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서울대,철학의 빈곤-진중권

대졸 대통령’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이 자신을 ‘엘리트주의자’라 불렀을 때, ‘피식’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학벌 사회에서 ‘엘리트’의 유일한 기준이란 결국 출신대학인 바, 학벌에 근거해 자신을 ‘엘리트’라고 착각하는 그 사람들은 정작 전대변인이 나온 대학을 유감스럽게도 자기들의 반열에 끼워주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신분제로 전락한 엘리트주의그러는 ‘SKY’는 그럼 ‘엘리트’ 대학인가? 이 세 대학의 신입생 수가 1만5천명, 인구가 우리의 다섯 배에 달하는 미국 10개 명문 대학의 입학생 수와 맞먹는다. 인구 수와 대학 수를 감안하여 환산하면, 우리나라 ‘엘리트’의 양적 규모는 열다섯 배나 부풀려 있고, 질적 함량은 1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도 ‘엘리트’ 의식만은 드높아 하늘(SKY)을 찌른다.

 

그 자부심이 얼마나 제대로 된 것일까? 진정한 엘리트는 자신의 재능을 사회를 위해 써야 하며, 제 재능을 남을 깔보는 데에 쓰는 게 천박하다는 걸 알 정도의 의식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싸가지’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엘리트주의’는 현대 시민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는 조선 말기의 신분제나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가깝다.

 

정운찬 총장의 취임 이후 서울대가 나서서 정부와 대립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일류 밝히는 서울대의 세계대학 서열이 ‘더 타임스’에 따르면 118위, 상하이 교통대학의 발표에 따르면 200위. 이때만 해도 서울대에서는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으나,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에서 실시한 국내대학 평가에서 서울대는 10위권 안팎에 머무는 저조한 성적을 냈다.

 

그러자 조선일보에서 서울대를 대신하여 발끈했다. ‘졸업자의 평균 초봉, 학생들의 입학성적 등 질적인 지표’가 빠졌다는 것이다. 그게 왜 ‘질적 지표’인지 모르겠다. 졸업생들의 높은 초봉은 사실 서울대라는 허울 좋은 ‘간판’ 값이고, 신입생들의 높은 입시성적은 결국 서울대의 업적이 아니라 고등학교와 입시학원의 공이 아닌가?

 

대학평가의 가장 중요한 기준을 입학 전(前)의 성적과 졸업 후(後)의 초봉에서 찾으면, 가장 중요한 중간이 뭉텅 잘려나간다. 입학성적 좋은 학생들을 유치하여 학교 간판의 광을 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정작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데에는 대학들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교협의 대학평가는 이른바 명문대들이 가진 그 허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인재 ‘선발’보다 ‘양성’이 중요대학들은 저마다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려 하나, 어차피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서 이리 뽑으나 저리 뽑으나 배분과 분포만 달라질 뿐, 어차피 ‘우수한 학생’의 사회적 총량에는 아무 변함도 없다.

 

그런데도 거기에 목숨 거는 게 이 사회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인재를 ‘뽑는’게 아니라 인재를 ‘만드는’ 것일 터. 우리 대학들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철학의 총체적 부재로 보인다.

 

한나라당 전대변인이 나온 대학은 이제까지의 통념에 따르면 ‘엘리트’에 속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대교협 평가 신문방송학 부문에서 그가 나온 대학은 하늘(SKY)을 뚫고 1위를 차지했다.

 

명문대 여부는 치사하게 학생들의 입학 전 성적으로 결정할 게 아니라, 당당하게 입학 후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실력으로 가려야 한다. 전대변인은 몰라도 그의 후배들은 이제 ‘훌륭한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진중권/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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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쉬운’ 진보는 오만하다-홍세화

‘쉬운’ 진보는 오만하다

진보에 대한 끊임없는 학습과 성찰을 통해 성숙하지 못하는 민주노동당
당원 배가엔 열심이되 교육엔 소홀한, 홍보엔 열심이되 정책 연구엔 태만한…

▣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hongsh@hani.co.kr

정권은 “아버지, 바위 굴러가요!”처럼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내 품에 안겨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더욱이 보수·수구 정치세력만의 잔치판이었던 한국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집권을 도모할 때엔 더욱 시간의 진보성에만 기대할 수 없다. 더구나 사회 진보의 진정성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진보함으로써 담보되는 것이다. 진보세력의 손쉬운 집권은 진정한 진보의 성취가 될 수 없다. 스스로 끊임없는 학습과 성찰을 통해 자기성숙을 모색해야 하며, 성실하고 겸허한 자세로 사회 구성원들이 의식과 가치관을 바꾸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 지난한 노력과 운동의 결실로 진보정당이 집권했을 때만이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

진보는 어렵고 느리고 불편한 것

오늘날엔 스스로 ‘나는 무식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대중화된 교육, 보편화된 대중매체의 혜택을 받고 있어서다. 그러나 본디 공짜는 없다. 대중화된 교육 과정과 보편화된 대중매체의 주체는 국가권력과 자본이다. 민주적 통제가 부족하고 민중적 통제가 없는 국가권력과 자본의 헤게모니 작동에 의해 형성된 의식과 가치관은 서민 대중에겐 ‘존재를 배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피노자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이미 형성된 의식과 가치관을 고집한다. 그렇게 사회 구성원들이 고집하는 의식과 가치관을 바꾸는 것만큼 사회가 진보할 수 있기에, 진보는 어렵고 느리고 또 불편한 것이다.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말하지 않더라도, 분단 현실과 압축 성장은 이 사회에 ‘다양한’ 진보를 낳았고, 진보에 대한 오랜 억압 과정은 역으로 ‘쉬운’ 진보를 낳았다. 이 땅의 진보세력은 아직 내적으로 성숙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사회 진보는 무척 어려운데, 진보세력의 일원임을 자처하기는 아주 쉬운 토양인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2012년 집권’ 주장도 사회 진보의 어려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한, 쉬운 진보의 오만한 전망에서 온 것이다. 그 시나리오를 믿는 사회 구성원은 없다. 설령 신진 진보정치 세력의 구호를 애교로 받아들인다 해도, 민주노동당이 그 목표에 상응하는 성실성과 치열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책임 있는 정당으로 비칠 수 없다.


△ 민주노동당은 왜 당원 배가운동에는 열심이지만, 당원 교육에는 소홀한가. 진보에는 치열한 학습과 성찰이 뒷받침돼야 한다. (사진/ 윤운식 기자)

가령 당원 배가운동에는 비교적 열심이지만, 당원 교육에는 무척 소홀하다. 양적 팽창에 관심을 기울이고 당원의 질적 성숙과 고양에 등한한 것이다. 10명이 국회의원으로 진입하면서 중앙당이 기자실을 확대해 당을 홍보하는 데에는 비교적 열심이었다. 진보정치 세력에게 호의적일 수 없는 한국 언론에 대한 문제의식도 부족했고, 진보정당의 정치력의 원천을 홍보에 의존하려는 인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기자실을 확대하는 것만큼 당원 교육 프로그램이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은 기존 보수·수구 정당에 준하는 구색 맞추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당원 교육 현장은 당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며 소통하는 자리라는 점만으로도 보수정당이 기대할 수 없는 뜻깊은 자리다. 그런 소통과 만남, 그리고 토론의 자리를 활성화하지 못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보수 정당의 정치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여준다. 더욱이 다급하게 변화하는 세계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할 줄 아는 진보적 안목과 소양을 위해서도 당원들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은 필수적이다. 정치, 경제, 노동, 문화, 통일, 군사, 생태, 환경, 여성, 통일, 미국 등 각 부문과 사안에 대해 민주노동당의 당원으로서 진보의 감수성과 안목, 소양을 공유해야 하지 않는가.

정책 연구와 개발에도 공을 들이지 않았다. 사회 구성원들은 부유세,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구호로서만 민주노동당을 알고 있을 뿐, 당원들에게조차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것이 이루어지면 사회가 어떻게 바뀐다는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했다. 당원들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회 구성원들을 설득하겠다는 것인가? 한마디로, 구호만 있을 뿐 정책이 없는 것이다.

‘2012년 진보 제일 야당’을 말하라

이처럼 당원 교육도 소홀히 하고 정책 연구와 개발도 소홀히 하는 진보정당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다. 당 홍보를 통해 지지율 상승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결국 국회에 진입한 국회의원들의 활동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당직·공직 분리 원칙에 집착하면서, 당원들조차 최고위원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형편인데 이원 조직의 굴레를 씌웠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2012년 집권을 말한 것인지 기가 찰 노릇이다.

‘쉬운’ 진보의 오만은 각자 자신의 진보만을 고집하며 학습을 멀리하게 한다. ‘다양한’ 진보가 각개약진할 뿐 소통하지 않는다.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통과 만남도 없고, 학습과 토론도 없는, 그래서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가 이루어질 수 없는 토대인데 거꾸로 민주주의 원칙이 강조된다. 하나의 정파가 당을 지배한다. 현실대응 능력도 부족하고 책임지는 자세도 없는 진보정당이 탄생한다. 이것이 오늘 민주노동당의 슬픈 자화상이다.

지난해 말 스스로 열린우리당 ‘2중대’ 소리를 자랑스럽게 하면서 국가보안법 폐지에 전력투구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런데 전력투구를 요구했던 당직자 중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행정수도 법안에 대해선 제때에 당론을 정하지 못했다. 분명 책임지는 정당의 모습이 아니다. 독도 문제에는 진보정당의 대응이라고 할 수 없는 반응을 즉각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에 반해, 서민들에게 분노와 슬픔을 주는 집값 상승, 부동산 거품에 대해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내 입으로 “진보정당, 맞아?” 소리까진 차마 못하겠지만…. 차라리 ‘2012년 진보 제일 야당’을 말하라. 국정 현안의 주 토론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꿈같은 일이다. 무엇보다 학습하고 연구하고 개발하라. 스스로 겸허하여 쉬운 진보의 오만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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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간아 > 돼지 숭배자와 돼지 혐오자 - 마빈 해리스

 

               돼지 숭배자와 돼지 혐오자

 

 


                                                               - 마빈 해리스

 


돼지에 관한 수수께끼


비합리적인 식생활 습관에 대한 사례를 누구나 대개는 한두 개 알고 있다. 중국인들은 우유를 싫어하는 대신 개고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서양인)들은 우유는 좋아하지만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브라질의 어떤 원시 부족은 사슴 고기는 질색으로 여기는데 개미는 맛있게 먹는다. 이처럼 기이한 식생활 풍속은 세계 곳곳에 깔려 있다.

돼지에 관한 수수께끼는 '거룩한 어머니 암소'다음으로 거론하기에 좋은 주제가 될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같은 동물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왜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왜 싫어하는가 하는 데 대한 해명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돼지 혐오 자들이 지니고 있는 이 수수께끼의 이면은 유태교도와 회교도와 기독교도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고대 히브리의 신은 "돼지는 불결한 동물이기 때문에 먹거나 손을 대면 부정을 탄다."고 선포했다(창세기와 레위기에서 각각 한 번씩). 그로부터 1,500년 후, 알라신은 그의 예언자 마호메트를 통하여 돼지는 이슬람교도에게도 역시 불결하고 부정한 동물이라고 선언했다. 돼지는 알곡이나 쭉정이들을 다른 동물보다 효과적으로 고농도 지방과 단백질로 바꾸는 동물이지만, 수백만의 유태인들과 수 억의 회교도들은 아직도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친다.

여기에 견주어 광신적인 돼지 숭배자들의 전통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돼지 숭배의 세계적 중심지는 뉴기니아와 남태평양 멜라네시아 군도다. 이 지역의 '마을에 사는 신림 부족들'은 돼지를 신성한 동물로 여겨 조상들에게 바치고 혼인이나 축제와 같은 모든 중요한 행사 때마다 잡아먹는다. 많은 부족들은 선전 포고를 하거나 전쟁을 그만두자고 할 때 돼지를 제물로 바친다. 이 부족들은 이 세상을 떠난 조상들이 돼지고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돼지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망이 대단하여 때때로 큰 축제를 열어 부족이 키우던 거의 모든 돼지를 깡그리 잡아먹는다. 몇 날 며칠을 두고 부락민들과 축제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돼지고기를 꾸역꾸역 배속에 쑤셔 넣는다. 그 중에는 더 많이 먹기 위해 소화 안된 것을 토해내고 다시 쑤셔 넣는 사람도 있다.

이런 소란이 끝나면, 돼지떼는 아주 적은 수로 줄어들어 축제 첫날의 돼지 수로 회복시키려면 몇 년에 걸치는 고통스러운 절제의 기간이 필요하다. 돼지 수가 원상 회복되면 게걸스러운 난장판이 또다시 벌어진다. 이런 식으로 매우 부조리한 것같이 보이는 돼지 축제가 기이하게 반복된다.


구구한 해석

나는 먼저 유태교와 회교의 돼지 혐오자들 문제를 거론하겠다. 야훼나 알라와 같은 '수준 높은'신들이 인류 대다수가 즐겨 먹는, 해롭지 않고 오히려 익살스러운 이 동물을 저주하는 마뜩찮은 일을 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성서와 코란에 언급된 돼지 금기에 공감을 표하는 학자들은 여기에다 여러 가지 설명을 가져다 붙이고 있다. 가장 설득력 있었던 설명은 돼지가 문자 그대로 '더러운 동물(자기의 배설물 위에서 뒹굴고 사람의 배설물을 먹으므로)'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불결한 것에 종교적 혐오감을 관련시키려는 시도에는 모순이 있다. 좁은 우리 속에서 키울 경우, 소도 자기의 오물과 배설물 속에서 뒹군다. 그리고 굶주리게 되면 소도 사람의 배설물을 맛있게 먹는다. 개나 닭도 그러하지만, 여기에 호들갑 떠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고대인들은 깨끗한 우리에서 기를 경우 돼지도 까다로운 애완용 동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순수하게 미학적인 '청결'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한다면, 메뚜기나 방아깨비가 '청결'하다고 분류한 성서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다. 곤충이 돼지보다 심미적으로 더 위생적이라는 주장은 신앙의 명분이 되지 못할 것이기에.

이런 모순을 발견한 사람은 르네상스 초기 유태교 '랍비'였다. 12세기 이집트 카이로에서 살라딘의 전의였단 모세 마이모니데스는 유태교와 회교가 돼지를 거부한 이유를 자연 과학적으로 설명해 낸 최초의 사람이었다. 마이모니데스는 하나님이 공공위생 수단으로 돼지고기 금기를 선포했다고 설명했다. 돼지고기는 '몸에 해롭고 나쁜 영향을 끼친다'라고 그 랍비는 기록하고 있다. 마이모니데스가 말한 것은 의학적으로 따지자면 타당하지 않았지만, 황제의 시의였기 때문에 그의 판단은 널리 존중받았다.

19세기 중엽 돼지고기를 날로 먹었을 경우, 선모충병이 생긴다는 사실이 발견되자, 마이모니데스의 혜안이 정확했음이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혁신적인 유태인들은 성서의 율법이 지니는 합리적 토대를 발견했다고 기뻐하며 즉각 돼지고기 금기를 재해석했다. 돼지고기는 잘 익히면 몸에 해롭지 않다. 그러므로 잘 익혀 먹는다면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자 전통적인 랍비들은 보다 근본적인 주장을 내세워 자연 과학적인 해석을 전면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야훼가 오로지 자기 백성의 건강만 보호하고자 하셨다면, 돼지고기를 잘 익혀 먹으라고 가르치셨을 것이지, 아예 먹지 말라고 가르치셨을 리가 없다. 야훼의 심중에는 분명히 육체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어떤 다른 중요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시됐다.

이런 신학상의 모순 외에도 마이모니데스의 설명은 의학과 전염병학 쪽의 반대 견해에 부딪히게 되었다. 돼지는 인간 질병의 보균 동물이다. 그러나 유태교나 회교에서 자유롭게 먹도록 허용한 다른 가축들도 역시 균을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쇠고기를 익혀 먹지 않으면 촌충이라는 기생충에 감염된다. 촌충은 사람의 장 속에서 자라는 16∼20피트의 기생충으로 악성 빈혈을 일으키고 전염병의 저항력을 약화시킨다. 소․염소․양 들도 또한 브르셀라균을 보유하고 있다. 브르셀라병은 후진국에 공통적으로 많은 박테리아에 의한 전염병인데, 열이 나고 오한이 들며 땀을 흘리고 몸이 허해져 고통과 통증을 수반하는 병이다. 가장 위험한 형태는 브르셀로시스 멜리텐시스인데 이 병은 양과 염소가 옮긴다. 이 병의 증상으로 혼수 상태, 피로, 신경 과민 그리고 때때로 정신 신경증이라고 오진되기도 하는 정신적 압박감 등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탄저열은 돼지뿐만 아니라 소, 양, 말, 염소, 당나귀도 옮기는 병인데, 치명적인 경과도 없고 대다수 전염자에게는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 선모충병과는 달리, 급속히 악화되는 병이다. 처음에는 몸이 펄펄 끓도록 열이 나다가 혈액이 중독되어 결국 죽기에 이른다. 이전에 유럽과 아시아를 휩쓸었던 탄저열병의 무서운 전염성은 1881년 루이 파스퇴르가 탄저열병 왁친을 발견하기 전가지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야훼가 탄저열병의 보균자인 가축들을 접촉하지 말라는 금기를 내리지 않았다는 점이 특히 치명적으로 마이모니데스의 자연 과학적 설명을 설득력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왜냐 하면, 탄저열병을 가진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성서가 기록되던 시기에도 이미 밝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것처럼 애굽인들에게 내린 역병 가운데 하나는 동물의 탄저열병 증상과 인간의 질병이 관계가 있음을 밝혀 주고 있다.


⋯⋯사람과 가축은 종기가 나서 곪아 터지게 되었다.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종기 때문에 모세 앞에 나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마술사들까지도 온 이집트에 번진 종기에 걸렸던 것이다.(「출애굽기」 9:10∼11).


이런 반대 견해들에 부딪혀 대부분의 유태교와 회교도 신학자들은 돼지 혐오의 자연과학적 근거를 찾는 노력을 포기했다. 솔직하게 신비적인 입장에서 그 금기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요즘에 와서는 더 공감을 얻게 되었다. 이 신비적 입장은 어떤 것인가 하면, 신의 금기들을 충실히 지키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야훼가 심중에 지닌 의도를 정확히 알려 하거나 밝히려고 하지 않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견해이다.

현대 인류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곤경에 부딪혔다. 예를 들면 모세 마이모니데스는 비록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황금 가지』의 저자로 이름난 제임스 프레이져 경보다 이 금기에 관한 설명에서는 더 정확한 설명에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레이져 경은 "돼지가 소위 불결하다고 열거된 모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돼지를 먹지 말라는 이유는 대부분의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신성한 동물들이기 때문이었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돼지 혐오의 이유를 밝히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 하면, 양, 소, 염소도 역시 중동 지방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지만 그런 동물의 고기는 그 지역의 모든 민족들과 종교 집단들이 즐겨 먹고 있다. 특히 시나이산 기슭에서는 황금 송아지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있는 까닭에 프레이져의 논리에 따르면 히브리인들에게는 돼지보다 소가 훨씬 더 불결한 동물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학자들은 성서와 코란 속에서 금기시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돼지도 여러 다양한 부족들의 토템 상징이 된 적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례는 역사상 먼 옛날에나 있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이 있다면 소㊥양㊥염소와 같은 '정결한'동물들도 토템으로 숭배받을 수 있었으리라는 가능성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토테미즘을 주제로 한 많은 문헌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토템은 늘 식용 가치가 없는 동물이었다. 호주와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들 가운데 가장 널리 숭앙 받는 토템들은 큰 까마귀, 핀치와 같은 별로 식용 가치가 없는 조류나 각다귀, 개미, 모기 등과 같은 곤충들이나 구름이나 옥석과 같은 무생물들에게까지 걸쳐 있다. 더군다나 식용 가치가 있는 동물이 토템이 될 경우에도, 그 동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어디에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처럼 여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돼지가 토템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돼지 식용 금기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누구는 쉽게 "돼지는 터부시되었기 때문에 터부시되었다."라고 단언할지 모르지만.

나는 마이모니데스의 접근 방식이 프레이져의 설명 방식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이 랍비는 세속적이고 실제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강과 질병 같은 자연적 조건 속에서 돼지의 금기를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난점이 있었다면 돼지 혐오에는 그에 상응한 그 나름의 환경적 조건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그의 견해가 오로지 인체 병리학에 몰두라는 외과 의사가 가진 전형적인 편협성으로 말미암아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


돼지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공공 보건의 개념을 넓힐 필요가 있다. 즉 그 개념 속에는 자연 공동체와 문화 공동체에서 동물, 식물, 인간이 서로 공존해 나가는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과정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돼지 사육이 중동 지방의 기본적인 문화와 자연 생태계의 조화를 깨뜨릴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성서와 코란은 돼지를 죄가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는 기원전의 히브리인들(아브라함의 자손들, 기원전 2천 년경)이 메소포타미아 강가의 계곡과 이집트의 중간 지대에 있는, 땅이 척박하고 인구가 희박한 건조 지대에서 살아 나가는 데 문화적으로 잘 적응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야만 한다. 기원전 13세기, 팔레스타인 요르단 계곡을 정복하고 있던 시기에 히브리인들은 거의가 소, 양, 염소 등을 기르며 살아 나가는 유목민 생활을 했다. 모든 유목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오아시스와 큰 강을 소유하고 있던 정착 농경인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때때로 이 친분 관계가 밀접해져 한결 더 정착 문화에 적응하는 생활 양식을 갖기도 했다. 이런 사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았던 아브라함의 후손, 이집트에서 살았던 요셉의 추종자들, 서쪽 네겝 지방에서 살았던 이삭의 추종자들 등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다윗왕과 솔로몬 치하에서 도시 취락 생활이 절정에 달했던 때에도, 소, 양, 염소 등을 치는 목축업은 아주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다.

농업과 목축이 혼합된 전반적으로 복합체적인 경제 형태 안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신의 금지 명령은 완벽한 생태학적 전략이 되었다. 엉거주춤 정착하고 사는 농경인들에게도 돼지는 재산이기는 커녕 오히려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물며 척박한 거주 지역 내에서 돼지를 기를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유목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지구상에 목축을 위주로 하고 있는 지역들은 대개가 비를 이용한 농업을 하기에는 너무 척박하고 관개도 쉽지 않은, 헐벗은 들판과 언덕받이들로 이루어진 땅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땅에서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가축으로는 되새김 동물, 즉 소, 양, 염소 등이 있다. 되새김 동물은 다른 어떤 포유 동물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섬유소가 주성분인 풀, 나뭇잎 등을 소화시킬 수 있게 위의 아래쪽에 벌집위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돼지는 원래 숲지대와 그늘진 강둑에서 사는 동물이다. 잡식 동물이기는 하지만 주식물은 섬유질이 적은 나무 열매, 과일, 식물 뿌리, 특히 곡식을 주로 먹기 때문에 인간과 직접 경쟁하는 경쟁자일 수밖에 없다. 돼지는 풀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따라서 유목, 유랑민들 치고 돼지를 많이 기르는 사람들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돼지가 지니고 있는 더 큰 약점은 마실 수 있는 젖이 없고 먼 곳으로 몰고 다니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돼지는 무엇보다도 네겝이나 요르단 계곡 등 성서와 코란에서 나오는 여러 지방의 덥고 건조한 기후에는 잘 견뎌 내지 못하는 신체 구조를 지니고 있다. 소, 양, 염소 등과 비교해 볼 때, 돼지는 체온 조절 능력을 몸속에 별로 잘 갖추지 못하고 있다. '돼지처럼 땀 흘린다'는 속담이 있지만, 돼지는 전혀 땀을 흘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최근에 와서 판명되었다. 포유 동물 중에서 가장 땀을 많이 흘리는 인간은 살갗 1평방미터당 한 시간에 1,000그램의 체액을 밖으로 배설하여 체온을 조절한다. 돼지는 기껏해야 30그램의 체액을 배설할까말까다. 양도 돼지의 두 배는 배설한다. 양에게는 또한 태양 광선을 반사시키고, 기온이 체온보다 높을 때 절연체 역할을 하는 두껍고 흰 털을 지니고 있다는 이점이 있다. 영국 캠브리지의 동물 생리학 농업 조사국의 마운트 씨에 의하면 다 자란 돼지는 섭씨 37도가 넘는 기온과 직사 광선 아래서는 죽고 만다. 요르단 계곡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섭씨 43도가 넘는 날이 거의 대부분이다. 또한 이 지역은 일년 내내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

보호막 역할을 하는 털도 없고, 땀을 흘려 체온을 조절할 수도 없는 까닭에, 돼지는 외부의 습기를 이용하여 피부를 습하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돼지는 깨끗한 진흙 속에 뒹굴어 체온을 조절한다. 그러나 깨끗한 진흙이 없을 경우 자기의 배설물로라도 피부를 습하게 만들어야 한다. 섭씨 29도 이하일 경우, 돼지는 우리 안의 잠자리와 식사 자리에는 배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온이 섭씨 29도를 넘어가면 어디나 가리지 않고 배설을 한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돼지는 더욱 '더러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돼지가 종교적으로 불결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실제 몸이 더럽기 때문이라는 이론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돼지의 본성이 자리를 가리지 않고 더러운 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돼지가 자기가 배설한 오물을 뒤집어쓰고 더러운 꼴로 있는 것은 중동지방의 덥고 척박한 서식지의 특성 때문인 것이다.

양과 염소는 중동 지방에서 최초로 가축이 된 동물들이다. 이것들이 가축으로 사육된 시기는 아마 기원전 9천 년경부터였을 것이다. 돼지는 이보다 2천 년이 늦게 가축으로 사육되었다. 아주 옛날 선사 시대의 농경 부락이 있었던 곳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낸 짐승의 뼈를 보면, 돼지는 거의 언제나 부락내 가축 분포 상 상대적으로 적었음이 밝혀진다. 즉 식용 동물의 유골들 중 돼지의 뼈는 5%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돼지에게는 그늘이 필요하고 진흙 구덩이가 필요한 반면, 식용할 젖도 없고 사람이 먹는 만큼 식량을 먹어 치우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현상은 이해할 수 있다.

힌두교인들이 쇠고기를 먹지 않는 금기의 사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산업화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고기만을 위해 사육되는 동물은 일종의 사치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반화된 설명은 산업화되기 이전의 목축인들에게 당연히 적용되며 그들은 고기만을 목적으로 가축을 사육하지는 않는다.

목축, 농경 혼합 경제 체제를 이루고 있던 중동 지역의 고대 사회에서 가축들은 젖, 치즈, 피혁, 분뇨, 단백질 등을 공급하는 주 원천으로, 그리고 쟁기 끄는 가축으로 근본 가치가 인정되었다. 염소, 양, 소 등은 이런 용도를 충족시켰고, 더불어 때때로 살코기를 공급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처음부터 돼지고기가 사치스러운 식품이었다. 돼지고기는 즙이 많고 부드러우며, 기름기가 많은 귀한 식품이었다.

기원전 7천 년에서 기원전 2천 년에 이르는 동안, 돼지고기는 더욱 사치스러운 식품으로 변했다. 이 기간 동안 중동의 인구는 거의 60배로 증가했다. 산에 있는 나무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이 벌채되었고, 특히 수많은 양, 염소떼들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말았다. 그늘과 물 등 돼지 사육에 필요한 자연 조건은 점점 사라지고, 이로 말미암아 돼지고기는 생태학적, 경제적으로 더욱 사치품으로 변했다.

쇠고기를 못 먹게 한 금기와 마찬가지로, 돼지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유혹이 크면 클수록 종교적 금기 조치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유혹과 금기의 이런 관계는 여러 신들이 근친상간이나 간통과 같은 성적인 유혹을 물리치는 데 늘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적절한 해답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유혹과 금지의 관계를 단지 사람의 식욕을 유혹하는 음식물에만 적용하겠다. 중동은 돼지 사육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아주 맛이 있는 고기로 귀하게 여겨지고 있다.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따라서 야훼는 돼지가 불결하니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명령했다. 알라신도 똑같은 이유에서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중동 지방은 먹기에 충분할 만큼의 돼지를 기르기에는 생태학적으로 적절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소규모의 사육은 유혹만 크게 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차라리 돼지고기의 식용을 전면 금지하고 양, 염소, 소 등을 치는 데 모든 정성을 다 바치는 것이 더 나았다. 돼지는, 고기맛은 좋지만 사료와 시원한 우리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비쌌던 것이다.


금기의 사회적인 기능

물론 의문점은 남아 있다. 특히 성서에 금지된 다른 동물들 - 독수리, 매, 뱀, 달팽이류, 조개류, 비늘 없는 물고기 등 - 은 왜 금기하고 있는가? 이제는 더 이상 중동에서 살지 않는 유태인들과 회교도들까지(물론 엄수하는 정도와 열성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아직도 고대의 식사 율법을 지키고 있는 까닭은 또 무엇인가? 성서에 금기로 열거된 새와 동물들은 대체로 두 범주로 선명하게 나눌 수 있다. 첫째, 물수리, 독수리, 매 등의 조류는 식량 자원으로 가치가 없다. 둘째, 조개류 등은 목축, 농경 혼합 경제 속의 주민들에게는 손에 접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두 범주에 속하는 금기된 동물들은 그 어느 것도 우리가 관심을 갖는 그런 문제(분명히 이 기이하고 비경제적인 금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비경제적 문제)는 야기하지 않는다. 먹이로 쓰려고 독수리를 찾아 나선다든지, 식용 조개를 찾아 사막 위의 50마일을 헤맨다든지 하면서 시간을 낭비한다고 해서 남을 욕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 종교상 식용으로 인정된 모든 음식물에 관한 관행이 생태학적 근거가 분명히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금기는 사회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다. 예컨대 금기를 준수하면 그로 인해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동질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기능 같은 것이 있다. 이러한 기능은 중동에 있는 고행을 떠나 이국에서 사는 현대 회교도들이나 유태인들이 돼지 금기의 식사 율법을 잘 지키도록 해주고 있다. 이런 관행이 지닌 난점은, 그 관행이 회교도와 유태인들에게 쉽사리 대체할 수 있을 별다른 음식물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양가가 높은 음식물을 금기로서 식용에서 제외시킴으로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복지를 상당히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나는 이 의문에 대해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러나 또 다른 유혹도 이기고 싶다. 즉 모든 것을 다 설명해 보겠다는 유혹 말이다. 이 수수께끼의 이면에 있는 돼지 숭배자들을 생각해 본다면 돼지 혐오자들에 대한 의문들이 쉽게 풀릴 것이다.

돼지 애호자들은 신이 돼지고기를 역겨워한다고 믿고 있는 회교도나 유태인들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지닌 자들이다. 돼지 숭배의 조건은 단순히 돼지고기 요리를 미각적인 면에서 미친 듯 좋아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럽, 아메리카인들이나 중국인들의 요리 전통 등 많은 요리법에서 돼지 비계와 살코기는 아주 고급 음식물로 쳐진다. 돼지 숭배에는 이런 전통과는 상관없는 어떤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인간과 돼지 사이에 존재하는 전체 공동체와 연결되는 여러 가지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 회교도나 유태인들에게는 자기들이 인간으로 살아남는 데 돼지가 위협적인 존재이지만 돼지 숭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돼지와 사귐이 없이는 진정한 인간적 삶이 영위될 수 없다.

돼지 숭배자들은 기르고 있는 돼지를 자기 식구로 생각하고, 돼지들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돼지들과 말을 주고받고, 돼지들을 애무하고 쓰다듬어 주며, 끈으로 매어 들로 데리고 다니고, 이름을 붙여 부르고, 돼지들이 아프거나 다치면 마음 아파하고, 가족의 식탁에서 음식을 추려서 먹인다. 그러나 힌두교인들의 암소 숭배와는 다르게 돼지를 의무적인 희생 제물이 되게도 하고, 특별한 명절에는 돼지들을 잡아먹기도 한다. 제사용이나 성스러운 축제용으로 돼지를 잡아죽이기 때문에 돼지 숭배는 힌두교 농부들과 그들이 숭배하는 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 관계보다 더 폭넓은 인간과 동물 간의 유대 관계를 이해하게 해준다고 하겠다. 돼지 숭배의 절정은 돼지의 살과 그 주인인 사람의 살을 결합시키고 돼지의 혼과 조상들의 혼을 결합시키는 때이다.

돼지 숭배에는 고인이 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사랑하는 돼지를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잡아 질그릇에 넣어 튀기는 의식이 있다. 돼지 숭배의 또 다른 의식 중에는 소금에 절이고 냉동한 돼지 뱃가죽 비계를 처남의 입에 꽉 처넣는 의식도 있다. 그러면 그 처남이 성실하고 행복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돼지 숭배에는 한 세대마다 한두 번씩 열리는 돼지 축제 한마당이 있다. 이 축제는, 대개가 돼지고기를 열망하는 조상들을 기쁘게 하려 할 때, 또 공동의 건강을 축원할 때, 또는 미래에 있을 여러 전쟁에 이길 수 있도록 기원하려 할 때 열리게 되는데 이런 축제가 열리면 사람들은 자기 부족들이 기르고 있는 대부분의 다 큰 돼지를 한꺼번에 잡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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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서프라이즈>에 가 보니 유시춘씨가 아주 재미있는 글을 써 놓았는데, 뤼시앙 골드만이 나오고 김우창이 나오고 만해가 나오는데 글을 읽어보고 우습기도 하고 눈쌀이 지푸려지기도 하였다. 이 글을 읽어보고 노빠 계관시인 역할을 하였던 노혜경씨가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동안에 그 역할을 때로는 김정란, 때로는 유시춘이 하고 있구나는 생각이 든다.  

흔히들 학자가 '학설을 굽혀서 이 세상에 아부하는 것'을 '곡학아세'라 그런다.  노혜경, 김정란, 유시춘씨 등은 왜 김대중 정권 때 여당의 모 의원이 이문열을 향해 '곡학아세'한다고 해서 한참 옥신각신했었던 사실을 망각하고 노무현이란 한 인물을 위해 자신이 배운 문학공부를 비틀어 사용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파병하였고 김선일의 죽음이 있었을 때 김정란 시인은 탈을 (persona)를 쓰고 김선일의 죽음을 '인류의 원죄'에 귀속시켜버리며 노무현 대통령의 죄를 '형이상학'의 뒤로 숨겨버렸다. 엄연히 파병이란 산문적 사실이 존재하고 이것을 결정한 것은 대통령이고 이 부당한 결정에 손을 들어준 것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이었다. 결국 시인 김정란이 보르레르가 저리 나자빠질 정도로 써재긴 글은 오로지 노무현을 '형이상학'이란 추상의 울타리로 숨기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물에 대한 종교적 맹신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연정 문제를 두고 이번에는 유시춘씨가 나섰다. 이번에는 뤼시앙 골드만이 <숨은 신>이란 글에서 분석한 '비극적 세계관'을 만들어 노무현을 파스칼과 같은 인물, 만해와 같은 인물로 기꺼이 만들어버렸다. 과연 유시춘씨가 무엇 때문에 '파스칼 - 만해 - 노무현'의 동일적 세계관의 담지자로 만드는가?

골드만은 <숨은 신>이란 글에서 17세기 프랑스 사회를 분석하였다. 17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절대왕정과 타협하여 봉건 세력들에 대립하던 '법복귀족'이 강화된 왕권의 관료기구로 인해 왕권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왕권에 저항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부터 법복귀족들의 '비극적 세계관'이 드러난다.

노무현 대통령을 위한 유시춘씨의 '형이상학적 상상력'은 여기에서부터 작동한다. 생각해보라. 17세기 파스칼과 같은 장세니스트들이 대다수 법복귀족 출신이거나 이들과 가까웠던 사람이고  '법벅귀족'들이 지방의 세수원이나 법정의 변호사로 활약하였듯이 노통 역시 회계와 관련한 변호사 출신이다. 이 얼마나 유사한 그림이던가? 거기다가 허위적이고 타락한 현실에 저항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위치에 있어야만 하는 인물이 현 대통령이라고 생각해보면 그럴싸한 색깔 입히기가 얼마나 좋은가?

유시춘씨가 주장하듯이 골드만에 의하면 허위적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은 이 세상에 굽히고 들어가는 방법 외에 1) 이 세상을 등지는 방법, 2) 세상을 진실된 것으로 뜯어 고치도록 현실 속에 행동하는 방법, 3) 진실의 관점에서는 세상을 거부하나 현실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는 방법 등이 있다. 이 중에 비극적 세계관은 3)에 해당한다. 17세기 프랑스 사회의 파스칼이 그랬고 만해 한용운이 그랬다. 해서 파스칼에 의하면 신은 현재 부재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는 역설이 나온다. 만해가 현실적으로 '님'의 부재를 인정하지만 '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역설이 나오는 것이다.

과연 노통은 이 세 가지 유형 중에 어떠한 것에 해당할까? 유시춘씨에 의하면 3)에 해당하지만 내가 볼 때 노무현 대통령은 이 세 가지 유형 중에 어느 유형도 아니다. 이 세상을 등지고 초월적 진리 속에 빠지기에는 그가 가진 세속적 욕망이 너무나 크다. 노통이 욕망이 크다는 것은 '올인 정치'의 도박정치를 구사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판돈을 크게 걸면 얻는 것도 많은 법이니 노통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정치인이 아니다.  세상을 진실된 것으로 뜯어 고치도록 행동하는 정치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세속적 욕망이 너무나 큰 까닭에 이 세속적 욕망과 세상을 뜯어고치는 것을  맞바꿀만한 의지와 능력도 없는 인물이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렇다고 '비극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도 아니다. 그가 처한 위치가 그렇다. 정치인으로서의 최고 지위에 올랐는데 17세기 프랑스 사회의 '법복귀족'의 위치에 비견될 수 있겠는가?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만해에 비교될 수 있겠는가? 명백히 말하자면 그는 세상의 허위 속에 고뇌하는 이 세 가지 유형 중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굽히고 들어가는 인물에 속하는 것이다.

아마 유시춘씨는 조선과 한나라당 민주당이라는 기득권과 지역주의 세력과 타협을 거부하지만 이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궁극적 진실에 이르지 못하는 역설이 나온다는 점에서 이 글의 착안점을 찾았으리라 생각된다. 유시춘씨에 의하면 이러한 대통령의 뜻도 모르고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조선에 제발로 인터뷰하고 그걸 자랑스럽게 지들 홈피에 올려놓는 촌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무현의 사랑법이 비극적라고 이야기를 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건 인간의 글이 아니라 기도문이다. 17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파스칼이 맞닦드렸던 현실과 21세기 한국 정치질서 구조를 이렇게 링크시켜 이용한다는 것 자체도 어처구니 없다. 만해가 살았던 식민지 구조와 21세기 지역주의 정당이 어떠한 구조적 유사성이 있던가? 유시춘씨기 애써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여러가지 사실들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야 말로 대권 후보되자마자 곧바로 '안티조선'의 기본적 정신을 폐기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조선과 자랑스럽게 인터뷰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노통이 중앙의 사주인 홍석현씨를 청와대로 불러 국빈대접하고 그도 모자라 주미대사로 기용하여 재벌 세력과 굳건한 연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기본적 사실을 애써 감추며 '비극적 세계관'의 담지자로 노무현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유시춘씨의 노통에 대한 태도를 보면 너무나 '희극적 사랑법'을 구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명문이 탄생하는 순간이군요.", "참으로 절절하군요.", "시나브로 눈시울이 적셔옵니다.", 저의 눈을 씻어냅니다." .....

유시춘씨의 기도문 뒤에 붙은 노빠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참으로 절절들 하군요. 노빠 문인들은 문학을 가장한 이런 속물스런 글질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출처: 진보누리 - 평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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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보로 살지 않으려면 적어도 ‘소비의 속성’은 들여다볼 줄 아는 센스(!)가 필요하다. 자본은 무한정 증식하려는 본능을 가지며 그런 자본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구입하지 않거나 구입한 물건을 수명이 다하도록 사용하려는 ‘전통적인’ 태도는 매우 곤란한 것이다. 그런 태도를 무너트리기 위해 자본은 소비를 촉진하는 두 가지 공작을 한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필요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광고). 계속 새로운 물건으로 바꾸게 만드는 것(유행). 공작은 물론 갈수록 발전한다. 당대의 가장 감각적인 머리들(이른바 프로들)이 총동원되어 만들어지는 오늘의 광고는 옛 ‘약 선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요컨대 오늘의 광고의 목표는 어떤 상품의 쓰임새를 부풀려서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 상품을 문화로 만드는 데 있다. 알다시피 문화란 쓰임새를 뛰어넘는 것이다. 공작의 효과는 어릴 적부터 광고에 길들어 자란 젊은 세대에서 두드러진다. 그들에게 상품을 구입하는 일은 문화를 향유하는 행위이며 브랜드는 ‘장사꾼의 표찰’이 아니라 작가의 사인이다. 그들은 소비를 통해 문화적 감동에 빠지며 소비하지 못할 때 문화적 결핍에 시달린다. 물론 이건 젊은 세대만의 모습은 아니며, 심지어 우파만의 모습도 아니다. 우디 알랜은 <애니홀> 도입부에서 카메라(우리)를 보며 뇌까린다. “쇼핑백을 들고 카페를 전전하면서 사회주의를 외치는 인간만 아니면 됐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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