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는 정체성'  이론과 실천
    '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 사계절

 



내가 누구인지 규정하지 말라

 

사람 정체성은 어디서 어떤 핏줄로 태어났나가 아니라
삶의 역정, 신념, 감수성이 뒤섞여 만들어지는 것
친북좌파니 영남출신이니 하나의 소속에만 환원시키는 것
부당한 폭력이자 학살자를 만들어낸다

반미냐 친미냐, 반북이냐 친북이냐, 좌파냐 우파냐, 영남이냐 호남이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친박이냐 반박이냐, 서울이냐 지방이냐, 명문대냐 비명문대냐, 남자냐 여자냐, 진보냐 수구냐, NL이냐 PD, 노빠냐 노까냐, 황빠냐 황까냐. 이런 류의 이분법적 대립항 설정 자체의 타당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곧잘 자신이나 주변의 누군가 그 어느 한편과 동일시되고 그 때문에 배척당하는 현실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일단 한번 그렇게 ‘찍히면’ 거의 속수무책이다. 부인은 오히려 혐의를 짙게 할 뿐. 이른바 ‘남남갈등’ 따위의 언표들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 내부의 분열과 타자 배제의 완고성을 드러내주는 이런 양자택일식 타자 규정의 천박성과 그 절망적인 위력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에서 극에 달한다. 조선족이나 동남아 이주노동자 등 외부에서 온 구성원들, 특히 ‘부족적’ 친연성이 없는 외부인 약자들에 대한 배타성은 가히 폭력적이라 할만하다.

<사람잡는 정체성>(이론과 실천 펴냄)의 저자 아민 말루프도 그런 일로 숱하게 시달린 모양이다. 서문 첫 문장을 “…나는 나 자신이 ‘프랑스 사람’과 ‘레바논 사람’ 중 어느 쪽에 더 가깝게 느끼느냐에 대해 여러번 자문해 보았다”로 시작하는데, “양쪽 다!”라고 자답해 놓고도 찝찝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런 식의 대답에는 으레 “에이, 그러지 말고 진짜는 어느쪽? 마음속 깊은 곳에선 누구라고 느끼냔 거죠” 따위의 다그침이 뒤따랐던 듯, “이 집요한 질문”을 오랫동안 받았다고 실토했다.

▲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
마셜 호지슨 지음. 에드먼드 버크 3세 엮음. 이은정 옮김. 사계절 펴냄. 2만8000원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등을 통해서도 알려진 말루프가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종교적·인종적··민족적 혹은 기타의 정체성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는가”를 화두로 삼은 출발점은 바로 그 자신의 정체성 문제였다. 1949년 아랍 남부지역 출신 집안에서 태어나 레바논 산간지역에서 자란 말루프는 아랍출신이면서도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멜키트 종파)를 모태신앙으로 이어받았다. 베이루트 대학을 나와 12년간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27살 때 종교분쟁에 휩싸인 조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갔다. 6백만-7백만명에 이른다는 프랑스내 이슬람계 가운데서 그는 모국어가 아랍어지만 기독교도에다 주로 프랑스어로 생각하고 쓰는 이질적인 존재다. 이 책 출간시기가 1998년이니 ‘아랍인과 이슬람 문제’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2001년 9·11동시테러를 내다보기라도 하듯 그때 이미 문제의 절박성을 감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9·11 테러 미리 내다본듯한 저작

사람의 정체성은 어떤 땅에서 어떤 핏줄을 받아 태어났느냐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자유스러운 한 인간의 역정, 확고한 신념, 고유한 감수성, 그 사람과 관련된 것들과 그의 삶 등등”, 달리 말하면 “언어, 신앙, 생활방식, 가족관계, 예술적 취향, 음식 취향…”과 뒤섞여 만들어진다. 그 다양성의 총합이 정체성이다. “인간은 그 아버지의 자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시대의 자식이다”라고 한 역사가 마르크 블로흐의 말과도 상통한다. 요컨대 어떤 사람을 친북좌파니 영남출신이니 황빠니 하는 한두마디로 규정하는 건 부당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광신자들이나 외국인혐오자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주변의 개개인들조차 뿌리깊이 박힌 편협하고 배타적인 사고와 표현의 습관들 때문에 “한 사람의 정체성 전체를 단 하나의 소속에만 환원시키라고 격렬히 부르짖고”, 그것이 “학살자들을 만들어낸다”고 저자는 절규한다.


모두 ‘완전한 시민’으로 취급받아야

▲ 지난해 11월12일 프랑스 이주민들의 소요사태가 2주를 넘긴 가운데 남서부 툴루즈의 주민들이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펼침막을 앞세우고 도심 평화행진을 벌이고 있다. 타자 배제 및 차별로 이어진 이주민 정체성 문제가 자동차 방화 등 소요사태를 불렀다. 툴루즈/ AP 연합
저자가 특히 관심을 쏟은 이슬람에 대한 편견, 즉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여성의 권리, 근대성과 얄립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은 어떻게 형성됐나? 적어도 18세기 말까지 이슬람은 기독교에 비해 타종교나 문화에 대해 훨씬 관용적이었다. 그 무렵부터 소외 및 서양과의 격차를 의식하기 시작한 이슬람세계는 서양의 학살과 약탈, 노예화 행각에 한을 품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한 아랍세계의 서구화 노력을 주도한 세력은 이슬람 종교가 아니라 나세르 등 민족주의 세력이었으나 그들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사회·공산주의에 대한 기대마저 물거품이 된 뒤 이슬람 신앙이 복권됐다. “아랍 인구의 상당수가 종교적 극단주의에 귀를 기울이고, 1970년대부터 얼굴을 가리는 두건과 항의를 상징하는 수염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나세르를 필두로 하는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잇따른 군사적 실패와 경제적 후진성에 관련된 문제를 풀 수 없는 무능력 때문에 막다른 길에 도달한 이후였다.” 차별과 빈곤·실업, 범죄·마약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서구모델의 실패, 세계화와 통신혁명 등이 이에 박차를 가했다.

저자는 ‘표범(정체성)을 길들이는 방법’은 “각 시민이 어떠한 소속을 지녔던 간에 하나의 완전한 시민으로 취급받게끔 하는 일”이라며, 절망을 깔고 앉은 근본주의적 태도에는 반대한다. “그것은 고통과 거부와 수동성 속에 틀어박히는 태도로 거기에서 나오는 방법은 자멸적인 폭력밖에 없다.”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사계절 펴냄)은 근대 유럽이 철저히 찌그러뜨리고 왜곡해 놓은 이슬람 역사 복원을 통해 서구 우월주의와 서구중심 역사관의 패러다임을 흔들어놓은 중량감있는 고전이다.

이슬람 역사 전문가 마셜 호지슨(1922-1968) 전 시카고대학 교수의 글을 캘리포니아대학 산타크루즈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에드먼드 버크 3세가 엮고, 마지막에 자신의 글 ‘세계사로서의 이슬람사-마셜 호지슨과 <이슬람의 모험>’을 결론삼아 보탠 이 책은 <사람잡는 정체성>에 담겨 있는 이슬람 역사에 대한 시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또 기성관념과 사고의 전환을 꾀한다는 점에서도 두 책은 일맥상통한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처음 일어났다고 해서 유럽의 역사를 영국사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처럼, 산업혁명이 처음으로 확산된 지역이라고 해서 세계사를 유럽사로 환원시킬 수 없다”고 한 호지슨의 발상은 서구 중심사관이 당연시되던 반세기 전에 이미 근대성 전개를 전지구적 과정으로 보고 유럽 독주론을 부정하는 21세기적 지평을 선취하고 있다. 그는 유럽은 1500년 무렵 르네상스기가 돼서야 겨우 지구상 다른 문명 수준에 도달할 만큼 뒤처진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고 봤으며, 유럽과 북반구 면적이 실제보다 부풀려진 세계지도의 메르카토르 도법을 ‘인종차별적인 투영법’이라고 불렀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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