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쉬운’ 진보는 오만하다-홍세화

‘쉬운’ 진보는 오만하다

진보에 대한 끊임없는 학습과 성찰을 통해 성숙하지 못하는 민주노동당
당원 배가엔 열심이되 교육엔 소홀한, 홍보엔 열심이되 정책 연구엔 태만한…

▣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hongsh@hani.co.kr

정권은 “아버지, 바위 굴러가요!”처럼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내 품에 안겨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더욱이 보수·수구 정치세력만의 잔치판이었던 한국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집권을 도모할 때엔 더욱 시간의 진보성에만 기대할 수 없다. 더구나 사회 진보의 진정성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진보함으로써 담보되는 것이다. 진보세력의 손쉬운 집권은 진정한 진보의 성취가 될 수 없다. 스스로 끊임없는 학습과 성찰을 통해 자기성숙을 모색해야 하며, 성실하고 겸허한 자세로 사회 구성원들이 의식과 가치관을 바꾸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 지난한 노력과 운동의 결실로 진보정당이 집권했을 때만이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

진보는 어렵고 느리고 불편한 것

오늘날엔 스스로 ‘나는 무식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대중화된 교육, 보편화된 대중매체의 혜택을 받고 있어서다. 그러나 본디 공짜는 없다. 대중화된 교육 과정과 보편화된 대중매체의 주체는 국가권력과 자본이다. 민주적 통제가 부족하고 민중적 통제가 없는 국가권력과 자본의 헤게모니 작동에 의해 형성된 의식과 가치관은 서민 대중에겐 ‘존재를 배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피노자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이미 형성된 의식과 가치관을 고집한다. 그렇게 사회 구성원들이 고집하는 의식과 가치관을 바꾸는 것만큼 사회가 진보할 수 있기에, 진보는 어렵고 느리고 또 불편한 것이다.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말하지 않더라도, 분단 현실과 압축 성장은 이 사회에 ‘다양한’ 진보를 낳았고, 진보에 대한 오랜 억압 과정은 역으로 ‘쉬운’ 진보를 낳았다. 이 땅의 진보세력은 아직 내적으로 성숙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사회 진보는 무척 어려운데, 진보세력의 일원임을 자처하기는 아주 쉬운 토양인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2012년 집권’ 주장도 사회 진보의 어려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한, 쉬운 진보의 오만한 전망에서 온 것이다. 그 시나리오를 믿는 사회 구성원은 없다. 설령 신진 진보정치 세력의 구호를 애교로 받아들인다 해도, 민주노동당이 그 목표에 상응하는 성실성과 치열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책임 있는 정당으로 비칠 수 없다.


△ 민주노동당은 왜 당원 배가운동에는 열심이지만, 당원 교육에는 소홀한가. 진보에는 치열한 학습과 성찰이 뒷받침돼야 한다. (사진/ 윤운식 기자)

가령 당원 배가운동에는 비교적 열심이지만, 당원 교육에는 무척 소홀하다. 양적 팽창에 관심을 기울이고 당원의 질적 성숙과 고양에 등한한 것이다. 10명이 국회의원으로 진입하면서 중앙당이 기자실을 확대해 당을 홍보하는 데에는 비교적 열심이었다. 진보정치 세력에게 호의적일 수 없는 한국 언론에 대한 문제의식도 부족했고, 진보정당의 정치력의 원천을 홍보에 의존하려는 인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기자실을 확대하는 것만큼 당원 교육 프로그램이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은 기존 보수·수구 정당에 준하는 구색 맞추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당원 교육 현장은 당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며 소통하는 자리라는 점만으로도 보수정당이 기대할 수 없는 뜻깊은 자리다. 그런 소통과 만남, 그리고 토론의 자리를 활성화하지 못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보수 정당의 정치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여준다. 더욱이 다급하게 변화하는 세계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할 줄 아는 진보적 안목과 소양을 위해서도 당원들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은 필수적이다. 정치, 경제, 노동, 문화, 통일, 군사, 생태, 환경, 여성, 통일, 미국 등 각 부문과 사안에 대해 민주노동당의 당원으로서 진보의 감수성과 안목, 소양을 공유해야 하지 않는가.

정책 연구와 개발에도 공을 들이지 않았다. 사회 구성원들은 부유세,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구호로서만 민주노동당을 알고 있을 뿐, 당원들에게조차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것이 이루어지면 사회가 어떻게 바뀐다는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했다. 당원들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회 구성원들을 설득하겠다는 것인가? 한마디로, 구호만 있을 뿐 정책이 없는 것이다.

‘2012년 진보 제일 야당’을 말하라

이처럼 당원 교육도 소홀히 하고 정책 연구와 개발도 소홀히 하는 진보정당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다. 당 홍보를 통해 지지율 상승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결국 국회에 진입한 국회의원들의 활동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당직·공직 분리 원칙에 집착하면서, 당원들조차 최고위원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형편인데 이원 조직의 굴레를 씌웠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2012년 집권을 말한 것인지 기가 찰 노릇이다.

‘쉬운’ 진보의 오만은 각자 자신의 진보만을 고집하며 학습을 멀리하게 한다. ‘다양한’ 진보가 각개약진할 뿐 소통하지 않는다.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통과 만남도 없고, 학습과 토론도 없는, 그래서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가 이루어질 수 없는 토대인데 거꾸로 민주주의 원칙이 강조된다. 하나의 정파가 당을 지배한다. 현실대응 능력도 부족하고 책임지는 자세도 없는 진보정당이 탄생한다. 이것이 오늘 민주노동당의 슬픈 자화상이다.

지난해 말 스스로 열린우리당 ‘2중대’ 소리를 자랑스럽게 하면서 국가보안법 폐지에 전력투구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런데 전력투구를 요구했던 당직자 중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행정수도 법안에 대해선 제때에 당론을 정하지 못했다. 분명 책임지는 정당의 모습이 아니다. 독도 문제에는 진보정당의 대응이라고 할 수 없는 반응을 즉각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에 반해, 서민들에게 분노와 슬픔을 주는 집값 상승, 부동산 거품에 대해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내 입으로 “진보정당, 맞아?” 소리까진 차마 못하겠지만…. 차라리 ‘2012년 진보 제일 야당’을 말하라. 국정 현안의 주 토론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꿈같은 일이다. 무엇보다 학습하고 연구하고 개발하라. 스스로 겸허하여 쉬운 진보의 오만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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