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인간아 > 돼지 숭배자와 돼지 혐오자 - 마빈 해리스

 

               돼지 숭배자와 돼지 혐오자

 

 


                                                               - 마빈 해리스

 


돼지에 관한 수수께끼


비합리적인 식생활 습관에 대한 사례를 누구나 대개는 한두 개 알고 있다. 중국인들은 우유를 싫어하는 대신 개고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서양인)들은 우유는 좋아하지만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브라질의 어떤 원시 부족은 사슴 고기는 질색으로 여기는데 개미는 맛있게 먹는다. 이처럼 기이한 식생활 풍속은 세계 곳곳에 깔려 있다.

돼지에 관한 수수께끼는 '거룩한 어머니 암소'다음으로 거론하기에 좋은 주제가 될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같은 동물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왜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왜 싫어하는가 하는 데 대한 해명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돼지 혐오 자들이 지니고 있는 이 수수께끼의 이면은 유태교도와 회교도와 기독교도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고대 히브리의 신은 "돼지는 불결한 동물이기 때문에 먹거나 손을 대면 부정을 탄다."고 선포했다(창세기와 레위기에서 각각 한 번씩). 그로부터 1,500년 후, 알라신은 그의 예언자 마호메트를 통하여 돼지는 이슬람교도에게도 역시 불결하고 부정한 동물이라고 선언했다. 돼지는 알곡이나 쭉정이들을 다른 동물보다 효과적으로 고농도 지방과 단백질로 바꾸는 동물이지만, 수백만의 유태인들과 수 억의 회교도들은 아직도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친다.

여기에 견주어 광신적인 돼지 숭배자들의 전통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돼지 숭배의 세계적 중심지는 뉴기니아와 남태평양 멜라네시아 군도다. 이 지역의 '마을에 사는 신림 부족들'은 돼지를 신성한 동물로 여겨 조상들에게 바치고 혼인이나 축제와 같은 모든 중요한 행사 때마다 잡아먹는다. 많은 부족들은 선전 포고를 하거나 전쟁을 그만두자고 할 때 돼지를 제물로 바친다. 이 부족들은 이 세상을 떠난 조상들이 돼지고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돼지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망이 대단하여 때때로 큰 축제를 열어 부족이 키우던 거의 모든 돼지를 깡그리 잡아먹는다. 몇 날 며칠을 두고 부락민들과 축제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돼지고기를 꾸역꾸역 배속에 쑤셔 넣는다. 그 중에는 더 많이 먹기 위해 소화 안된 것을 토해내고 다시 쑤셔 넣는 사람도 있다.

이런 소란이 끝나면, 돼지떼는 아주 적은 수로 줄어들어 축제 첫날의 돼지 수로 회복시키려면 몇 년에 걸치는 고통스러운 절제의 기간이 필요하다. 돼지 수가 원상 회복되면 게걸스러운 난장판이 또다시 벌어진다. 이런 식으로 매우 부조리한 것같이 보이는 돼지 축제가 기이하게 반복된다.


구구한 해석

나는 먼저 유태교와 회교의 돼지 혐오자들 문제를 거론하겠다. 야훼나 알라와 같은 '수준 높은'신들이 인류 대다수가 즐겨 먹는, 해롭지 않고 오히려 익살스러운 이 동물을 저주하는 마뜩찮은 일을 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성서와 코란에 언급된 돼지 금기에 공감을 표하는 학자들은 여기에다 여러 가지 설명을 가져다 붙이고 있다. 가장 설득력 있었던 설명은 돼지가 문자 그대로 '더러운 동물(자기의 배설물 위에서 뒹굴고 사람의 배설물을 먹으므로)'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불결한 것에 종교적 혐오감을 관련시키려는 시도에는 모순이 있다. 좁은 우리 속에서 키울 경우, 소도 자기의 오물과 배설물 속에서 뒹군다. 그리고 굶주리게 되면 소도 사람의 배설물을 맛있게 먹는다. 개나 닭도 그러하지만, 여기에 호들갑 떠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고대인들은 깨끗한 우리에서 기를 경우 돼지도 까다로운 애완용 동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순수하게 미학적인 '청결'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한다면, 메뚜기나 방아깨비가 '청결'하다고 분류한 성서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다. 곤충이 돼지보다 심미적으로 더 위생적이라는 주장은 신앙의 명분이 되지 못할 것이기에.

이런 모순을 발견한 사람은 르네상스 초기 유태교 '랍비'였다. 12세기 이집트 카이로에서 살라딘의 전의였단 모세 마이모니데스는 유태교와 회교가 돼지를 거부한 이유를 자연 과학적으로 설명해 낸 최초의 사람이었다. 마이모니데스는 하나님이 공공위생 수단으로 돼지고기 금기를 선포했다고 설명했다. 돼지고기는 '몸에 해롭고 나쁜 영향을 끼친다'라고 그 랍비는 기록하고 있다. 마이모니데스가 말한 것은 의학적으로 따지자면 타당하지 않았지만, 황제의 시의였기 때문에 그의 판단은 널리 존중받았다.

19세기 중엽 돼지고기를 날로 먹었을 경우, 선모충병이 생긴다는 사실이 발견되자, 마이모니데스의 혜안이 정확했음이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혁신적인 유태인들은 성서의 율법이 지니는 합리적 토대를 발견했다고 기뻐하며 즉각 돼지고기 금기를 재해석했다. 돼지고기는 잘 익히면 몸에 해롭지 않다. 그러므로 잘 익혀 먹는다면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자 전통적인 랍비들은 보다 근본적인 주장을 내세워 자연 과학적인 해석을 전면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야훼가 오로지 자기 백성의 건강만 보호하고자 하셨다면, 돼지고기를 잘 익혀 먹으라고 가르치셨을 것이지, 아예 먹지 말라고 가르치셨을 리가 없다. 야훼의 심중에는 분명히 육체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어떤 다른 중요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시됐다.

이런 신학상의 모순 외에도 마이모니데스의 설명은 의학과 전염병학 쪽의 반대 견해에 부딪히게 되었다. 돼지는 인간 질병의 보균 동물이다. 그러나 유태교나 회교에서 자유롭게 먹도록 허용한 다른 가축들도 역시 균을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쇠고기를 익혀 먹지 않으면 촌충이라는 기생충에 감염된다. 촌충은 사람의 장 속에서 자라는 16∼20피트의 기생충으로 악성 빈혈을 일으키고 전염병의 저항력을 약화시킨다. 소․염소․양 들도 또한 브르셀라균을 보유하고 있다. 브르셀라병은 후진국에 공통적으로 많은 박테리아에 의한 전염병인데, 열이 나고 오한이 들며 땀을 흘리고 몸이 허해져 고통과 통증을 수반하는 병이다. 가장 위험한 형태는 브르셀로시스 멜리텐시스인데 이 병은 양과 염소가 옮긴다. 이 병의 증상으로 혼수 상태, 피로, 신경 과민 그리고 때때로 정신 신경증이라고 오진되기도 하는 정신적 압박감 등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탄저열은 돼지뿐만 아니라 소, 양, 말, 염소, 당나귀도 옮기는 병인데, 치명적인 경과도 없고 대다수 전염자에게는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 선모충병과는 달리, 급속히 악화되는 병이다. 처음에는 몸이 펄펄 끓도록 열이 나다가 혈액이 중독되어 결국 죽기에 이른다. 이전에 유럽과 아시아를 휩쓸었던 탄저열병의 무서운 전염성은 1881년 루이 파스퇴르가 탄저열병 왁친을 발견하기 전가지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야훼가 탄저열병의 보균자인 가축들을 접촉하지 말라는 금기를 내리지 않았다는 점이 특히 치명적으로 마이모니데스의 자연 과학적 설명을 설득력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왜냐 하면, 탄저열병을 가진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성서가 기록되던 시기에도 이미 밝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것처럼 애굽인들에게 내린 역병 가운데 하나는 동물의 탄저열병 증상과 인간의 질병이 관계가 있음을 밝혀 주고 있다.


⋯⋯사람과 가축은 종기가 나서 곪아 터지게 되었다.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종기 때문에 모세 앞에 나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마술사들까지도 온 이집트에 번진 종기에 걸렸던 것이다.(「출애굽기」 9:10∼11).


이런 반대 견해들에 부딪혀 대부분의 유태교와 회교도 신학자들은 돼지 혐오의 자연과학적 근거를 찾는 노력을 포기했다. 솔직하게 신비적인 입장에서 그 금기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요즘에 와서는 더 공감을 얻게 되었다. 이 신비적 입장은 어떤 것인가 하면, 신의 금기들을 충실히 지키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야훼가 심중에 지닌 의도를 정확히 알려 하거나 밝히려고 하지 않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견해이다.

현대 인류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곤경에 부딪혔다. 예를 들면 모세 마이모니데스는 비록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황금 가지』의 저자로 이름난 제임스 프레이져 경보다 이 금기에 관한 설명에서는 더 정확한 설명에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레이져 경은 "돼지가 소위 불결하다고 열거된 모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돼지를 먹지 말라는 이유는 대부분의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신성한 동물들이기 때문이었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돼지 혐오의 이유를 밝히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 하면, 양, 소, 염소도 역시 중동 지방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지만 그런 동물의 고기는 그 지역의 모든 민족들과 종교 집단들이 즐겨 먹고 있다. 특히 시나이산 기슭에서는 황금 송아지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있는 까닭에 프레이져의 논리에 따르면 히브리인들에게는 돼지보다 소가 훨씬 더 불결한 동물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학자들은 성서와 코란 속에서 금기시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돼지도 여러 다양한 부족들의 토템 상징이 된 적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례는 역사상 먼 옛날에나 있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이 있다면 소㊥양㊥염소와 같은 '정결한'동물들도 토템으로 숭배받을 수 있었으리라는 가능성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토테미즘을 주제로 한 많은 문헌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토템은 늘 식용 가치가 없는 동물이었다. 호주와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들 가운데 가장 널리 숭앙 받는 토템들은 큰 까마귀, 핀치와 같은 별로 식용 가치가 없는 조류나 각다귀, 개미, 모기 등과 같은 곤충들이나 구름이나 옥석과 같은 무생물들에게까지 걸쳐 있다. 더군다나 식용 가치가 있는 동물이 토템이 될 경우에도, 그 동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어디에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처럼 여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돼지가 토템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돼지 식용 금기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누구는 쉽게 "돼지는 터부시되었기 때문에 터부시되었다."라고 단언할지 모르지만.

나는 마이모니데스의 접근 방식이 프레이져의 설명 방식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이 랍비는 세속적이고 실제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강과 질병 같은 자연적 조건 속에서 돼지의 금기를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난점이 있었다면 돼지 혐오에는 그에 상응한 그 나름의 환경적 조건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그의 견해가 오로지 인체 병리학에 몰두라는 외과 의사가 가진 전형적인 편협성으로 말미암아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


돼지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공공 보건의 개념을 넓힐 필요가 있다. 즉 그 개념 속에는 자연 공동체와 문화 공동체에서 동물, 식물, 인간이 서로 공존해 나가는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과정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돼지 사육이 중동 지방의 기본적인 문화와 자연 생태계의 조화를 깨뜨릴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성서와 코란은 돼지를 죄가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는 기원전의 히브리인들(아브라함의 자손들, 기원전 2천 년경)이 메소포타미아 강가의 계곡과 이집트의 중간 지대에 있는, 땅이 척박하고 인구가 희박한 건조 지대에서 살아 나가는 데 문화적으로 잘 적응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야만 한다. 기원전 13세기, 팔레스타인 요르단 계곡을 정복하고 있던 시기에 히브리인들은 거의가 소, 양, 염소 등을 기르며 살아 나가는 유목민 생활을 했다. 모든 유목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오아시스와 큰 강을 소유하고 있던 정착 농경인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때때로 이 친분 관계가 밀접해져 한결 더 정착 문화에 적응하는 생활 양식을 갖기도 했다. 이런 사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았던 아브라함의 후손, 이집트에서 살았던 요셉의 추종자들, 서쪽 네겝 지방에서 살았던 이삭의 추종자들 등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다윗왕과 솔로몬 치하에서 도시 취락 생활이 절정에 달했던 때에도, 소, 양, 염소 등을 치는 목축업은 아주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다.

농업과 목축이 혼합된 전반적으로 복합체적인 경제 형태 안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신의 금지 명령은 완벽한 생태학적 전략이 되었다. 엉거주춤 정착하고 사는 농경인들에게도 돼지는 재산이기는 커녕 오히려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물며 척박한 거주 지역 내에서 돼지를 기를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유목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지구상에 목축을 위주로 하고 있는 지역들은 대개가 비를 이용한 농업을 하기에는 너무 척박하고 관개도 쉽지 않은, 헐벗은 들판과 언덕받이들로 이루어진 땅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땅에서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가축으로는 되새김 동물, 즉 소, 양, 염소 등이 있다. 되새김 동물은 다른 어떤 포유 동물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섬유소가 주성분인 풀, 나뭇잎 등을 소화시킬 수 있게 위의 아래쪽에 벌집위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돼지는 원래 숲지대와 그늘진 강둑에서 사는 동물이다. 잡식 동물이기는 하지만 주식물은 섬유질이 적은 나무 열매, 과일, 식물 뿌리, 특히 곡식을 주로 먹기 때문에 인간과 직접 경쟁하는 경쟁자일 수밖에 없다. 돼지는 풀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따라서 유목, 유랑민들 치고 돼지를 많이 기르는 사람들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돼지가 지니고 있는 더 큰 약점은 마실 수 있는 젖이 없고 먼 곳으로 몰고 다니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돼지는 무엇보다도 네겝이나 요르단 계곡 등 성서와 코란에서 나오는 여러 지방의 덥고 건조한 기후에는 잘 견뎌 내지 못하는 신체 구조를 지니고 있다. 소, 양, 염소 등과 비교해 볼 때, 돼지는 체온 조절 능력을 몸속에 별로 잘 갖추지 못하고 있다. '돼지처럼 땀 흘린다'는 속담이 있지만, 돼지는 전혀 땀을 흘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최근에 와서 판명되었다. 포유 동물 중에서 가장 땀을 많이 흘리는 인간은 살갗 1평방미터당 한 시간에 1,000그램의 체액을 밖으로 배설하여 체온을 조절한다. 돼지는 기껏해야 30그램의 체액을 배설할까말까다. 양도 돼지의 두 배는 배설한다. 양에게는 또한 태양 광선을 반사시키고, 기온이 체온보다 높을 때 절연체 역할을 하는 두껍고 흰 털을 지니고 있다는 이점이 있다. 영국 캠브리지의 동물 생리학 농업 조사국의 마운트 씨에 의하면 다 자란 돼지는 섭씨 37도가 넘는 기온과 직사 광선 아래서는 죽고 만다. 요르단 계곡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섭씨 43도가 넘는 날이 거의 대부분이다. 또한 이 지역은 일년 내내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

보호막 역할을 하는 털도 없고, 땀을 흘려 체온을 조절할 수도 없는 까닭에, 돼지는 외부의 습기를 이용하여 피부를 습하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돼지는 깨끗한 진흙 속에 뒹굴어 체온을 조절한다. 그러나 깨끗한 진흙이 없을 경우 자기의 배설물로라도 피부를 습하게 만들어야 한다. 섭씨 29도 이하일 경우, 돼지는 우리 안의 잠자리와 식사 자리에는 배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온이 섭씨 29도를 넘어가면 어디나 가리지 않고 배설을 한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돼지는 더욱 '더러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돼지가 종교적으로 불결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실제 몸이 더럽기 때문이라는 이론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돼지의 본성이 자리를 가리지 않고 더러운 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돼지가 자기가 배설한 오물을 뒤집어쓰고 더러운 꼴로 있는 것은 중동지방의 덥고 척박한 서식지의 특성 때문인 것이다.

양과 염소는 중동 지방에서 최초로 가축이 된 동물들이다. 이것들이 가축으로 사육된 시기는 아마 기원전 9천 년경부터였을 것이다. 돼지는 이보다 2천 년이 늦게 가축으로 사육되었다. 아주 옛날 선사 시대의 농경 부락이 있었던 곳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낸 짐승의 뼈를 보면, 돼지는 거의 언제나 부락내 가축 분포 상 상대적으로 적었음이 밝혀진다. 즉 식용 동물의 유골들 중 돼지의 뼈는 5%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돼지에게는 그늘이 필요하고 진흙 구덩이가 필요한 반면, 식용할 젖도 없고 사람이 먹는 만큼 식량을 먹어 치우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현상은 이해할 수 있다.

힌두교인들이 쇠고기를 먹지 않는 금기의 사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산업화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고기만을 위해 사육되는 동물은 일종의 사치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반화된 설명은 산업화되기 이전의 목축인들에게 당연히 적용되며 그들은 고기만을 목적으로 가축을 사육하지는 않는다.

목축, 농경 혼합 경제 체제를 이루고 있던 중동 지역의 고대 사회에서 가축들은 젖, 치즈, 피혁, 분뇨, 단백질 등을 공급하는 주 원천으로, 그리고 쟁기 끄는 가축으로 근본 가치가 인정되었다. 염소, 양, 소 등은 이런 용도를 충족시켰고, 더불어 때때로 살코기를 공급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처음부터 돼지고기가 사치스러운 식품이었다. 돼지고기는 즙이 많고 부드러우며, 기름기가 많은 귀한 식품이었다.

기원전 7천 년에서 기원전 2천 년에 이르는 동안, 돼지고기는 더욱 사치스러운 식품으로 변했다. 이 기간 동안 중동의 인구는 거의 60배로 증가했다. 산에 있는 나무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이 벌채되었고, 특히 수많은 양, 염소떼들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말았다. 그늘과 물 등 돼지 사육에 필요한 자연 조건은 점점 사라지고, 이로 말미암아 돼지고기는 생태학적, 경제적으로 더욱 사치품으로 변했다.

쇠고기를 못 먹게 한 금기와 마찬가지로, 돼지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유혹이 크면 클수록 종교적 금기 조치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유혹과 금기의 이런 관계는 여러 신들이 근친상간이나 간통과 같은 성적인 유혹을 물리치는 데 늘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적절한 해답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유혹과 금지의 관계를 단지 사람의 식욕을 유혹하는 음식물에만 적용하겠다. 중동은 돼지 사육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아주 맛이 있는 고기로 귀하게 여겨지고 있다.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따라서 야훼는 돼지가 불결하니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명령했다. 알라신도 똑같은 이유에서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중동 지방은 먹기에 충분할 만큼의 돼지를 기르기에는 생태학적으로 적절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소규모의 사육은 유혹만 크게 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차라리 돼지고기의 식용을 전면 금지하고 양, 염소, 소 등을 치는 데 모든 정성을 다 바치는 것이 더 나았다. 돼지는, 고기맛은 좋지만 사료와 시원한 우리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비쌌던 것이다.


금기의 사회적인 기능

물론 의문점은 남아 있다. 특히 성서에 금지된 다른 동물들 - 독수리, 매, 뱀, 달팽이류, 조개류, 비늘 없는 물고기 등 - 은 왜 금기하고 있는가? 이제는 더 이상 중동에서 살지 않는 유태인들과 회교도들까지(물론 엄수하는 정도와 열성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아직도 고대의 식사 율법을 지키고 있는 까닭은 또 무엇인가? 성서에 금기로 열거된 새와 동물들은 대체로 두 범주로 선명하게 나눌 수 있다. 첫째, 물수리, 독수리, 매 등의 조류는 식량 자원으로 가치가 없다. 둘째, 조개류 등은 목축, 농경 혼합 경제 속의 주민들에게는 손에 접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두 범주에 속하는 금기된 동물들은 그 어느 것도 우리가 관심을 갖는 그런 문제(분명히 이 기이하고 비경제적인 금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비경제적 문제)는 야기하지 않는다. 먹이로 쓰려고 독수리를 찾아 나선다든지, 식용 조개를 찾아 사막 위의 50마일을 헤맨다든지 하면서 시간을 낭비한다고 해서 남을 욕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 종교상 식용으로 인정된 모든 음식물에 관한 관행이 생태학적 근거가 분명히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금기는 사회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다. 예컨대 금기를 준수하면 그로 인해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동질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기능 같은 것이 있다. 이러한 기능은 중동에 있는 고행을 떠나 이국에서 사는 현대 회교도들이나 유태인들이 돼지 금기의 식사 율법을 잘 지키도록 해주고 있다. 이런 관행이 지닌 난점은, 그 관행이 회교도와 유태인들에게 쉽사리 대체할 수 있을 별다른 음식물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양가가 높은 음식물을 금기로서 식용에서 제외시킴으로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복지를 상당히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나는 이 의문에 대해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러나 또 다른 유혹도 이기고 싶다. 즉 모든 것을 다 설명해 보겠다는 유혹 말이다. 이 수수께끼의 이면에 있는 돼지 숭배자들을 생각해 본다면 돼지 혐오자들에 대한 의문들이 쉽게 풀릴 것이다.

돼지 애호자들은 신이 돼지고기를 역겨워한다고 믿고 있는 회교도나 유태인들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지닌 자들이다. 돼지 숭배의 조건은 단순히 돼지고기 요리를 미각적인 면에서 미친 듯 좋아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럽, 아메리카인들이나 중국인들의 요리 전통 등 많은 요리법에서 돼지 비계와 살코기는 아주 고급 음식물로 쳐진다. 돼지 숭배에는 이런 전통과는 상관없는 어떤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인간과 돼지 사이에 존재하는 전체 공동체와 연결되는 여러 가지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 회교도나 유태인들에게는 자기들이 인간으로 살아남는 데 돼지가 위협적인 존재이지만 돼지 숭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돼지와 사귐이 없이는 진정한 인간적 삶이 영위될 수 없다.

돼지 숭배자들은 기르고 있는 돼지를 자기 식구로 생각하고, 돼지들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돼지들과 말을 주고받고, 돼지들을 애무하고 쓰다듬어 주며, 끈으로 매어 들로 데리고 다니고, 이름을 붙여 부르고, 돼지들이 아프거나 다치면 마음 아파하고, 가족의 식탁에서 음식을 추려서 먹인다. 그러나 힌두교인들의 암소 숭배와는 다르게 돼지를 의무적인 희생 제물이 되게도 하고, 특별한 명절에는 돼지들을 잡아먹기도 한다. 제사용이나 성스러운 축제용으로 돼지를 잡아죽이기 때문에 돼지 숭배는 힌두교 농부들과 그들이 숭배하는 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 관계보다 더 폭넓은 인간과 동물 간의 유대 관계를 이해하게 해준다고 하겠다. 돼지 숭배의 절정은 돼지의 살과 그 주인인 사람의 살을 결합시키고 돼지의 혼과 조상들의 혼을 결합시키는 때이다.

돼지 숭배에는 고인이 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사랑하는 돼지를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잡아 질그릇에 넣어 튀기는 의식이 있다. 돼지 숭배의 또 다른 의식 중에는 소금에 절이고 냉동한 돼지 뱃가죽 비계를 처남의 입에 꽉 처넣는 의식도 있다. 그러면 그 처남이 성실하고 행복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돼지 숭배에는 한 세대마다 한두 번씩 열리는 돼지 축제 한마당이 있다. 이 축제는, 대개가 돼지고기를 열망하는 조상들을 기쁘게 하려 할 때, 또 공동의 건강을 축원할 때, 또는 미래에 있을 여러 전쟁에 이길 수 있도록 기원하려 할 때 열리게 되는데 이런 축제가 열리면 사람들은 자기 부족들이 기르고 있는 대부분의 다 큰 돼지를 한꺼번에 잡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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