇한 스무살이 될 때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몸이 채 다 자라지도 않았던 그 어린 시절부터 신문배달, 자장면 배달, 가스 배달, 다방 아가씨들 오토바이 태워주기,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혼자' 살아 왔다.
  
  "취업이 진짜 잘 안 될 때가 있었거든요. 저 같은 사람을 어디서 쓰겠어요. 주유소고 어디고 취업이 안 돼서, 그때도 참 힘들었어요."
  
  고학력 노동자들은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취업을 미루기도 하지만, 중학교도 겨우 나온 지호를 받아주는 곳은 역시 밑바닥뿐이었다. "다시 태어나면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지호는 "이렇게 떠돌면서 살지 말고 정착할 걸…. 마음을 못 잡았으니까. 한 가지 일만 했더라면 지금쯤은 인정을 받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지요"라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탓했지만 사실 지호를 떠돌이 인생으로 만든 건 지호 자신인가?
  
  그들에게는 오늘밤도 내일도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사회에서 밀려난 것은 주민등록등이 말소돼버린 노숙자 이곤학 씨(60)도 마찬가지였다. IMF로 일과 집을 다 잃어버린 이곤학 씨의 8년 간의 노숙 생활은 대한민국의 국민의 자리도 빼앗아갔다.
  
  지나는 차 소리로 한 밤중까지 시끄러운 길에서도, 공익근무요원들의 구박과 내쫓김을 당하곤 했던 지하철 역사 한 구석에서도 잘 잤던 그였다. 거리 한 복판 그의 작은 공간이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 같이 시끄러운 곳이었다는 말에도 "그래도 한 자리에서 그렇게 오래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은 운이 좋은 것이제. 한 겨울에도 꼼짝 않고 거기 있었어. 영하 13도 내려갈 때도 움직이지 않았어. 은박지에다 박스로 집 지어놓고, 깔판 같은 걸 깔아 놓고, 침낭 2개 속에 들어가서 자면 괜찮아"라고 웃던 그였다.
  
  그런 그가 주민등록증이 말소된 사실을 알고 나서는 "정말 내 자신이 벌레만도 못하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700원짜리 컵라면을 사 퉁퉁 불려 먹기 위해 노가다라도 하려면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한다. 이제 자신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이 사라진 그에게는 그의 말대로 "오늘밤도 없고 내일도 없게 돼버렸다."
  
  하루 밤 잠 잘 곳을 찾아 헤매는 노숙인은 아니어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위험 속에 불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미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된 '비정규직'의 이야기는 바로 내 옆 친구의 삶이기도 하다.
  
  "20년이나 30년 후에도 계속 교사 일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난 교사밖에 내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이 학교, 저 학교 장돌뱅이처럼 옮겨 다닐 생각을 하면 괴롭지." (기간제 교사 원경미 씨)
  
  그나마 계약 기간을 채울 수 있는 경미 씨는 나은 편이다. 강압적으로 업무량은 2배로 늘린 것에 대해 문제제기한 것이 해고 사유 '잡담'이 되어 문자로 해고 통지를 받은 기륭전자 노동자 석순 씨도 있다.
  
  "2월 14일에 들어가서 5월 3일에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당했어. 000 차장 만났는데 A4 한 장짜리 팩스가 들어온 거를 보여주더라고. 15명이 같이 잘렸는데, 이름이랑 사유가 써 있어. 종희하고 나하고 사유가 뭐냐면 잡담이더라고." (기륭전자 노동자 석순 씨)
  
  어느 날 갑자기 문자로 날아오는 해고 통지 앞에서 그들은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없애버릴 생각까지 했다고 했다. 이들의 불안정한 고용은 불안정한 삶으로 이어진다.
  
  "장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다는 게 지금 큰 문제지. 보통 회사 다니면 퇴직금 쌓이고 1, 2년 가면 호봉도 오르는데, 이것은 승률 올리기도 힘들어. 뭔가를 배우려고 해도 시간이 안 되잖아. 아침 10시까지 출근해서 일찍 들어와도 밤 11시인데…." (학습지 교사
유지혜 씨)
  
  "그분들의 목소리가 세상과 불화하기를 바란다"
  
  점점 더 비정규직의 비율이 늘어나는 우리 사회에서 빼앗긴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이 사회에서 한낱 넋두리로 버려지거나 냉소, 경멸당하고 있다. 이 나라가 꿈같았던 세계화를 이루면서 그 대가로 절망의 나락에 빠진 사람들의 목소리는 오히려 담담하다.
  
  그 목소리들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지켜지고 보호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이 책을 만들었다. 책을 읽는 이들이 그 목소리를 듣고 많이 아파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아픈 목소리들에 우리는 무슨 답을 해야 할까?
  
  이 책의 대표작가 김순천 씨는 말한다.
  
  "그 목소리들은 지켜지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의 목소리가 이 세상과 많이 불화하길 바란다. 몸으로 인생을 통과해오면서 얻은 육화된 그분들의 언어와 삶이 실종된 세상의 가벼움과 최대한 많이 충돌하기를 원한다.
  
  퓨전 음식처럼 여러 음식 중에 하나로 선택해서 즐기는 그런 것들이 아니기를 바란다. 값비싸고 좋은 음식만 먹다가 어느 날 먹는 된장찌개가 아니기를 바란다. 생의 하중을 견뎌오면서 만들어진 그분들의 얼음작살 같은 목소리가 될 수 있으면 마음에 오래 오래 박혀서 많이 아파주기를 바란다."

 

 여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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