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신자유주의’ 탈출구 없는가

‘신자유주의’ 탈출구 없는가


국내 마르크스 경제학 ‘대부’
김수행 교수

국경을 넘어 퍼부어지는 자본의 융탄폭격. 온 세계를 무한경쟁으로 휘몰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사회와 직장은 물론 우리 안방에까지 침투해 있다. 삶을 초토화시키는 그 기세는 마치 대지를 휩쓰는 메뚜기떼의 공격같다. 자본은 자꾸 부자가 되어가지만, 노동자와 서민대중은 대량해고·비정규직·실업 등으로 빈곤과 불안의 깊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벽을 뚫을 탈출구는 없는가? 홍세화 기획위원이 지난 11일 목련꽃이 피기 시작한 서울 신림동 서울대학교 교정에서 국내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부’라고 불리는 김수행(62) 경제학과 교수를 만나 그 가능성을 찾아봤다.

홍 기획위원은 늘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비판해 왔고, 김 교수는 그동안 강단과 미디어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예고해왔다. 진보적 운동가와 백발의 노교수의 이날 대담은 ‘마주보기’라기 보다는 어쩌면 ‘함께보기’에 더 가까웠다.

김수행 신자유주의 횡포 극심 선진국부터 머잖아 붕괴

홍세화 ‘시장주의 우파’ 집권뒤 노동운동 갈수록 외면당해

홍세화 기획위원=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인간 본래의 탐욕을 공공성이나 양심 같은 것들로서 적절히 제어해 왔지요. 그런데 요즘 세계를 휩쓰는 신자유주의는 그런 제어장치를 배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 교수님은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것부터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수행 교수=신자유주의라는 게 자본주의의 불황을 극복해 보려는 정책으로서 등장한 것이에요. 20세기 들어 두번째 대불황을 겪으면서 이걸 어떤 식으로 극복할 것인지가 서구 자본주의에 가장 큰 과제로 대두됐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기업가에게 이익을 많이 주고, 그 이익으로 재투자를 하게 하고… 이렇게 해서 생산과 고용을 늘려 불황을 극복하겠다는 것이죠.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복지사회다, 사회보장제도다 하는게 사회적 합의였고, 완전고용이나 노동조합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게 정부의 몫이자 목표였지만, 그 후로는 불황극복을 위해 이런 합의와 구실이 축소되고 해체되는 과정이 일어났습니다. 기업가·자본가에게 이익을 더 주려면 세금을 낮춰야 했고, 그러다 보니 사회보장제도나 완전고용, 노조 권리는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세계무역기구 등, 이른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통해 그 정책기조를 세계시장에서 관철시킨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계화’라는 것의 핵심은 결국 선진국 자본이 세계 각지로 진출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다른 나라 시장을 뺏으러 나가는 거예요. 밖으로 나가려면 남들이 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 첨병이 바로 국제통화기금이니 세계무역기구니 하는 것들입니다. 세계 각 나라가 투자한 주식회사인 국제통화기금에서는 미국이 거부권을 쥐고 있어 다른 나라들이 꼼짝 못하게 되어있어요. 요즘은 ‘세계화’보다는 ‘제국주의화’라는 말을 경제학에서도 많이 쓰고 있습니다.

홍/ ‘작은 정부’ 계속 들고 나오는데 민족국가 약화·제국주의 확장 의도
김/ 대량해고 하고나서 사회복지라니? 현 정부 복지어책 한계 드러난 것

=우리나라에서는 세계화란 말이 김영삼 정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됐는데, 결국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적 관철을 아주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해 놓은 수사였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지금 미국은 군사력에서 세계 1위잖아요?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는 걸 보면, 미국이 바로 ‘제국’이예요. 선진국, 후진국 할 것 없이 모든 나라가 미국을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 그러니까 다국적기업들은 모두 자기 모국의 힘을 믿고 다른 나라에 진출하는 겁니다. 세계화가 이뤄지면 개인의 자율성이 늘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는데, 그보다는 거대한 나라의 기업과 시민들만이 세계를 마음대로 누비게 된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정부의 축소를 주장하는 ‘작은정부론’을 들고 나옵니다. 다국적기업이 제국주의적 힘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보면, ‘작은정부론’이란 게 결국 민족국가의 틀을 약화시키고 제국의 힘을 키우려는 의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죠. 다국적기업의 힘이 강해지면 국민국가의 힘을 능가해서, 정부는 축소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국민국가는 절대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 미국이나 영국같은 국민국가가 다국적기업을 뒤에서 엄청나게 지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국민국가가 사라진다, 약화된다’하는 얘기는 후진국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공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작은정부’라고 해도 우리와 외국(선진국) 사이에는 관점이 많이 다릅니다. 외국에서는 ‘정부가 국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해야 한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우리는 ‘세금도 안 거두고 정부가 제 구실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를 갖고 있는 노무현 정부는 ‘참여복지’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 실체가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

=앞서 김영삼 정부나 김대중 정부도 나름대로의 소임을 갖고 있었죠. 김영삼 정부가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다든가, 김대중 정부가 북한의 김정일 주석과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들입니다. 노 정권은 사회의 기본질서를 잡아야 한다는 나름의 의무를 안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부정부패를 없애고, 사회질서를 바로 잡는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죠. 이걸 해내려면 노동자계급과 노동자 조직의 힘을 빌려야한다고 생각했는데, 노 정권은 생각보다 노동자계급을 적대시하는 것같습니다. 노동자를 대량해고하고나서 무슨 사회복지가 있겠습니까? 노 정권의 복지정책의 한계가 여기서 확연히 드러나죠. 홍 위원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노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기업 쪽에 기울어져 있던 노사관계의 균형을 임기 마칠 때까지는 잡아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철도·물류 파업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변하더군요. 노 정권의 권력 자체가 민중적이지 못했다는 점, 노 정권을 떠받치는 지지세력의 계급적 한계 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수·수구 언론과 미국의 입김도 있었을 것이고요.

=그동안 역대 정권이 내세운 복지정책의 기본은 ‘경제성장을 저해해서는 안된다’란 것이었습니다. 기업에 부담을 주면 안된다는 것이죠. 복지는 가족이 담당해라… 이런 식이었는데, 복지는 가족이 아니라 사회가 담당해야하는 것입니다. 노 정권의 복지정책도 이전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 모든 나라가 경쟁력을 높이고 수출도 늘리고 그렇게 해서 고용을 늘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정책은 모두 실패할 수 밖에 없어요. 수출 늘리고 경쟁력 높이려면 가장 쉬운 방법이 노동자 임금 깎고 사회보장제도 줄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국내 시장을 엄청나게 줄이게 되는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죠. 모든 나라에서 국내 수요가 줄고 국내 시장이 좁아지면 결과적으로 세계시장이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신자유주의로 성공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노 정권이 하고 있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확대하겠다는 겁니다. 생각을 바꿔야 해요.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야합니다. 빈부격차를 줄이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자, 고소득층한테서 세금을 많이 거두고 군사비는 줄여서 못사는 사람에게 혜택을 넓히자, 이렇게 해서 국내시장을 키우는 것이 우리 경제가 발전하는 토대를 만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답답합니다.” 홍 기획위원은 신자유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한국 사회에 비관적 우려를 나타냈다. “신자유주의 붕괴는 피할 수 없습니다.” 김 교수는 힘있는 어조로 낙관론을 폈다. 같은 지점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였다.

=우리나라는 총소득에서 사회구성원이 내는 세금과 사회보장 분담비의 비율이 27%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럽 나라들은 45%에 이르고, 미국도 30%가 넘죠. 우리는 그조차 간접세 비중이 높습니다. 이걸 보면 우리 사회에는 분배정의·조세정의조차 제도화되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도대체 어디서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 겁니까?

=우리는 역사 과정에서 국민들 사이에 ‘똘레랑스’나 동정, 연대의식 같은 것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6·25라는 동족상잔과 수십년의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서로 ‘불쌍하다, 도와주자’하는 개념이 안 잡혀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이 사실은 사회보장의 합의를 만들어 내는 기본정신이거든요. 저는 요즘 굉장히 기분나쁜 게 하나 있는데, 삼성같은 기업이 큰 이익을 내고는 그걸 윗사람들끼리 갈라먹더라고요. 말이 안됩니다. 우리 역사나 문화·전통에 대해 근본적으로 한번 고찰해 봐야 해요. 2차 대전 때 영국 런던이 폭격을 당하자 영국 정부는 부잣집 자녀든 가난한 집 아이든 똑같이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돌봐주었어요. 이게 상징하는 게 뭡니까?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이고요, 사회 구성원들이 그런 생각을 해야 사회보장 개념이 굳건해 지는 겁니다.

=노 정권이 사회적 연대의 제도화라든지, 공공성과 사회정의의 토대를 굳건히 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갖고 있는데, 이걸 저버리고 있다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는 거죠.

=노 정권은 한국사회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하나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외국의 신자유주의 사상을 굉장히 많이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의 경우 이미 한참 전에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하다가 그것이 문제가 있다고 보고 신자유주의적 복지정책을 찾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는 과거에 사회보장이란 게 없었죠. 상황이 다릅니다.




=외환위기 이후에 미국 중심의 금융자본이 우리 시장에 많이 침투했습니다. 배당을 통해 우리 부가 국외로 많이 유출된다는 우려도 있고요. 우리나라에는 이른바 ‘재벌’이 있는데요, 재벌을 어떻게 보십니까? 국민자본 혹은 우리 기업으로 보고, 이를 안고 가야할지….

=저는 재벌이 한국계 자본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재벌의 소유와 지배구조는 개혁해야 합니다. 총수의 후계자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그 큰 기업을 운영하도록 두는 것은 나라 경제를 망치는 거예요. 미국 지이(GE)의 자회사 중에 금융회사들이 있는데, 지이의 총수익의 49%를 이들 금융회사들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성은 어떻습니까? 생명·투신·카드회사 같은 금융 자회사들이 내는 수익은 삼성 총수익의 1% 정도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삼성에 자금 문제가 생기면 늘 계열 금융회사들이 돈 막아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삼성의 금융업 자체가 수익성도, 효율성도 없는 거죠.

=우리가 외환위기를 맞은 것을 보면, 우리 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조건으로 금융시장 개방을 급속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이런 정책을 추진한 정부의 핵심 정책 운영자들이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거든요. 그러니 참여정부 역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이런 부분은 학계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맞습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굉장히 자유주의적이고, 시장에 모든 걸 맡기자는 방식 아닙니까? 교수들 대부분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인데, 노 정권을 ‘좌파’라고 부를 정도로 미국식 시장주의에 쏠려있습니다. 큰 문제입니다.

=노 정권을 ‘좌파’라고 하는 얘기를 들을 때 당혹스럽더군요. 노 정권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저는, 분단 이후에 ‘반공주의 우파’가 집권했다면,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은 ‘시장주의 우파’가 집권한 것이라고 봅니다. 반공주의 우파 집권기에는 노동운동이 민주화운동의 하나로 인식되고 국민들의 동의를 받았죠. 그런데 시장주의 우파정부 아래서는 노동운동이 오히려 더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 분신이라니…”라고 말하더군요. 고려대 최장집 교수의 말처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이제 우리 화두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민주화 운동 세력이 노동자 대투쟁에 엄청나게 반대를 한 거예요. 그들의 반노동자 정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노동자·빈민·농민들이 갖고 있는 자기 정체성 인식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란 구호에 대해 당연히 거부감을 느껴야 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이런 현실 속에서 노동자 의식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겠습니까?

김수행 ‘빵을 키워놓고 난뒤 갈라먹자’
그런데 빵을 키워놓아도 누가 갈라줍니까?
노동자·시민 참여하는 자본주의 올 것
노정권, 서민대중 파트너로 안고가야

=우선 지난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출신 10명이 국회에 들어갔습니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비정규직 문제가 점점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고 있고, 거대 보수 언론의 힘도 조금씩 약화되고 있지 않습니까? 독도 문제로 일본과 마찰이 있는데, 이런 대외적인 문제 제기가 국내에서도 살기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운동에 힘을 줄 수 있을 거예요. 미국의 이라크 파병·방위비 분담 요구로 인해서 반미 감정이 확산되면 이와 맞물려 국내 질서를 조금 더 공정하게 만들자는 운동이 일어날 거라고 봐요. 이런 움직임이 모두 사회개혁의 동력으로 작용하지 않겠습니까?

=정부가 말하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이라는 것이 결국엔 성장중심을 말하는 것이죠. 국민들이 이런 점을 인식해야 하는데, ‘선순환’이니 ‘소득 2만불’이니 하는 데에 현혹되고 있는 거죠. 실제로는 삶이 아주 팍팍해지고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자꾸 커지고 있거든요. 과거 정권이 ‘안보 이데올로기’를 퍼뜨렸다면 지금은 ‘불안 이데올로기’인 것 같아요. 사회 구성원들이 자아실현 같은 데에는 관심도 못 가지고, 심지어 젊은 대학생들도 취업걱정에 사로잡혀 있어요. 결국 경제동물화하는 사회 분위기가 퍼지고, 계층 상승의 가망성은 보이지 않고 사회는 더욱 험악해지는 겁니다. 노동운동에서도 노동자들이 자기 정체성보다는 자본주의적 심성에 포섭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저는 좀 비관적인 편이예요.

=성장과 분배 문제를 말할 때 자꾸 이런 얘기를 합니다. ‘분배에 치중하다보면 성장을 못한다,’‘빵을 우선 키워놓고 난 뒤에 갈라먹어야 한다’라고요. 이런 얘기는 자본주의가 생긴 이래 늘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빵을 키워놓아도 누가 그걸 갈라줍니까? 아무도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계속 구호만 나오는 거죠. 사실, 지금 같은 생산 수준에서 분배를 잘만 하면 모두가 잘 살 수 있습니다. 지금 국민소득이 1만달러라고 하면, 한달에 한사람의 소득이 대략 100만원이란 얘기고, 한가족이 4명이라고 할 때 4백만원이 되죠. 이렇게 계산하면 모두 먹고살 만한 소득이잖아요. 문제는 부가 집중되어있다는 겁니다. 한번 주위를 둘러 보세요, 돈이 없어서 병원에도 못가고 자살하고 노인들은 외롭고…. 은행에 앉아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봐도, 일은 정규직보다 더 많이 하면서 봉급은 반인데다 사회보험 혜택도 못받잖아요.

=일부에서는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10%밖에 안돼요. 전체 노동자 가운데 이 10%는 자기 먹고 살기도 힘들고 자기 권리 옹호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들은 나머지 90%를 위해 뭔가 해낼 방법이 없어요.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이 자기 봉급 깎아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아닙니다. 지난번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참여 논란 때 민주노총 사람에게 “자꾸 노사정위원회 들어가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대신, ‘어떻게 비정규직을 조직화하고 그들과 연대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우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노조 조직률 10%라고 하면 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인데, 이들이 대기업에는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문제에서는 힘이 안됩니다. 또 정규직은 갈수록 줄어들지 않겠어요?

줄담배와 줄커피로 이어진 2시간30분의 대담 끝에, 김 교수는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을 제시했다. ‘노동자·시민·자본가가 함께 참여하는, 좀더 평등한 자본주의.’ 이런 세상은 언제쯤 오게 될까?

=민주노총으로서도 비정규직 문제가 어떻게 거론되도록 해야 할지 고민이 많더군요. 현장에서는 비정규직 조직화가 잘 안 이뤄지고, 현재 법체계에서도 어렵고… 그래서 가능한 어떤 틀이라도 얻어내려고 한 것이 노사정위 복귀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노동운동에서는 노조가 힘이 셀 때에만 무언가 얻어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노 대통령이 노동정책을 펼치면서 노조하고 상의하는 것 봤습니까? 그건 노조가 힘이 약하다는 뜻이예요. 힘이 약할 땐 타협으로는 별 소득이 없어요. 이건 역사가 증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민주노총 상층부가 이 문제를 좀 안이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사회가 아직 분배냐 성장이냐하는 틀거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공장에서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결국 노동자입니다. 이 부가가치를 이윤과 임금으로 나누는데, 임금도 분배의 문제이고 이윤도 마찬가지예요. 이윤 중에서 사내유보와 배당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분배입니다. 그런데 분배를 얘기할 때 항상 임금만 가지고 말합니다. 임금이 너무 많으니 깎자고요. 우리나라 노동자 임금은 노동생산성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타결되고 있습니다. 주주들이 배당을 많이 요구하는데, 이를 좀더 합리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배당을 줄여서 사내유보로 돌리고 재투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임금을 말할 때, 기업이 직접 노동자에게 주는 부분을 ‘직접적 임금’이라고 하고, 사회보장을 통해 노동자에게 주는 여러 혜택을 ‘간접적 임금’이라고 합니다. 외국의 경우는 노동자들이 병원비·교육비·연금 등 얼마나 많은 간접적 임금을 받습니까? 우리는 그렇지 못하죠. 간접적 임금으로 받지 못하는 부분은 직접적 임금으로 커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임금이 높다는 거예요. 모든 국민이 세금 잘 내서 사회복지를 늘리면 직접적 임금을 줄일 수도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죠.

홍세화 과거 정권이 ‘안보 이데올로기’ 를 퍼뜨렸다면
지금은 ‘불안 이데올로기’ 인 것 같아
노동운동에서도 노동자들이 자기 정체성보다는
자본주의적 심성에 포섭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교수님은 대체로 우리 사회의 변혁을 낙관적으로 보시는군요.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어느 정도 낙관하십니까?

=신자유주의로 인해 유럽에서는 실업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하고 사회복지도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하기가 어려워졌어요. 5월에 있을 영국 총선에서는 아마 보수당이든, 노동당이든 사회보장제도를 더 축소하겠다는 얘기를 꺼내지 못할 거예요. 외국도 이런 상황으로 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선진국 쪽에서 먼저 무너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후진국으로 신자유주의 해체가 넘어오겠죠. 그래서 우리가 자꾸 현재 서구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잡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후진국에서는 선진국보다 더 빈부격차가 심하고, 실업자는 많고, 외국 자본의 횡포는 심해서, 반발이 거세질 것이고요. 결국 세계적인 민중연대가 상당히 진척될 가능성이 큽니다. 선진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가 터져나오고, 후진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면, 신자유주의는 수년내에 막을 내릴 것이라고 봐요. 신자유주의를 이끄는 미국의 힘은 군사력에서 나옵니다. 미국은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죠. 그래서 반전운동도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무너지고 난 뒤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자본 쪽에서도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갈 것입니다. 불만이 폭발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예요. 자본 이동을 너무 자유롭게 해서 금융공황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규제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도 이런 쪽이 힘을 얻을 것이고요. 또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평등주의적인 사회를 요구할 거예요. 자본과 사람이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그 안에서 수익성 위주로만 가는 방식에 규제를 가하게 될 것이고, 생태 문제를 포함해 모든 결정에 더 많은 사람이 주체로 참여하는 경제형태로 갈 것입니다. 복지국가가 되살아나면서 좀더 평등하고, 좀더 많이 참여하고, 계획성이 더 많이 도입되는 자본주의입니다. 복지국가의 개념에서, 기본적으로는 자본가가 주도권을 갖겠지만,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한단계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도 해결되고, 우리 사회가 이런 방향으로 개선되길 바랍니다. 경제학자로서, 이런 개선을 위해 노 대통령에게 충고 한마디를 던지신다면요?

=노 정권의 정치적 기반은 사실 취약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를 민주적이고 평화롭고 공정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 정권이 서민 대중을 자기 파트너로 삼을 수 밖에 없어요. 노동자 계급, 노동조합의 조직된 힘을 안고 가야합니다. 그들과 함께 기업도 개혁해 나가고, 전체 사회도 바꿔나가는 게 올바른 길입니다. 노 정권이 한국사회에 이바지하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정리 김성재 기자 seong68@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수행 교수는 1980년대 학생 운동권이 성서처럼 읽었던 마르크스 경제학의 고전 <자본론>의 국내 첫 번역자로 잘 알려져 있다. 61~67년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석사과정을 마쳤다. 외환은행에 입사해 런던지점에서 일하다, 당시 국내에서는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접한 뒤 직장을 그만두고 런던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해 본격적인 ‘비주류 경제학’ 연구에 들어갔다. 7년만에 석·박사를 마치고 귀국해 82년부터 한신대에서 교수직을 시작했다가 학장 불신임안 사태로 해직됐다. 89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옮겨 지금까지 강단에 서고 있다. 이번 학기에는 ‘마르크스 경제학’‘마르크스경제학 특수연구’ 등 학부·대학원에서 3개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경제변동론> <정치경제학 원론> <알기쉬운 정치경제학> <현대마르크스경제학의 쟁점들> 등이 있다. <자본론>은 89~90년 3권이 번역·출간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릴린, 금세기 최고의 섹스심볼. 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자.
노마진, 그녀의 어머니는 정신병을 앓았고, 9살 때 고아가 된다.


마릴린, 모든 남성들을 휘어잡으며 열광시키다.
노마진, 의붓아버지에게 끝없이 성폭행당하다.


마릴린, 1년동안 30개의 잡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노마진, 굶어죽지 않기 위해 누드사진을 찍어야했다.


마릴린, 최고의 야구선수와 화려한 2번째 결혼.
노마진, 16살에 한 첫 결혼 후 자살기도.


마릴린,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노마진, 평생 천박하고 골빈 금발여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마릴린, "나는 잠자리에선 아무것도 입지 않아요, 샤넬 5를 제외하곤."

노마진, "사람들은 자신의 틀에 나를 가둬요.숨이 막혀와.날 보는 시선이 싫어!"


마릴린, 희대의 극작가와 3번째 결혼에 성공했다!
노마진, 그토록 염원하던 아이를 유산하고 그 충격으로 머지않아 이혼하고만다.


마릴린, 그녀앞에 영화제의가 산처럼 쌓여만 갔다. 언제 어디서나 환호받는다.
노마진, 그 영화들은 모두 "섹스어필" 뿐. 극도의 신경쇠약과 무대공포증..


마릴린, 최고의 여배우 중 한 사람으로 사람들 기억속에 영원히 간직된다.
노마진, 아이도, 남편도, 가정도 원하던 것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의문사한다.









노마진베이커...마릴린먼로의 본명이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초은하단과 행성 2005-04-14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엘튼 존의 Candle in the Wind 에 심취한 적이 있었는데요.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게 아니라 노마진을 추모하는 버전으로.
그전까진 마릴린먼로에게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 때부터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언젠가 이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죠. 물론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진 못했지만.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관점의 차이겠지만, 마릴린은 아름다운 배우인건 틀림없지만 그렇게까지 절정의 미녀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전출처 : 바람구두 > 송두율 - 과학·기술·인간

과학·기술·인간 

송두율(독일 뮌스터대 교수·철학)

 

  
 1.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
 2. 과학과 기술의 낙관론과 비관론
 3. 기술이해의 폭
 4. ‘기술입국’ 이데올로기
 5. 기술자와 기술관료주의
 6. 과학과 윤리
  
  
 
 
1.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

1월 9일자 『한겨레신문』을 들추어보던 중 신문 한 면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광고에 나의 눈길이 멎었다. 큼지막한 활자로 ‘자유 평화 미래’라고 쓴 바로 밑에 “맥도널 더글러스의 FA-18기를 선정해주신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적혀 있고, 이어서 “세계의 하늘, 자유의 하늘을 지켜온 맥도널 더글러스 항공?우주?정보?과학분야에서 최첨단의 기술력과 발군의 개발?탐구정신으로 오늘에 이른 맥도널 더글러스가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겠습니다. 한국 항공 우주산업과 맥도널 더글러스와의 공동사업 성공은 첨단사업으로의 도약과 새로운 경제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여줍니다”라고 계속해서 적혀 있다. 다음 세대 전투기로 확정된 F18기는 대당 3,500만 달러로, 완제기 도입 12대, 조립생산(삼성항공에서 조립) 36대, 공동면허생산(삼성항공?대우중공업?대한항공 참여)이 72대로 98년까지 120대를 한국 공군에 배치하게 되는데 총 42억 달러가 이에 소요된다고 한다.

이 기종의 우수성은 도하의 신문에 북한이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소련의 미그 29기와 여러 각도로 자세히 비교해서 나열되어 있어서 문외한들도 알기 쉽게 설명되었고, 조립과 공동면허 그리고 대응구매를 통해 한국의 첨단산업도 비약적인 발전과 통상증대에도 도움을 주는 그야말로 ‘자유?평화?미래’라는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는 것처럼 해설되고 있다.

1983년 3월 미국의 레이건행정부가 입안하고 추진한 ‘별들의 전쟁’이라는 ‘SDI’계획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미국, 서구 그리고 일본에서도 벌어졌다. 당시 뉴햄프셔의 다트머스 대학의 지구물리학자 로버트 재스트로(R. Jastrow)는 소련이야말로 악마의 왕국이기 때문에 오로지 군사적 우위를 통해서만 이를 견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SDI’계획의 실현을 강력히 요구한 데 대하여, 스탠포드 대학의 물리학교수인 시드니 드렐(Sidney Drell)은 반대로 1972년 미소간에 체결된 ‘미사일 방어체계제한’ 협정을 미국정부는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 같이 자연과학자들 스스로가 그들이 직접 관여하는 연구대상과 국제정치적 구조와의 관계해명, 그리고 이를 통한 구체적인 정치적 태도표명은 최근 핵발전소, 생명공학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범위에 걸쳐 나타나고 있고, 연전에는 ‘핵무기를 반대하는 의사’ 모임이 노벨평화상을 받기조차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과학자와 전문직기술자들이 가령 미국과 서독에서 ‘SDI’문제를 가지고 격렬한 논쟁을 펼쳤던 것처럼 이번 F18기 도입과 개발에 대한 공개적인 의견표시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장의 폐수로 죽어가는 남해의 문제를 연구해서 논문을 발표했던 어느 해양생물학자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식이 바로 몇년 전의 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과학과 기술이 하나의 ‘새로운 형이상학’(H. Schelsky) 또는 ‘숨겨진 이데올로기’(J. Habermas)로서 가지는 의의를 반성하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향하여 과학과 기술문제를 재구성해야 할 것 같다.
 
2. 과학과 기술의 낙관론과 비관론

1985년에 실시된 ‘대서양 연구소’의 한 여론조사는 약 반수의 미국인, 24퍼센트의 일본인, 그리고 12퍼센트의 서독인이 컴퓨터가 오히려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줄 것으로 믿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국인과 일본인에 비해서 서독인들이 기술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이러한 조사보고는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경쟁승리만이 현대적 산업사회가 생존할 수 있다고 보는 서독의 집권당인 기민당이 적극적으로 서독도 SDI계획에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화시켜주었다. 이에 대하여 야당인 사민당은 일본에서 급속도로 진척된 과학과 기술발전은 반드시 ‘국가’의 주도하에서 또 군사목적을 위한 연구와 연결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사실상 1982년 일본의 과학과 기술개발을 위한 투자액 중 국가가 직접 투자한 액수가 차지하는 비율은 23.6퍼센트에 지나지 않았으나, 미국의 비율은 46.7퍼센트 그리고 서독은 43.1퍼센트로 상당히 높았다(한국도 이러한 점에서는 일본과 비슷한 수치를 보이고 있는데 1986년 과학?기술을 위한 연구개발비 중 국가투자는 26퍼센트였다).

또 같은 해에 ‘군사용’ 연구가 이러한 국가의 연구개발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일본은 0.5퍼센트인 데 비하여, 미국은 16.4퍼센트, 서독은 2.2퍼센트였기 때문에 군사목적의 연구가 반드시 기술개발을 촉진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폈다. 물론 사민당이 SDI계획에 서독이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하여 내놓은 기술대국 일본의 예가 적절한 예는 아니었다. 일본에서 대종을 이루는 민간기업체의 기술개발연구비가 꼭 ‘민수용’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미쓰비시중공업, 가와사키중공업, 이시가와지마하리와중공업, 히다치 등의 대기업은 특히 미국의 군산복합체인 보잉, 제너럴 다이내믹스, 그루먼, 록웰, 노스럽, 록히드 등과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서독도 일본도 SDI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과학과 기술개발문제 그리고 군축이 지니고 있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사회여론화시키고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집권당인 기민당은 야당인 사민당과 녹색당이 과학과 기술개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비판은 직접적으로 핵에 의한 에너지정책 문제에 관한 대결로 나타나, 점차적으로 핵에 의존하는 에너지정책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사민당, 그리고 당장에 핵에너지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는 녹색당의 정책을 산업문명을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는 비난으로 연결되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SDI참여문제보다 더 일반시민의 직접적인 관심을 끌었고 여태까지 이 핵에너지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중이다.

한쪽에서는 과학과 기술발전을 통해서만 경제성장과 생활환경 보호가 지속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생활환경 보호를 위해서 맹목적인 경제성장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자는 ‘기술천국’(Technopia, Technik+Utopia)을 이야기하고 후자는 ‘환경보존천국’(?otopia, ?ologie+Utopia)을 이야기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오늘에서야 나타난 문제는 물론 아니다. 서구에서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이러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지만 사상적 원류는 더 길고, 동양에서도 ‘근대화’를 둘러싼 근대주의자와 보수적 전통주의자 사이에 벌어진 투쟁 이전에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여러 사상가들이 씨름했다.


3. 기술이해의 폭

과학, 기술 그리고 산업은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 이야기하는 기술시대, 산업사회 그리고 기술과학문명은 야스퍼스(K. Jaspers)가 지적한 대로 현재의 우리를 파악하는 데 아마도 가장 중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기술’(Technik)이라는 개념은 종종 우리가 잘못 이해하는 것처럼 단순한 경험적인 숙련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플라톤은, 기술은 학문적인 반성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한에서 기술은 단순한 경험의 반복을 통해 축적될 수 있는 ‘기교’(技巧)나 ‘기예’(技藝)와는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또 기술이라는 의미도 기계기술이나 질료적 구성이라는 의미에서 보다 더 광범하고 새로운 내용을 그동안 담게 되어 인간을 통제하는 기술까지를 의미하는 ‘정보-체제기술’로서 오늘날 기술은 이해되고 있다.

기술이 지니고 있는 총체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밝혀낸 최초의 사상가는 역시 마르크스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순수’과학과 비교해서 열등한 의미로 기술은 이해되었으며 헤겔도 시민사회의 생산력발전을 ‘숙련성’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첫째권 중에 ‘기계’(Maschinerie)라는 장에서 자본주의사회의 기술과 생산조직이 지니는 혁명적 성격에 주목하면서 기술발전이 ‘자동화’라는 하나의 총체적인 체계로 발전될 것이라 이미 예견하였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관점을 강조하면서 가령 한스 렝크(H. Lenk)는 마르크스를 경제학자 내지 계급이론가로서는 물론 기술문제이론가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지녔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연의 개조를 통한 인간의 자기실현이라고 기술을 규정한 마르크스의 입장과는 달리 ‘인간기관(器官)의 연장(延長)’이라고 규정한 캅(E. Kapp)이나 ‘이념의 현실화’라고 규정한 데사우어(F. Dessauer), 존재사적으로 발전된 자연의 ‘끄집어내기’(Entbergen)나 정초(定礎)라고 본 하이데거의 입장은 ‘인간학적인 입장에 가깝고, 이러한 철학적인 기술이해는 겔렌(Arnold Gehlen), 셸스키(Helmuth Schelsky), 프라이어(Hans Freyer) 등에서 주로 기술과 사회의 연관문제로서의 기술관료주의로 연결되었다.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볼 때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제2의 자연’을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다고 본 겔렌은 다른 동물이 모체로부터 빨리 독립해나갈 수 있는 데 비하여 인간은 거의 20년 가까이 부모 곁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제도’라는 ‘제2의 자연’ 속에서만 안정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기술은 바로 이러한 결핍된 인간존재의 기관(器官)을 대체하고 이의 부담을 더는 체계라고 겔렌은 보았다. 셸스키도 기술을 ‘인간적 정신이 세계대상성(Weltgegenst?dlichkeit)으로서 구현된 형식’으로 보았으며, 프라이어는 기술은 하나의 ‘세계관계의 객체화’이며 구체적 사회의 목표규정 형식이라고 보았다. 기술은 자연의 변화로 향하는 인간의 의지 표현이며 또 인간의 내재적 본성에 속하고, 결코 인간에게 밖에서 와 닿는, 소외시키는 그러한 실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로부터 시작된 정치경제학적인 기술파악과 보수적인 30년대 라이프치히 대학의 사회철학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 겔렌, 프라이어 등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기술관과 접촉하면서 이전의 문명비판적?낭만주의적 기술비판과는 다른 사회철학적 차원에서 현대의 기술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대표적인 학자는 역시 마르쿠제(H. Marcuse)였다고 할 수 있다.

마르쿠제는 특히 그의 저서 『일차원적인 인간』 속에서 현대 산업사회의 결정적인 요소로서의 기술의 의미에 주목하여 현대 산업사회의 경제적인 생산관계 문제에서 생산력 문제라는 의미에서의 기술을 문제삼았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기술문제를 넘어서서 산업사회로서의 사회주의에서의 기술과 과학문제도 그의 비판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마르쿠제에 의하면 서구적 사고는 가치와 합리적?철학적인 가치논쟁을 잊어먹고 주어진 목표와 가치의 효율적인 실현만을 문제삼는 ‘일차원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은 순전히 지배를 위한 도구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합리성은 곧 기술이고 이는 사회적 통제와 지배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 ‘기술을 통한 지배가 아니라 지배로서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원래 인간을 해방하는 힘으로서의 기술이 해방을 오히려 방해하는 정치적 조작기계가 되었다고 마르쿠제는 주장한다.

기술을 이와 같이 지배의 도구로 보는 그가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의 새로운 ‘해방의 기술’(Technik der Befreiung)을 주장하는데, 이는 자동화가능성을 완전히 이용하는 방식을 통해서 인간의 유희적 충동이 만개할 수 있는 문화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젊은 마르크스가 『파리철학수고』(Pariser Manuskripte)에서 전개한 ‘자연주의=인간주의’라는 기술적 휴머니즘의 이상이 마르쿠제에게서도 나타나는데 기술적 현실성을 완성시키는 것이 ‘기술적 현실성을 넘어서는 데 전제조건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토대’라고 보았다. 기술적으로 지배되고 조직된 일차원적인 세계 극복을 위해서 그는 미래의 만족스러운 세계를 위한 총체적인 기술자동화를 이야기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마르쿠제의 입장을 하버마스는 생산력 자체는 정치적으로 ‘무죄’라는 생산력―생산관계의 고전적 명제에 서 있다고 비판하면서 과학과 기술이 현대사회의 비극을 낳은 장본인이라고 보는 입장도, 또 과학과 기술 자체는 이에 대하여 책임 없다는 입장도 비판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과학과 기술을 단순히 ‘생산력’으로 파악하는 고전적 내지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과학과 기술은 어떠한 특정 계급의 지배이해만을 정당화하거나 이에 저항하는 다른 계급의 해방만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해를 넘어선 ‘해방적인 총체적 종(種)의 이데올로기’(emanzipatorische Gattungsideologie)라고 파악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을 ‘생산력’으로 보는 입장은 특히 소련에서 1961년 공산당강령에까지 등장하여 ‘직접적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과 기술’로 정식화되었고, 중국에서는 ‘4개의 현대화’와 더불어 ‘유생산력’(唯生産力)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생산력 발전을 억제하는 생산관계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과 기술발전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들이지만, 최근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위기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과정 중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사회주의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되고 있고, 소련의 경제개혁 이론가의 한 사람인 타타야나 자슬라프스카야(T. Zaslavskaja)는 소련의 현재의 생산관계는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과 기술수준에 오히려 뒤떨어져 있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과학과 기술을 ‘생산력’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서 과학과 기술이 지니는 ‘이데올로기’적?상부구조적?생산관계적 성격을 하버마스도 그리고 다렌도르프(R. Dahrendorf)도 주장하고 있는데, 기술발전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기술은 사회발전의 ‘원인’이라 보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결과’이며 ‘생산력’이 아니라 ‘생산관계’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즉 기술적 혁신은 인간적 노동에 비하여 싸기 때문에 진행되고 있고 이른바 ‘구조적’ 또는 ‘기술적’ 실업문제도 인간노동에 비해서 기술혁신이 오히려 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다렌도르프는 보고 있다. 이러한 다렌도르프의 주장은 이른바 후기 ‘산업사회’라는 조건 속에서 ‘노동’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노동사회’의 의미 자체가 변하는 서구에서는 타당할지 모르나 기술혁신보다는 인간노동이 아직은 저렴한 한국적 상황에는 어긋나는 주장이다.

4. ‘기술입국’ 이데올로기

물론 저임금에만 의존할 수 없는 한국산업의 성격과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술혁신 그리고 한국산업의 기술적 종속문제가 최근 자주 논의되고 있다. 기술혁신과 함께 기술종속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개개 기업에 의해서도 물론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지만, 특히 ‘국가’라는 하나의 ‘총체적 종(種)’에 의해서 계속 제기되고 있는데 아마도 이러한 명제는 ‘기술입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다고 하겠다.

‘수출입국’에 이어 전개된 ‘기술입국’ 이데올로기는 아마도 일본적 발상만은 아니고, 미?소 그리고 서유럽에서도 이른바 ‘제3의 산업혁명’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불꽃 튀기는 전쟁이 벌어지는 ‘기술제국주의시대’ 내지 ‘새로운 기술의 세계질서’ 속에서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사회주의권에 대한 기술이전을 엄격히 제한?통제하고 있는 이른바 ‘코콤’(COCOM)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공동체(EC)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기술개발 경쟁은 가히 기술이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한국모델’이 계속 뒤쫓고 있는 ‘일본모델’이 창출한 기술입국이라는 신화를 간단히 조명해보고 이 새로운 ‘숨겨진 이데올로기’(Hintergrundideologie)의 몇 가지 측면을 들여다보자.

국민총생산에 대한 연구와 개발비의 비율이 한국은 1986년에야 2퍼센트 수준에 다다른 반면에 선진국은 이미 70년대 말에 벌써 2퍼센트 수준을 넘어섰다. 1981년에 이 비율은 일본이 2.1퍼센트였는데 서독은 2.7퍼센트나 되었다. 일본이 비록 하나의 기술제국주의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해도 1975년에서 1982년까지 기술수입국으로서 주로 미국에서(66.2퍼센트) 필요한 기술을 들여왔고, 기술수출은 주로 아시아(42.4퍼센트), 북미주(22.1퍼센트), 서유럽(21.1퍼센트) 선으로 되었다.

전자산업과 철강생산에서 일본의 기술수준은 상당히 높으나 특히 통신, 제약 그리고 자동차건조기술(!)에서는 기술무역에서 많은 적자를 보이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일본에서 국가의 과학기술개발투자 비율이 미국과 서독에 비하여 적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과학과 기술개발 분야에 절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고도성장의 결과로 60년대 말에야 기술이전이 자유화되었으나, 1980년까지 새로운 기술수입에 대해서 국가는 일일이 통제를 했고, 1981년 이후 실시된 기술이전의 완전 개방 속에서도 문부성?과학기술처?통산성 등은 직접?간접으로 기술입국을 위한 국가적 정책을 입안?조정하고 1982년에는 ‘제5세대 컴퓨터’ 개발을 위해서 통산성이 직접 나서서 대기업들의 이 분야 연구를 총괄하기 시작하였다.

기술입국을 위한 관(官)?산(産)?학(學)의 협동작전은 후발적인 자본주의가 선진자본주의를 따라잡기 위한 총력전이라는 집체적인 민족적 이데올로기로까지 승화될 수 있는 것도 ‘기술대국’이 되어야 ‘정치대국’이 될 수 있다는 정치로서의 기술의 의미를 이해한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우리 시대를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것이 경제나 정치라고 대답하는 사람의 비율은 오히려 줄어들고 그것은 과학과 기술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 기술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새로운 경제나 정치를 뜻하게 되었다. 특히 기술입국이나 기술대국이라는 정치적 이념은 일본에서는 실현되지 못한 정치대국이라는 군국주의의 현대적 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결정론이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서두에도 꺼냈지만 F18기의 도입 결정을 자축하는 맥도널 더글러스의 ‘자유?평화?미래’라는 광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의 정치, 경제 그리고 기술의 복합적 이데올로기 구조가 잘 드러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반공의 무기로서, 경제적으로는 항공산업 등 첨단산업으로의 도약을 보장하는 기술이 숨어 있는 F18이 그러나 일본처럼 하나의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조건에서가 아니라, 민족분단이라는 조건 속에서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우선 남북간에 점차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데에 노력을 경주하고 F18에 소요되는 42억 달러라는 엄청난 재원을 교육투자에 선용하여 현재 취약한 기초과학 분야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정책을 왜 펼 수 없는가 하는 반문이 당연히 나오게 마련이다.

군비경쟁을 통해서 남북이 더 심각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당한다는 이러한 비판은 분명히 정치문제를 단순히 기술문제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입장일 것이다. 모든 문제를 기술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기술결정론적인 견해가 우리에게는 기술이 가지고 있는 원칙적인 제한성을 간과하는 정도가 아니라, 민족분단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문제까지도 우리의 시야로부터 사라지게 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5. 기술자와 기술관료주의

과학과 기술이 갖는 일반적인 표상 즉 ‘가치중립적인 객관성’이라는 표상은 기술이 인간에게 복무한다는 신화를 낳았고 따라서 자연과학자나 기술자들의 정치적 무관심성을 호도하기도 했고 또 이를 정당화하기조차 하였다.

흔히들 “우리는 ‘쟁이’이기 때문에 정치는 모른다”는 이야기를 기술자나 자연과학자들은 한다. 물론 ‘기술인텔리’를 기업이나 공장의 이윤극대화의 수단적인 계급 내지 계층으로 보는 것에 대한 자기방어적 태도일 수도 있고, 또 문명비판적 기술이해나 기술에 관한 전통적인 철학적 해명이 기술을 규정하는 사회적 요소나 현상, 그리고 기술과 기술발전이 역사적으로 축적해온 문제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하지 못한 데에서부터 연유할 수도 있다.

어떻든 기술자의 반(反)정치적 또는 정치무관심적 태도는 우리에게서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기술자나 공학도들이 매니저로도 많이 진출하기 때문에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많은 경우 어떤 식으로나마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는 데에 비하여, 가령 전통적으로 법학이나 상경계통을 공부한 후 매니저가 되는 경우가 많은 서독에서는 아직도 기술자나 자연과학도들이 정치적으로 느끼는 무력감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정은 비슷할 것 같다. 사법고시?외무고시?행정고시를 바라보는 사회적 눈과 기술고시를 바라보는 눈이 분명히 다를 것이다. 전통적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적 서열이 아직도 한국인의 가치관 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직종 중에 의사나 변호사들은 강력한 이익단체(‘의사회’나 ‘변호사회’)들을 구성하고 있는 데 비하여 기술자들의 이익단체의 사회적 영향력은 서독에서조차 아직은 미미하다. 물론 몸이 아프거나 소송사건 때문에 의사나 변호사를 찾을 때 의사나 변호사가 보여주는 전문직이 가지는 사회적 영향력이 직접적인 데 비하여, 기술자가 지니는 영향력은 정상적인 조건에서는 일반 사람들에게 감지되지 않다가, 가령 정전사고가 나서 도시가 암흑천지가 되었을 때에야 전기기술전문가의 존재와 그 위력은 발견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그렇게 자주 발생하지는 않는다.

기술자의 정치적 무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령 기술자의 조합을 결성하자는 제안도 있고 전문교육과 동시에 사회적?정치적 관련 속에서의 과학과 기술의 역할에 대한 종합적 교육을 병행해야 한다는 대안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기술자가 지니는 계층으로서의 복잡성으로 인한 조합결성의 어려움, 그리고 그러한 교육도 사회과학적 인텔리들을 기술자들이 보좌하는 정도를 오히려 강화시켜줄 뿐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고 있다. 기술자의 현실적인 정치적 무력은 분명히 기술의 영역은 정치의 수단영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과는 정반대로 정치영역을 기술영역의 수단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즉 정치를 기술로 완전히 대치할 수 있고, 따라서 사회를 정치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술전문가에 의한 통치’(Expertokratie)로, 사람이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물’(物)이나 ‘도구’가 통치하는 것으로, 나아가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생산한다는 ‘기술적 가능성의 규범성’을 주장하는 기술관료주의가 그러한 입장이다. ‘인간기계’(L’homme machine)를 주장한 생시몽(Saint-Simon)을 원조로 하는 이러한 이론은 독일에서는 셸스키의 ‘기술문화 속의 인간’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데 자기제어적인 ‘기술적 국가’(technischer Staat)에서는 정치, 정치적 결정영역은 사라지고 순전히 기계처럼 정확한 ‘물’의 객관적 논리에 의해서 운영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의 산업사회가 전문가들에 의한 관료주의적 운영에 의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내에 존재하는 여러 이익집단이 참여하는 오늘의 국가는 그렇게 전능한 것도 아니고, 기술적 국가라는 모델은 또 비역사적이고 보편적으로 해석된 인간학을 바탕해서 고도로 추상화된 모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이와 같은 기술관료주의가 비정치화된 대중의 의식 속에 침투하여 정당성을 획득하는 하나의 숨겨진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나아가서 그는 이 모델이 문화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의 세계’(Lebenswelt)를 목적합리적 행위와 수용적 태도라는 범주로만 환원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이 한편에서는 기술전문가의 정치적 무력과 무능을 이야기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술전문가에 의한 정치를 이야기하고 있고 또 이를 비판하고 있다. 물론 기술전문가가 전문영역의 제한성과 고정적인 방법론 때문에 제약되어 있고, 또 정치가들은 선거를 의식하기 때문에 보편적 이익을 장기적으로 계획할 수 없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술전문가와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 사이에 비판적 교호(交互)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서 사회의 보편적 이해를 장기적으로 구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1954년에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은 “만약 인류가 핵전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면, 인류는 기계와 컴퓨터를 조작하는 독재자의 전제 밑에서 무디고 어리석은 피조물의 무리로 전락될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영역에서 특히 정치에서 우리는 인간적 경험과 인간관계의 이해를 자연과학과 기술의 이해와 통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들은 또 행동하는 인간이어야지 관조만 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전화를 도청하는 ‘검은 상자’(Black Box)가 얼마 전에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이의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나 기술자들이 어떠한 고민을 하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자와 기술자의 윤리는 옛날처럼 엉터리 이론을 펴서 사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1974년 유네스코가 "과학자의 위치"에서 지적하였던 것처럼 인간의 존엄과 자연을 위하여 과학자는 복무해야 한다는 적극적 윤리이다.

6. 과학과 윤리

우리나라에서도 시험관아기나 대리모가 안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고 원자력발전소나 공해문제를 둘러싼 시민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과학자들이 그들이 연구하고 개발하는 이론과 이의 실제적 전용(專用)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까 하는 문제를 둘러싼 윤리적 고민은, 특히 제1차 세계대전중에 사용되어 무수한 인명을 살상한 독가스 개발과 관련되었으나, 정작 독가스를 개발한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었다. 동료들 사이에서 인간적으로 또 연구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하버가 독일민족의 전쟁승리라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 것은 SDI개발계획을 소련을 견제하는 반공이데올로기의 과학적?기술적 실천 정도로만 이해하는 과학자의 입장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입장에 대항해서 SDI개발보다는 군축협상을 요구하는 미국과학자들의 모임인 5,000회원을 가지고 있는 ‘FAS’(Federation of American(처음에는 Atomic) Scientists)나 10만 회원이 가입된 ‘UCS’(Union of Concerned Scientists)의 반(反)SDI캠페인은 SDI계획을 철회시키지는 못했지만, 일반시민과 과학자 심지어는 행정부내의 고위관리들 속에까지 SDI가 하나의 ‘환상적인’ 계획이라는 인상을 깊게 심어주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SDI투자예산 규모도 그후 많은 삭감을 당했다.

서독에서는 1983년부터 미국의 중거리유도탄의 서독설치에 반대하는 시민운동과 더불어, ‘평화를 위한 책임, 새로운 핵유도탄을 반대하는 자연과학도’라는 주제 밑에 전국적인 강연?시위?토론을 통해서 수천의 자연과학도들이 반전평화운동에 참여해서 과학도의 사회적 책임을 보여주었다. 특히 교회가 지니는 윤리적인 규범력이 급속히 약화된 서독사회에서 자연과학적인 인식에 기초를 둔 객관적인 자연과학도들의 평화에 대한 설득은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서독에도 중거리유도탄이 설치되지만, 자연과학도들은 어떠한 연구의 결과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는 과학연구가 지니고 있는 애매한 성격 속에서도 부정적인 결과가 예견될 때는 분명히 이에 대하여 행동으로 ‘아니오’를 표명하는 새로운 전통을 세웠다. 특히 히틀러 치하에서 인간말살의 도구로도 사용되었던 과학연구가 지니고 있는 무거운 짐을 진 독일 자연과학도들의 윤리적 자기반성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renmatt)가 ?물리학자들?(Die Physiker)이라는 작품에서,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는 자연과학도들의 양심의 고민을 그려 보인 문학적 결론은,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ker)가 말한, 기술시대의 윤리는 오로지 인간이 정말로 계획과 도구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결론과도 통한다. 『미래의 충격』을 쓴 토플러(A. Toffler)는 기술혁신에 대한 저항을 예방하기 위한 책임있는 기술을 논한 적이 있다.

생태계 파괴 문제와 관련된 시민들의 예민해진 자연에 대한 감각과 의식은 서구에서 녹색당의 등장을 가져왔고, 현재 동구의 변혁 속에서 등장하는 야당들은 거의 모두 그들의 강령에 ‘생태계 보호를 지향하는 사회적 시장경제’(?ologisch orientierte soziale Marktwirtschaft)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핵무기나 핵발전소 또는 화학적 문제로부터 연유하는 생태계 위기에다가 최근에는 ‘유전자 조작’이 가져오는 가공할 ‘인간’ 개념의 변화도 심각하게 토론되고 있다. 이러한 공상과학적 소설의 테마가 되고도 남을 상황을 불교에 심취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1932년에 발표한 풍자적 미래소설 ?아름다운 신세계?(Brave New World)를 통하여 이미 고발하였다. 과학이 유일하게 타당한 가치규범으로 되어 있는 이 세계에는 어떠한 신도, 아니 모든 세계종교가 지금까지 덕목에 적어넣은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도가 단순한 ‘자연의 광적인 세심한 장사꾼’이 되었다고 비판한 호프만(E.T.A. Hoffmann)이나, 과학이 ‘존재질서의 하녀’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야스퍼스의 꿈도 오늘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고 있다. 특히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의 핵을 이루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문제가 하나의 민족경제단위의 사활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과학과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이나 비현실적인 문제로 들릴 것이다.
한국의 과학자들에게 요구되는 윤리나 사회적 책임은 그러나 그렇게 추상적인 것만은 결코 아니다.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전화도청을 위한 기계장치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가 그의 진실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은폐된 핵발전소 사고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공해문제, 남북무기개발경쟁의 반평화적 구조, 노동재해, 식품공해, 약품공해 등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 생활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제기된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브레히트(B. Brecht)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자들의 사고를 지배해왔던 연구와 기술의 비책임성 내지 몰가치성이라는 ‘발명가적 난쟁이’(erfinderlicher Zwerg)의 철학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미래 속에서 일면적으로 ‘희망’만을 보고 있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너무나 망각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와 후손에 대한 책임은 과학과 기술문명시대의 주역인 과학자와 기술자에게는 더욱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풀포기를 단지 냄새 맡아서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 무슨 풀포기인지 알기 위해서 그것을 뽑는 사람도 역시 그 풀포기를 모른다”고 횔덜린(F. H?derlin)은 ?히페리온?(Hyperion oder der Eremit in Griechland) 서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지니는 미래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생명의 총체성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 읽고 흘린 눈물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과거의 영욕을 예사로이 접하게 돼서 그런지 필자는 아무리 감동 깊은 책을 읽어도 웬만큼 눈물 흘리는 일이 없다. 그러나 최근에 책 앞에서 슬쩍 눈물을 닦은 일이 있었다. 비행장에서 시간이 남아 미국의 저명한 진보 사학자 하워드 진의 〈20세기〉라는 저서를 샀을 때 민중사 내지 민중투쟁사라고 분류돼야 할 이 책이 필자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할 줄은 몰랐다. 대개 민중사, 투쟁사는 조직 이름과 연혁이 골자 되는 아주 엄격한 장르로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진의 이 역작을 막상 읽어내려 가니 감정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1912년, 매사추세츠주의 로렌스(Lawrence)라는 방직업 위주의 공업 소도시.

이탈리아, 포르투갈, 폴란드, 러시아 등 유럽 주변부에서 몰린 가난뱅이들이 1970년대 초반의 평화시장을 방불케 하는 조건 아래서 일한다. 주당 8달러의 월급 아닌 월급에다 작업 환경이 얼마나 나빴던지 10대 후반에 취직하는 노동자 중에 26세가 되기 전에 3분의 1이 이승에서 못찾은 안락을 저승에서 찾게 되었다. 기계보다 더 낮게 취급되는 그들에게 다시 월급 삭감이라는 치명적인 재앙이 닥치니 로렌스 전체가 드디어 동맹 파업의 화염에 싸이게 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달달 외웠지만 이 책에서 묘사된 파업에 대한 당국의 태도는 박정희로서도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야만적 구타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경찰이 한 임산부를 하도 때려 유산을 한데다 다른 여공을 살해해 놓고는 파업 노동자의 지도부를 살인죄로 고소해 감옥으로 보낸 것은 그 당시 미국의 “민주적”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국 전역의 노동계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파업이 장기화되어 노동자들의 가정에서 영양실조가 만연하게 되어 먹을 게 없는데다 경찰의 폭력에 노출된 노동자 자녀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생겼다. 유럽 같으면 그럴 때 타도시 노동자들이 동료들의 자녀를 임시적으로 맡아 키우는 것이 관례이었지만 왜곡된 “개인주의” 풍토가 태심한 미국에서 그런 전례가 아직 없었다. 그러다 사회주의 신문에서 궁여지책으로 로렌스 노동자 자녀들을 임시로 위탁받을 부모를 모집하는 공고를 내보냈더니 놀랍게도 뉴욕 등지의 여러 나라 출신 노동자들의 문의가 쇄도하게 됐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로렌스를 빠져나간 뒤에 이 “비(非)미국적인 일”에 충격 받은 경찰들이 엄마와 아이들을 피범벅으로 만드는 잔혹한 장면을 연출했지만 노동자들의 연대 앞에서는 총검도 무용지물이었다. 결국에는 로렌스의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쟁취하게 되었고 이 파업은 미국 노동운동사의 한 분수령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 왜 필자가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을까? 그것은 아마 진정한 “밑으로부터”의 사회주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굶주림과 구타 속에서 생존과 인권을 위해 파업하는 얼굴 모를 여공의 아이를 인종·종족·종교적 배경과 무관하게 같은 노동자로서 같은 인간으로서 봐주겠다고 나서는 정신이야말로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본질일 것이다. 노동운동이 사회를 이끌어가자면 이론이나 전략이라는 올바른 “머리”도 필요하지만 이와 같이 서로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연대의식이 없다면 결국 제자리걸음인 것이다. 만약에 이라크 땅을 짓밟고 있는 미군들이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이러한 로렌스 파업 같은 것을 제대로 배웠다면 지금처럼 돈에 몸을 팔아 점령하의 이라크라는 감옥의 간수가 되었겠는가. 인간의 동병상련에 바탕을 둔 연대를 빼버린 어용 “반쪽” 역사가 미국을 지배하게 된 것은 결국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수많은 민중의 참혹한 파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숨은아이 2005-04-1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자명한 산책님 서재에서 보고 왔어요. 퍼갈게요. 꾸벅.
 

미국은 긍정적인 의미로 흥정과 타협의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비행기의 같은 등급 좌석표도 타는 사람마다 다른 값을 지불하고, 같은 호텔 같은 등급의 방값도 개인의 구매방식, 시기, 능력 등에 따라 다르다. 같은 전화회사를 이용하여 장거리/국제전화를 걸어도 가입된 플랜에 따라 비용은 달라진다.

산업체에선 항상 정찰가를 다 지불하는 '묻지마고객'이 전체의 1/3이라 추정하며 비공식적으로 멍텅구리 (Sucker)라 부른다. 그들이 사실상 회사를 먹여살리는 주고객이지만 회사로부터 특별히 더 받는 서비스는 전무하며 오히려 각종 판촉행사와 할인판매에서 철저히 제외되는 처지에 있다.

맹목적 박리다매는 오늘날 더 이상 모든 회사들이 추구하는 경영철학이 아니다. ‘천사고객과 악마고객 (Angel Customers & Demon Customers)’의 공동저자이며 콜럼비아 대학 경영학 교수인 래리 셸든(Larry Sheldon)은 2년 전 전자제품 판매체인인 BestBuy 대표이사 브래드 앤더슨 (Brad Anderson)을 설득하여 32개 판매장을 4 종류의 천사고객에 맞게 재설계하였다.

그 천사들은 최첨단 전자제품을 줄줄 꿰는 젊은 청년층, 주로 가전제품을 구매하는 바쁜 극성엄마 (Soccer Mom), 오락 (Entertainment)을 남달리 추구하는 부유층, 그리고 경제적으로 무리하지 않는 가정적인 가장이다. BestBuy는 악마고객들을 퇴치하기 위해 판촉물을 대폭 줄이고 반품 (Return)에 대해 재고비용 (Restocking Fee)을 물리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가 높은 수익율로 이어져 올해엔 그 사업 아이디어를 68개 판매장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여기에서 ‘멍텅구리’라는 비공식 명칭은 ‘천사고객’이란 공식명칭으로 대체되며 정확히 구분하자면 진부분집합관계에 있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미국사회의 뿌리깊은 흥정과 타협의 전통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대학(원)생의 학점에 관한 간청은 대가없이도 종종 담당교수에 의해 선처되고, 정찰제가 철저히 지켜지리라 누구나 믿고있는 고급백화점에서도 매니저와의 간단한 면담으로 쉽게 할인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환자가 의사에게 의료비 할인을 당당히 요구하는 것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러나 흥정이 통할 수 없는, 아니 흥정해서는 안될 것이 사회엔 분명히 존재한다. 조세제도가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조세평등에 관한 정의와 방법론적 시행세칙은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결정될 사항이지만 일단 정해진 조세법과 원칙 자체는 이념이나 특수계층의 이권과 무관하게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고있다.

불행하게도 미국의 소득세법이 자국 내에서 ‘넝마’라 공공연히 불리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소신있는 조세전문가나 자성하는 몇몇 정치인들만의 넋두리는 더욱 아니다. 소득세 관련법은 그 분량이 이미 6만 쪽을 넘어섰고 (4만여 쪽에서 지난 9년 간 48% 증가) 매년 수 백건씩 변경/추가되는 각종 규정, 법규들에 대해 대다수 일반인들은 물론 적지않은 전문가들조차 무지한 상태다.

미국의 한 소비자잡지 통계에 의하면 2002년 개인소득세 납세자의 60%가 전문가에게 세금보고를 의뢰하였고 거기에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거나 유료웹싸이트 등을 통해 도움을 받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자력으로 세금보고를 한 사람은 채 20%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세금보고를 한다하여 정확한 것도 아니다.

Money 잡지사는 1987년부터 매년 전국의 세무전문가들 중 참여를 원하는 50인을 선택하여 가상개인소득세맞추기 경시대회를 치루어왔는데 그 결과는 단 한 해의 예외없이 참가자 대다수의 망신살로 이어졌었다. 그들은 소득세로 생업을 영위하는 전문가들 중에서도 자신의 실력이 상위권에 속한다고 굳게 믿고있는 사람들로서 시험은 Take-home, Open-book 형식이었다.

1994년의 예를 들자면, 응답한 50인 중 10문제를 모두 맞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34명이 5문제 이상을 맞췄으며, 18명만이 Provisional Income (사회보장혜택에 세금을 부과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총개인소득)의 정의를 제대로 알고 있었고, 6명만 AMT (Alternative Minimum Tax: 주로 고소득층이 절세의 방편으로 소득의 일부를 면세나 감세혜택을 받는 투자를 통해 얻을 때 지나친 절세를 방지하여 최소한의 세금을 물리게 하려는 의도에서 도입한 규정으로 지금은 오히려 애매한 중산층이 피해를 보고 있어 개정이 불가피한 실정)에 관한 당해년 세법개정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오직 1명 만 면세부채권 (Tax-exempt Bonds) 이익(Gain)에 보통소득과 같은 세율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늘 응답자 모두의 답이 각기 다르기 일쑤였다. 1990년엔 그들이 계산한 납부할 금액이 $6,807에서 $73,247까지 차이를 보였고 청구한 비용은 $375에서 $2,500까지였다. 또한 세무사의 비용이 정확성과는 무관하다는 결과가 나와 고비용 세무사가 나을 것이라는 예상마저 해를 거듭하여 깨졌다.

2001년 5월 15일자 Wall Street Journal의 기사에 의하면 재무부 조사관 (Treasury Inspector General)의 감사결과 미국세청 (IRS: Internal Revenue Service)이 납세자에게 제공하는 도우미정보는 73%가 틀리거나 불충분한 것이었고 그에 반발한 IRS 자체감사를 인용하더라도 50%였다고 한다. 세금을 징수하는 국가기관 자체에서도 제대로 답변할 수 없을만큼 복잡하고 전문가들조차 헷갈려 하는 현세제에 대해 납세자가 신뢰감을 갖기는 불가능하며 그들에게 성실한 납세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인 것이다.

제각기 다른 이익집단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우후죽순처럼 제정된 법조항들로 조세평등의 대원칙은 무너지고 일관성 있는 법정신마저 실종되어 극도로 혼란스런 양상이다. 게다가 모순점을 상쇄한답시고 추가로 제정한 많은 법조항에 포함된 가산점 (Credits), 면제 (Exemptions), 예외조항 (Exclusions), 공제 (Deductions), 단계적 삭감 (Phase-out) 등의 규정들은 오히려 더욱 불공평한 상황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 주로 상류층의 독점적인 합법적 탈세로 이어지는 허점 (Loopholes)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곧바로 잠재적 세수의 현격한 감소를 초래할뿐 아니라 부유층에서 중산층, 빈곤층으로 상대적 조세부담이 전가(轉嫁)되는 현상 (Shifting Tax Burden)으로 나타난다. 부유층의 실질적 소득 대비 소득세율이 중산층의 그것보다 별로 높지 않고 극상층 (Super Rich)은 오히려 낮은 기현상이 그러한 사실을 뚜렷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소득세는 조정총과세소득(Adjusted Gross Income: 調整總課稅所得)을 기준으로 세율이 정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소득 납세자일수록 조정의 폭이 원천적으로 커지는 점을 고려하면 같은 세율이라해도 부유층의 실질세율은 낮게 마련이다. 그점을 염두에 두고 2000년 통계를 살펴보자. 상위 1%인 연소득 $313,000 이상의 부유층 1.3 million 납세자/가정은 전체 소득의 21%를 벌어들이고 개인소득세의 37%를 지불했다. 거기에 자동차 연료, 맥주 등에 붙는 특별세와 역진세의 성격을 띤 사회보장세, 그리고 상속세 (점진적으로 느슨해지다가 2010년에 완전 폐지) 등의 다른 연방세를 고려하면 상위 1%가 내는 세금은 25%까지 떨어진다. 즉, 실상은 무늬만 누진세이고 내막은 비례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공제혜택으로 소득세를 거의 내지 않는 극빈층을 감안하면 중산층의 조세부담이 상대적으로 가장 무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불평등한 세제의 두 가지 대표적 예를 들어보자. 첫 번째는 일반인이 알아낼 능력이 안되는 합법적인 탈세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일반대중을 이용한 기만적인 술법에 관한 것이다.

1. 빌 게이츠는 한 때 자신의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을 매각하여 얻은 $200 million 차익에 대한 양도세 (Capital Gain Tax) $56 million 중 단 $1도 지불하지 않는 기교를 부렸었다. 그 수법은 여유있는 계층에겐 낯익은 공익신탁 (Charitable Trust)이었다. 즉, 자신이 설립하고 조정하는 자선단체에 소유주식을 기증하여 면세로 주식을 매각한 후 통상 받는 연 6%의 소득 대신 2년 간 연 80%씩 지불받는 편법으로 총 $192 million을 챙기곤 (첫 해에 $160 million, 그 다음 해에 $32 million) 곧바로 신탁을 해제함과 동시에 나머지 $8 million을 자선단체에 남기는 것이다. 결국 마지못해 기부한 $8 million조차 사실은 자기 돈이 아닌 포탈한 국세로 선심을 쓴 셈이다.

이런 사실이 수 년 후 전문기자들에게까지 소문이 나 대중의 무관심 속에 신문의 조그마한 공간을 장식할 때쯤 되면 극상층을 고객으로둔 유능한 조세전문변호사들은 이미 개발완료된 또 다른 비밀편법들을 사용하여 그들의 절세를 돕고 있으며 IRS의 저급인력으론 법정에서 제대로 도전할만한 능력과 여유가 없는 실정이다.

2. 1986년 이전까진 모든 융자에 대한 이자상환액은 세금공제의 대상이라 그야말로 과소비가 미덕이었고, 1987년 이후 주택융자 이자상환금의 세금공제혜택 융자한도액은 $1 million가 되었다. 지금이야 대도시 근교에선 마을전체 주택평균가가 $1 million가 넘는 곳도 흔하지만 1987년 당시 통상 20%의 계약금 (Down Payment) 지불 후 $1 million 융자하여 살 수 있는 $1.2 million짜리 주택은 흔치 않았으며 그 어떤 이유로도 주택 구입시 정부의 감세혜택이 필요한 계층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산층의 집소유율을 높인다는 미명 하에 제정된 이 법안은 출발부터 극상층에게 가장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모순점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소득세법엔 이런 식으로 중산층을 팔며 상류층이 최대의 수혜자가 되는 태생적 진의가 의심스러운 법조항이 부지기수다. 조만간 국회는 이 제한액수를 $1 million에서 $5 million나 $10 million쯤 아니 아예 제한자체를 없애는 규정을 슬며시 다른 법안 상정에 삽입하여 소문없이 통과시킬지도 모른다.

미국소득세제는 그 어느 기준으로도 뿌리부터 뽑고 다시 심는 일대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며 지금까지 그 대안으로 1994년에 제안된 간결하고 공평한 17% 비례세(Flat Tax)나 소득세 완전폐지와 병행한 23% 소비세(The Fair Tax) 등이 있다. 계산이 빨라 반대하는 상류층과 막연히 변화에 대해 불안한 중산층, 그리고 뭘 모르는 하류층에 의해 논의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 대안들을 비롯하여 일반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증여/상속세(Gift/Estate Tax), 재산세 (Real Estate/School Tax), 양도세 (Capital Gain Tax) 등이 얼마나 불공평한지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주: 나는 세무전문가가아니며 경제/회계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이 글은 단지 일반 납세자의 입장에서 그동안 미국에 거주하며 겪고 느낀점을 종합하여 밝힌 개인적 견해이며 통계수치와 사실적 인용은 진실에 입각한 것임을 밝힌다.

Copyright (c) 2005 가로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