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투쟁’ 민주화시대의 명암

왜 간호조무사는 신생아를 학대했을까, 왜 사이버 삐끼들은 횡행하는가
인정욕구가 매우 강한 한국의 네티즌들, 티티테인먼트로 흐를까 염려된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인간이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너무나도 깊고 근원적이어서 인류의 역사 발전에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 옛날에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욕구가 발휘되었지만, 오늘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군사 영역에서 경제 영역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동기는 먹고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경제생활이 물질적 풍요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인정을 얻기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상호 의존성은 명백해진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체제인바, 오늘날 사실상 모든 선진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 사회의 폭넓은 진화라는 마르크스주의적·헤겔주의적 의미의 역사는 이제 끝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

국내 언론이 대서특필해준 덕에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을 요약해본 것이다. 후쿠야마는 좀 독특한 유형의 본질주의 함정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들 밥은 먹고 살잖아?” 사람 사는 걸 ‘밥’이라는 본질로 환원해버리면, 그 밥의 값이 천차만별이라는 건 사소해진다. 극심한 빈부 양극화 체제에서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도 그 세계에선 나름대로 ‘인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겠지만,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데 부유층이 추구하는 ‘인정’과의 엄청난 괴리에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인정의 빈부격차’가 다시 문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정의 빈부격차’는 아직 심각한 화두로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새로운 대안이 아주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에 의해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티티테인먼트’(tittytainment)라는 개념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세계화’로 인해 ‘20 대 80’(부유층 20%, 빈곤층 80%)이 이루어진 세상에선 티티테인먼트가 판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entertainment’와 엄마 젖을 뜻하는 속어인 ‘titty’를 합한 말인데,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을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면서 흥분한 나머지 괴성까지 질러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게 괜한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요즘 그렇게 말했다간 시대착오적인 인간으로 몰매 맞기 십상이다. 게임은 ‘국민산업’이 아닌가.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인정투쟁’의 민주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아니 언제는 그런 시대에 살지 않았단 말인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전투적으로 묻는다면, 인류 역사 이래로 그랬다고 한발 뒤로 물러서야 하겠지만, 겸손한 자세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 조무사가 신생아를 학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건으로 경찰서에 출두한 어느 간호 조무사는 “싸이월드에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예쁘게 꾸미고 싶었다. 영아들의 인상을 특색 있게 해 주변 다른 간호 조무사 또는 간호 관련 종사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 이거 아주 중요한 ‘인정투쟁’이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연예인 누드 사진을 보고 싶으면 내 홈피로 오세요”라는 글을 올려 작은 소동을 빚었던 주인공도 자신의 홈피 방문자 수를 늘려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초등학생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도 인정투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근의 ‘성기 노출’ 사건도 그랬지만, 무슨 사건만 터졌다 하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삐끼’들이 나타나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놀러 오세요. 보러 오세요. 화끈해요. 죽여준다니까요.” 아니다. 삐끼는 아니다. 삐끼는 돈을 벌기 위해 그런다지만, 우리 시대의 사이버 삐끼는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 조회 수를 올리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그러는 것뿐이다.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거짓말로 유혹하는 삐끼들도 있다지만, 행여 화를 내선 안 될 일이다. 조회 수 올리는 걸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그 소박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몸부림에 감히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인터넷 이전과 이후가 이렇게 달라졌다. 과거 보통 사람들의 인정투쟁은 수단이 미비했다.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이라 할 미디어는 엘리트의 독무대였다. 학생들의 경우 공부를 빼놓곤 기껏해야 소풍이나 수학여행에서 뭔가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수단이 없었다. 운동을 잘하거나 주먹을 쓰거나 연애박사가 되는 길로 빠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돈질도 부유층 자제에 국한되었다.

유희주의에서 공동체주의까지

인터넷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인터넷이 ‘규범 테크놀로지’로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파급 효과가 인터넷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앞으로 어떻게 더 달라질 것이란 말인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보자면 ① 유희주의 ② 다문화주의 ③ 극단주의 ④ 공동체주의 등 네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다.


△ 정부가 인터넷 실명제를 들고 나왔을 때 네티즌들의 대다수가 이에 찬성했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정치개혁연대 회원들이 인터넷 실명제에 항의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첫째, 유희주의다. ‘유희주의’란 말은 없다고 시비를 걸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 유희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찜쪄 먹을 수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좋겠다. 인터넷의 본질은 유희다. 사람에 따라 ‘오락’이라고도 하고 ‘엔터테인먼트’라고도 한다.

‘엔터테인먼트 경제’는 이미 주류로 등극한 지 오래다. 인포테인먼트, 에듀테인먼트, 폴리테인먼트, 도큐테인먼트, 마켓테인먼트, 이터테인먼트, 처치테인먼트, 워크테인먼트, 쇼퍼테인먼트, 볼런테인먼트, 티티테인먼트 등 엔터테인먼트를 물고 들어가는 수많은 합성어들이 양산되는 게 그 위력을 잘 말해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미래연구소 소장 폴 사포는 “디지털 기술은 너무나 흡인력이 강해서 ‘모든 것’을 유희의 도구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크다. 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읽을 수 있듯이, 위대한 문명의 몰락은 모든 것을 유희화한 데서 비롯됐다”고 경고했다.

그대로 믿을 말은 아니지만, 유희 아닌 것들이 이젠 유희와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지 않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해졌다. 유희는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으로 등극하면서 전투성을 획득했기에 더욱 그렇다. 예컨대 정치가 무슨 수로 유희와 경쟁할 것인가. 하긴 그래서 정치가 자꾸 유희화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사주간지마저 유희와 타협하지 않고 이렇게 골치 아픈 이야기 하면 문을 닫아야 하는 건가? 생각해볼 점이다.

둘째, 다문화주의다. 최근 인터넷엔 “님의 노예로 부려주시옵소서” “어린 ‘주인님’을 찾습니다” “내 속옷도 팔아요” 등을 외치는 카페가 많아졌나 보다. 가령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발’이란 단어를 치면 발을 탐닉하는 카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한 포털 사이트에는 이런 카페가 600개 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은 이런 카페를 ‘변태 카페’라고 이름 붙였지만, ‘변태’의 경계 설정은 이제 날이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그간 다문화주의는 소수자의 권익 옹호라는 점에서 좋은 의미로만 여겨져왔다. 인터넷 이전엔 당당하게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소수자들 중심으로 소수자를 이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소수자’의 폭발을 몰고 왔다. 인터넷 이전엔 뭉치기 어려웠던 소수자들까지 대거 인정투쟁을 위해 독자적인 동아리 또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늘 보수파의 공격 대상이었지만 이젠 일부 진보파도 다문화주의 공격에 합세했다. ‘성향의 소수자’건 ‘취향의 소수자’건 이들의 특성은 자신의 열악한 위치를 타개하기 위해 ‘단일 이슈 정치’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슈 한 가지만을 보고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진보파는 이런 정치 행태가 소수 집단간 ‘연대’를 파괴해 진보 정치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게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점점 한국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

셋째, 극단주의다. 인터넷은 대중의 전폭적인 참여와 그들의 인정투쟁 욕구로 인해 전반적으로 보아 반지성주의로 흐르게 돼 있다. 지성주의는 좋고 반지성주의는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한겨레> 문화생활부장 이인우는 “반지성주의·반지식인 정서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 문화의 특징적 흐름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다고 본다”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인터넷을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는데, 이게 중립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쇄술이 지식의 생산과 소유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과 같이 지식과 정보가 급속하게 전파되고 공유되고 가공되는 인터넷 문화가 지식과 정보의 평균화, 지성의 평등화가 가능한 것 같은 착각을 대중들에게 확산시키고 있는 것 같다.”

화끈한 해결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반지성주의에도 좋은 점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지성주의와 사이버 폭력이라는 극단주의가 상호 무관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정부는 사이버 폭력을 일소하겠다며 ‘인터넷 실명제’를 들고 나왔는데, 흥미로운 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반대하는 의견보다 최대 4배 가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야후 조사에서는 찬성 79%, 반대 20%로 나타났으며, 20~30대 이용자가 많은 네이버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5%가 실명제 도입에 찬성한 반면 반대 입장은 32%에 그쳤다. 이게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심층 분석해볼 필요가 있겠다.


△ 인터넷 전문가들은 한국 인터넷이 유희 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인터넷 강국론'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사진은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한국인터넷 게임리그 결선 경기. (사진/ 한겨레 이정우 기자)

넷째, 공동체주의다. 지금은 무분별한 사용으로 오염된 단어가 되었지만 초기의 ‘해커’를 떠올리면 되겠다. 해커는 원래 ‘인정’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도덕성 수준도 높았다. 남들이 자신의 기술 수준을 인정해주는 기쁨 하나로 돈도 받지 않고 폐인이 될 정도로 자신을 혹사해가며 프로그램 개발에 헌신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다. 누군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할 때에 남들이 얼마나 주목해주느냐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내가 무슨 희생을 하건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면 희생하고 싶은 마음도 약해질 것이다. 반면 나의 희생이 영웅적 행위로 널리 알려질 수 있다면 애초 마음먹었던 희생의 정도보다 ‘오버’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사이즈’와 ‘주목’의 경계를 깬 열린 공간으로 이타성과 협동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주의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인터넷 강국론’은 정말 허구가 아닐까

이렇듯 인터넷을 주요 무대로 삼은 인정투쟁엔 명암이 있다. 세계 각국의 인터넷을 두루 살펴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한국 인터넷 문화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네티즌들의 인정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간 한국은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 충족에 무심한, 아니 억압적인 사회였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게 좋겠다. 대중의 인정 욕구 충족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인정 욕구 충족의 방식이 획일적이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의 인정 욕구가 충족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사회는 인정 욕구 충족에서 일렬 종대로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돈,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명품, 골프 등 모두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익숙한 문화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무지막지한 위계가 “한국에선 인간답게 살려면 어찌어찌해야 한다”는 수많은 속설들을 낳았고, 또 이것들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하게 만든 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어,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조차 자랑스럽게 뻐겨대는 ‘세계 10대 경제강국론’에 흔쾌히 박수를 치기가 어려워진다.

인터넷이라는 축복이 인정 욕구 충족의 다른 출구를 열어준 것은 그 어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야 마땅하겠건만, 다문화주의의 일부와 공동체주의를 제외하곤 이것마저도 혹 ‘티티테인먼트’가 아닌가 싶어 주저하게 된다. 인터넷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는 많은 인터넷 기업가·전문가들이 한국 인터넷은 세계에서 가장 유희 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른바 ‘인터넷 강국론’은 허구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그런 주저가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정투쟁 민주화의 내실화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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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론?

이따금 “문장론이 뭐냐”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현실에 익숙하지(하고 싶지) 않아서 늘 대답을 흐리곤 한다. 사실 나는 어떤 문장론을 갖고 글을 쓰진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어쨌거나, 문장론이 있든 없든, 내가 초고를 써놓고 퇴고를 거듭하는 걸 보면 나에게도 문장에 대한 어떤 태도는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두 가지일 것이다. 간결함과 리듬.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퇴고를 한다. 군더더기라 느껴지는 건 망설임 없이 없애거나 좀 더 간결한 표현으로 바꾼다. 나는 중언부언 하는 것만 군더더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화려한 표현도 군더더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 반복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같은 글에선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10매 이하 칼럼에선 반드시, 30매가 넘어가는 긴 글에선 되도록 그렇게 한다. 동시에 리듬을 만들어간다. 거창하게 말해서 운율을 맞추는 건데, 눈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리듬감이 흐트러지거나 호흡이 끊기는 부분은 글자 수를 고치거나 단어를 바꾼다.

간결함과 리듬이 덜 다듬어진 글을 내놓는 것처럼 불편한 일은 없다. 어쩌다, 내 글의 1.5할쯤에 해당하는 글에서, 이런저런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도리 없이 그러곤 하는데 그런 글들은 그저 실용적인 이유를 위해 일회용으로 존재한 것일 뿐, 내가 썼지만 더 이상 내 글은 아니라 여긴다. 간결함과 리듬 말고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쓰는 것이다. 나는 왜 거의 모든 글쟁이들이 글은 쉬우면 쉬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먹는 어려운 말을 이유 없이 쓰지 않는 건 물론이려니와 되도록 한자말을 줄이려고 애쓴다.

그러나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서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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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는 왜 파시스트로 전락했는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6> 바그너와 김지하
  2005-08-11 오전 11:57:06
  파르지팔
  
  2001년 12월 런던에 도착한 이틀 후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코벤트가든의 로열오페라하우스를 향했다. 사이먼 래틀의 지휘에 의한 바그너의 <파르지팔(Parsifal)>의 공연날인 것이다.
  
  나는 오페라 애호가이지만 바그너에 한해서는 불과 세 번째 관람이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멀리해 온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십수 년 전에 빈국립가극장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보고 아주 따분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건 내가 미숙했던 탓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바그너와 반유대주의, 바그너와 나치즘이라는 곤란한 문제이다.
  
  뛰어난 예술을 정치적 이유만으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그너의 경우, 그렇게 말하고 끝내기에는 문제가 너무도 크다. 나치가 바그너를 이용했다고 하는 옹호론이 있는데 1850년에 '음악에 있어서의 유대성'이라는 논문을 공표했듯이 그자신이 19세기의 반유대주의이데올로기의 주요한 제창자였던 것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할 때 배낭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악보를 넣어가지고 지냈다고 전해진다. 바그너의 음악자체에도 나치를 매료하는 요소, 국수주의나 파시즘에 이어지는 요소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에 무경계해도 될 것인가? 이점을 바그너 애호가로 불리는 몇명에게 물어 본적이 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은 기억은 없다.
  
  그런데 실은 그 전해인 2000년 여름 잘츠부르크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본 것이다. 지휘는 병중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대신해 로린 마젤. 나에게 있어 두 번째 바그너 체험이었다. 그게 좋았던 것이다. 불가해한 감동이었다. 더 알고 싶다는 강한 호기심이 솟아났다. 위험한데, 라고 생각한다. 생각하지만 호기심의 수위가 경계심보다 높은 것이다.
  
  공연은 오후 4시부터의 마티네였다. 토요일 오후인만큼 주위는 대단한 인파이다. <파르지팔>은 중세의 <성배전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바그너 자신이 '무대 신성 축전극'이라고 부른 그의 생애 최후의 악극이다. 1882년에 이 작품을 완성해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의 초연을 성공리에 마친 후 바그너는 베네치아로 정양을 떠나 이듬해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 * *
  
  스페인 북부의 산지 몬살바트의 성주이자 성창(聖槍)과 성배(聖杯)의 수호자인 암포르타스왕이 요녀 쿤드리를 향한 애욕에 눈이 멀어 사악한 마법의 신 클링조르에게 성창을 빼앗기고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순수한 바보'인 파르지팔에 의해 구제되어 성창을 되찾는다. 파르지팔은 성금요일에 왕의 후계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줄거리를 써 본들 동화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 단순한 스토리를 상연하는데 3막, 5시간 남짓의 시간을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생각해 제 정신이라고 보기 어렵다. 바그너의 세계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한 그것은 이해곤란이며 편집광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치제3제국의 선전 담당 장관 괴벨스는 1938년 "유대성과 독일음악은 그 성질부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독일적인 음악과 유대적 음악을 명확하게 구별해 인식하는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3제국의 문화 정책 이데올로기 이론에서는 바하, 베토벤, 헨델, 모차르트는 모범적이고 독일적으로 간주되었으며, 멘델스존, 말러, 쇤베르크, 코른골트, 쿠르트바이엘 등의 유대계 작곡가의 작품은 독일 음악의 모방에 불과하며, 기법에 치우치고, 깊이가 없으며 진부하거나 부도덕하다는 평가되었다. 힌데미트는 유대계는 아니었지만 문화 볼셰비키여서 배척당했다.
  
  이와 같은 나치에 의한 사이비 이론화 작업을 유리하게 만드는 데 대대적으로 인용된 것이 바그너였다. 나치즘 미학에서 바그너야말로 이상적으로 독일적이었던 것이다.
  
  '성배'란 예수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쓴 식기로, 십자가 위의 예수의 상처에서 솟는 피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이와 같은 '성유물'에 대한 숭배가 유럽전역에 퍼졌다. 십자군이 원정에 의해 동방으로부터 갖고 돌아 왔다고 하는 성유물,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피', 성인의 유골, 성의(聖衣)등이 성스러운 것으로 받들어져 그것을 모시는 성당이 각지에 세워졌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 성유물들이 실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부조리한 열광이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에 대한 적의와 하나였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스도 수난극'도 이 시기에 전파되어, 일반 민중들 사이에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살인자'라는 반감을 심게 되었다. 각지에서 유대인 학살 사건도 다발했다.
  
  '성배'를 찾는 행위는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의 은유이다. 암묵리에 소박하고 순진한 그리스도 교도인 파르지팔에 대비되는 것은 교활하고 신용할 수 없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타자로서 배제하고 그것과는 다른 '그리스도교도', '아리아인종', '독일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나르시스틱하게 강조하는 것에 성배 전설은 크게 기여했던 셈이다. 그에 더해 바그너는 이 전설을 먼 과거에의 동경, 헌신과 자기희생에의 도취, 초인이나 천재의 찬미와 같은 낭만주의 미학에 의한 일대 그림극으로 그려내었던 것이다.
  
  * * *
  
  이런 것들를 알고 경계심을 잔뜩 가지고 관람을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다섯 시간 남짓한 상영 시간 내내, 시종 바그너의 악극이 지닌 불가사의한 광택에 매혹당하고 말았다. 내 머리 속에 전에 함부르크에서 본 프리드리히의 그림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높은 봉우리의 정상에 선 남자. 멀리 보이는 저편에는 험한 산봉우리가 이어지고, 지상은 구름의 바다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고독, 우울, 그리고 차가운 고양감.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바그너의 음악세계는 프리드리히의 회화 세계와 강렬한 친화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통설을 몸으로 검증하고 있는 심정이다.
  
 
Caspar David Friedrich, , Oil on canvas, 94 x 74.8 cm, Kunsthalle, Hamburg, 1818. ⓒ프레시안  

  베토벤에서는 문제 있다고 생각되었던 래틀의 지휘가 바그너에서는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왕의 역을 맡은 토머스 함프슨의 가창도 일품이었다. 막이 내린 후 나는 흥분과 동시에 크게 당황했다. 한편에는 크나큰 감명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는 깊은 의문이 있었다.
  
  게다가 교양 있는 백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관객들이, 오늘날의 이른바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그너에 도취되어 있는 것도 나에게는 섬뜩한 것이다. 또한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도취되어있는 일본인 관객의 대부분이 아마도 이와 같은 위험성에 무지할 것이 불안해 견딜 수없는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에 자주 쓰이는 것이 '무한선율'이다. '무한선율'이란 '리듬적, 화성적인 단락의 느낌, 종결의 느낌을 가지지 않는 자유로운 선율'을 의미한다. 즉 '네, 그럼 여기서 일단락'이라거나 '자 이걸로 끝'과 같은 마디를 의식적으로 없애고 있는 것이다. 높이 올라갔는가 하면 다시 내려오고, 내려갔는가 싶으면 다시 올라간다. 커다란 음향이 귀를 울리는가 하면 가늘게 잦아들어가고, 사라졌는가 하면 다시 울려퍼진다. 끝없이 파도치고, 너울거리며,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계속된다. 드디어 끝났나 싶으면 다시 다음 물결의 너울이 밀려온다.
  
  처음에는 당혹감이 있고, 따분함과 피로감이 있지만, 일단 그 무한의 물결에 몸을 맡겨버릴 수만 있다면, 불가해한 관능과 고양감에 잠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 것이다. 아마도 다섯 시간이라는 긴 무대에서 오는 피로나 일종의 감각의 마비가 관객의 감성에 가져오는 효과까지 계산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바그너의 '종합예술'의 경우도 부르크너의 교향곡의 경우도, 음악과 듣는 이의 관계는 말하자면 '대등'한 것이 아니다. 바그너의 장대한 '물결의 너울거림' 속에 청자는 '몸을 맡겨야'하며 몸을 맡긴 청자는 부르크너의 음의 신전을 '우러러야' 한다. (클 H 케이터, <제3제국과 음악>, 아카시마 사노리 옮김, 水声社) 바그너는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자, 바로 이게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그와 같은 감정을 어쨌든지 일단 젖혀두고 말하자면 몰주체, 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얻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만큼 파시즘에 바람직한 것은 없는 것이다.
  
  예술과 정치는 별개다, 라는 말을 들을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범용한 예술이라면 어떤 정치와도 타협할 수 있을 것이다. 바그너의 예술이 뛰어난 점은, 바로 그 둘이 별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고민스러운 것이다.
  
  성배민족(聖杯民族)
  
  코벤트가든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본드스트리트에서 내려, 조용한 밤길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도 아직 바그너의 무한선율이 몸속을 흐르고 있어 신경이 흥분되어 잠이 올 성싶지 않다.
  
  잠들지 못하는 채로 일본에서 가져온 잡지를 집어 들었다. <현대사상(現代思想)> 2001년 12월호, '내셔널리즘의 변모'라는 특집호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는 바빠서 아무리 해도 읽을 시간이 없어, 그대로 여행 가방에 넣어가지고 온 것이다.
  
  거기에 실린 연세대학교 교수 김철의 '한국의 민족-민중문학과 파시즘 김지하의 경우'라는 논문을 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금세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논문에 김지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사명과 과제를 가진 민족입니다. 뛰어난 전통, 영적인 전통을 가졌으면서 오랜 고난 속에서 수난만 받아온 고난의 민족입니다. 한 문명의 쇠퇴기에는 반드시 인류의 새로운 생의 원형을 제시하는 민족이 나타납니다만, 그 민족을 성배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할 당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지금은 한민족입니다. (<사상기행 2>)
  
  또 '성배'라니. 이것은 어찌된 우연인가. 바그너로부터 기분을 바꾸려고 하는 참인데 여기서도 '성배'와 만나고 만 것이다.
  
  김철의 논문은 1970년대 한국 민주화 투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민중문학론(그 대표적 표현자인 시인 김지하과 이론가인 백낙청)이, 오늘날에는 과거에는 투쟁의 대상이었던 파시즘과 심정과 이론을 공유하고 상호침투해 마침내는 공범관계를 이룬다고 하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모순과 배리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주장한다. 과거에는 식민지주의나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 정신적 근원이었던 내셔널리즘이, 오늘날에는 국수주의, 파시즘사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주된 원인은 민족-민중문학론이 '민족'이나 '민중'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묻지 않고, 자기완결적으로 절대화해 온 것이 있다는 것이다.
  
  논문을 읽고 심경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논자의 주장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내게는 처음이 아니었다. 나 자신 1995년에 '김지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을 통해 그의 국수주의 사상으로의 전락을 비판한 적이있다. (<분단을 산다>, 影書房)
  
  김철의 논문이 지적하듯, 김지하가 하는 말은 어리석고 황당하고 논리성을 결여하며 전형적인 국수주의성향을 보이는 것은 틀림없다. 그 점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만 하는 것은 유쾌하지는 않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저 80년대의 어둡고 험난했던 날에 김지하라는 이름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까.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창비, 1982)
  
  1970년대의 김지하의 대표작 <타는 목마름으로>이다. 이것은 신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성배민족'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다. 뒷골목에서 흐느껴 울며, 나무 판자에 남몰래 '민주주의만세'라고 쓰는 사람들의, 자유를 갈망하는 노래이다. 여기에는 의심할 바 없이 한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꿰뚫는 보편적인 인간해방에의 지향이 있다.
  
  나 자신, 1970년대초 두 형이 투옥돼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 살면서 바로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 자립, 한국의 민주화를 절절히 바라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한국이 민주화되어 형들이 해방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믿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날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의의 있는 것으로 만들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주관적 상상에 있어서는 김지하로 대표되는 민족-민중문학을 매개로 해 민주화 투쟁를 하는 한국의 동포들에 속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일본이라는 장소에서 사는 재일 조선인 2세로서 스스로의 생의 의의와 방향성을 모색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살기 위해 필요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
  
  그랬는데, 지금은 어떤가? 그 무렵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형들은 둘 다 살아서 감옥으로부터 풀려났으며 한국사회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잇따른 시련이 계속되고는 있으나 저 '한 시대'는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탑과도 같이 우뚝 서 있던 시인은 '성배의 민족' 운운하는 국수주의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이전에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진정으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였던 한국 민중 신학이 지금은 김지하와 '선민사상(選民思想)'을 공유해 '일종의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시즘'에 전도해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재일 조선인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조선인'을 시야의 밖에 두지 말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디아스포라'와 과제를 공유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자기 중심주의의 함정을 피하는 길에 통할 것이라는 생각을 썼다. ('재일 조선인은 민중인가', <반난민의 위치에서>, 影書房)
  
  물론 김지하 한사람이 1970년대 저항 내셔널리즘의 대표는 아니다. 이 시인은 오히려 과격한 예외라는 견해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70년대를 그와 함께 겪은 사람들 속에서 강하고 이성적인 비판이 나오지 않는 걸까.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피억압민족에 의한 해방과 자립을 위한 운동들이, 언제든 어디에서든 불가피하게 자기중심주의나 국수주의에 전락해버리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외면한 시니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생각은,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인정하게 않으면서 피억압민족의 저항을 눈의 가시처럼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환영받을 것이다.
  
  내셔널리즘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기득권을 의심 없이 향수하면서 타자를 내셔널리스트라고 지칭하면 그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자가 저항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피억압자를 내셔널리즘에 결집시키는 억압구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방향성을 결여한다면 그 담론은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힘으로만 작용할 것이다.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내셔널리즘'이라는 한 마디로 아우르는 것도 하물며 그것을 김지하로 대표하게 하는 것도 단락적인 시각에 불과하리라. 그것은 무엇보다 해방과 자립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것은 내셔널리즘에서 기독교, 자유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정치적 입장의 상이를 지니고, 군사 독재 타도라는 공통의 목표로 묶인 일군의 사람들이 진 역할이었다. '김지하'란 그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을 상징하는 집합명사였다. 시대의 변화, 상황의 진전은 그 집합적 '인격'의 분열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분열과정을 거쳐 한국의 저항 내셔널리즘이 더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사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 가는 가능성을, 나는 단념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한국에서는 1970년대, 1980년대에 군사 정권과 싸운 세대가 사회 각 분야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하나의 시대, 하나의 사회의 주인공으로의 자신에 넘쳐있다. 김철이라는 논객도 자신이 한국이라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련의 한 시대를 살아왔다는 자각에는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의 논의는 저항 내셔널리즘의 바람직한 분열과정을 촉구하고, 그 최량의 자산을 내일에 살리는 것에 기여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어떤 한시대의 변혁을 중심에서 짊어졌던 '우리'는 해체돼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답할 수 있는 다음의 '우리'가 형성된다. 다이나믹한 분열과 종합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시련에 맞서는 새로운 운동과 사상이 단련을 받아갈 것이다.
  
  내 심정이 혼란되어 있는 것은, 나 자신이 그와 같은 다이나미즘의 '밖'에 놓여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국의 동포들과 똑 같은 고통을 체험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 또한 '시련의 시대'의 수인(囚人)의 몸이었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허락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난 30년을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20대부터 50대라는, 사람의 인생의 중심을 이루는 세월이었다.
  
  나와 같은 디아스포라와 한국 동포들이 투쟁을 통해 '합류(合流)'하는 것이 1970년대초에 내가 막연하게 지니고 있던 비젼이었다. '합류'란 한국 민중 신학의 용어이다. 그러나 '합류'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자신이 여전히 '밖'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인생의 유한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런던의 오래된 호텔에서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학 강사(미술사)
   
 
  서경식/일본 게이자이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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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8-11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하가 파시스트로 전락했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의 장모 소설가 박경리도 아주 이상해졌어요.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2005-08-11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5-08-11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책선물을.. 주시면 고맙죠... ^_^
저도 뭐 보내드리고 싶은데.. 말씀만 하세요. 가진건 별로 없지만..

로드무비 2005-08-1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더스 가이드에 계신가요?
처음 알았네요.^^
(님을 즐찾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주변머리가 없어서 여기저기 안 다녔답니다.)
참, 홀로코스트 사진은 출판사 다니는 남편이 보도자료로 필요하다고
급히 연락을 해와서요.^^

urblue 2005-08-11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라주미힌 2005-08-1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로드무비님도 계시나보군용.. 찾아봐야징..
 

국적이란 움직이는 것!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근대적 개념 형성 이전에 ‘이탈자’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스위스 출신 프랑츠 레포르트에서 신라 출신 설계두, 개화기의 서광범까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최근에 일어난 ‘국적 포기자’에 대한 여론재판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이 상황을 단순히 유산층의 병역 면탈에 대한 반감으로만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병역을 천역(賤役)으로 알았던 전근대 지배층의 사고를 이어받아 빈민개병제의 국가를 운영하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특권층에 대한 빈민개병제 희생자들의 분노는 클 수밖에 없다. 살인적인 경쟁 사회를 만들어놓은 한국 지배자들이, 평민의 자손에게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간에 억압적인 규율과 막노동을 강요하고 자기 자손에게는 사회 진출 준비를 더 잘할 특별한 기회를 준다니 기회 균등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이다.

그들은 모두 ‘배신자’였나

그러나 병역 이행에서의 부정이 보여주는 계급 불평등 현실의 다른 측면들을 지켜볼 때도 우리는 과연 이 정도로 흥분하는가? 예컨대 국회의원 등 특권층의 병역 면제자 비율에 대한 통계가 발표될 때도 이 정도의 분노의 파도가 일어나는가? 전방근무 등 가장 어려운 종류의 병역을 이행하는 사람들 중에서 특권층의 자손이 몇명인지 그리고 특권층의 자손이 군에서 어떤 종류의 특별한 근무를 맡는지에 대해서는 왜 우리가 공개적으로 묻지 않는가. 즉,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이번 ‘국적 사태’에서의 분노의 강도를 부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해도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국적 포기자들이 해외동포로서 권리를 박탈당하게 만드는 ‘홍준표 법’의 국회 부결에 따른 성난 누리꾼의 움직임들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국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국적에 대한 의식이 현대사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짚어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검토를 하지 않고서는 국적 포기자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배신자’로 비치게 된 원인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 스위스 출신으로 ‘국적’ 문제에 대한 별 생각 없이 표트르 대제의 총신이 되어 러시아를 좌지우지한 프랑츠 레포르트. 300년 전 유럽에는 아직 국적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국적에 대한 의식의 원류를 찾노라면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근대적인 국민국가에의 소속이란 의미의 ‘국적’이란 말은 한국사에서 극히 최근에 형성된 법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18세기 후반 이후에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봉건적인 ‘신민’의 개념에서 근대적인 ‘시민권자’ 개념으로 이동했다. 예컨대 17세기 말만 해도 제네바 출신의 모험적인 군인 프랑츠 레포르트(1655~99)는 러시아군 장교로 고용된 뒤 차차 명성을 얻어 외국인 출신임에도 표트르 대제의 가장 가까운 총신(寵臣)이자 러시아에서 ‘황제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그 뒤 19세기 중반이 되면 레포르트처럼 러시아군 장교로서 출세하려는 서구인들은 이미 국적 변경 절차를 밟아야 했다. 조선에서 조선 국적 소유자를 최초로 국제법적으로 규정한 문서들은 구한말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들이었고, 국내 최초의 근대적 국적법은 1948년 5월11일에 남조선 과도입법원이 만든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였다. 우리에게 늘 있어온 것으로 느껴지는 이중 국적 불허나 국적 상실과 같은 개념들은 한국 법제도사에서 기껏해야 반세기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국적이라는 일본식 근대적 법학 용어가 차용되기 전에 인접 국가의 신민이 된 ‘이탈자’에 대한 시선은 과연 어땠을까? 물론 한 군주국의 장교로 복무했다가 조건이 안맞거나 갈등이 생기면 경쟁 군주국에 가서 그 군에 복무해도 누구라도 ‘배신자’라 하지 않았고, 국가적 소속이 매우 상대적이었던 18세기 말 이전의 서구에 비해 동아시아에서의 국가 소속 의식은 훨씬 더 뚜렷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편찬의 책임자 김부식이 아무리 유교적인 충(忠)을 중시한 사람이었어도, 신라에서 621년에 당나라로 밀항해 당나라 군대에 입대해 나중에 전장에서 장렬히 죽은 신라의 육두품 준귀족 설계두 이야기를 ‘열전’에 집어넣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불법적 국적 이탈자’인 설계두는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 고구려에 대한 침략에 참전했다가 고구려인의 손에 죽은 당나라 군대 장교로서 반역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진골로 태어나지 않은 죄로 신라에서 그 포부를 펼치지 못해 결국 ‘동족’과의 전쟁에 내몰린 비극적 인물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김부식이 그를 영웅의 반열에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고구려보다 신라를 정통으로 인식한 김부식의 편벽된 역사의식이나 당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도 작용했겠지만 “본국의 신민이냐 타국의 신민이냐”보다는 “어느 정도 충실한 신민이냐”를 훨씬 더 중요시했던 유교의 보편주의적 논리가 고구려인과의 싸움에서의 당나라 장교 설계두의 장렬한 죽음을 신라 전사들의 전장에서의 순국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할 수 있는 근본적 근거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계몽주의자들처럼 역사를 혈연적이며 불변한 ‘아(我)와 피(彼)의 투쟁’으로만 보지 않는다면 본국을 이탈한 타국 신문의 충성뿐 아니라 적국 신민의 충성도 우러러볼 수 있는 것이다. 1658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나선정벌’, 즉 러시아 카자크 비정규군과의 국지전에 나선 조선의 병마우후 신류(申瀏)가 포로로 잡힌 적군들을 위로하면서 ‘군주를 위하여 이렇게도 멀리 온’ 그들의 충성을 치하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논리다.

적국 신민의 충성도 우러러볼 수 있다.


△ 조선 후기 ‘국적 이탈자’ 중 ‘외국인’임을 가장 선명하게 밝힌 사람은 아마도 서재필일 것이다. 그는 조선에 돌아와서 독립신문 발행 등의 계몽 활동을 할 때 꼭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라도 ‘서재필’이 아닌 ‘필립 제이슨’으로 썼다.

물론 ‘국적 이탈자’에 대한 전통 사회의 시선은 꼭 곱지만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부역했다가 나중에 자진해서 왜군을 따라 일본으로 간 자들을 역적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이탈’ 그 자체보다 적군에 대한 ‘부역’이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15세기에 황해도 출신의 정동(鄭同) 등 어렸을 때 조선에서 명나라 환관으로 바쳐진 여러 사람들이 나중에 명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고국에 다녀왔을 때 그들에 대한 조선 사대부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이 경우에는 ‘이탈’ 자체가 문제됐던 것보다는 환관이라는 계층에 대한 양반들의 멸시가 작용한데다 명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여러 횡포를 부렸던 조선 출신의 명나라 대인의 행동에 대한 원망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정동은 본인이 태어난 신천(信川)을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도록 조선 정부를 성공적으로 압박할 정도의 위세를 떨쳤는데, 조선 조정 신하의 입장에서 곱게 봐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명나라로 적을 옮긴 조선 출신의 환관들이 고국에 올 때 조상 분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편의 제공을 받는 등 조선 초기 식의 ‘동포로서의 권리’를 누리기도 했다.

쇄국을 지향한 명나라와 조선의 경우 두 나라 신민의 경계가 분명했는데 그 전에는 달랐다. 예컨대 9세기에 산둥반도의 신라방(新羅坊)이나 신라촌(新羅材)에서 거주하면서 일본과 무역을 했던 신라 계통의 상인들은 일본의 사문서에는 신라인으로 서술되는 반면 신라에 적대적이었던 일본 정부의 공문서에는 주로 당나라 사람으로 기재돼 있었다. 서술자의 성향에 따라 당나라 사람으로도 신라인으로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신라에서는 신라 신민으로 당나라에서는 역시 외국 계통의 당의 신민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실질적 이중 국적의 회색지대는 러시아나 미국 거주의 일부 조선 정치인들이 러시아 내지 미국 국적을 가졌으면서도 조국 정치에 계속적으로 개입한 개화기에도 실제로 존재했다. 예컨대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미국으로 도주해 1892년에 ‘조선의 국왕에게의 모든 충성을 영원히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얻은 서광범(徐光範·1859~97)은 나중에 고국에 돌아와 법부대신(법무부 장관)과 학부대신(교육부 장관)을 지내고 주미 조선 공사(대사)까지 역임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외국 국적을 가져도 일단 조선 신민으로 태어난 사람은 완전한 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의식이었다.

그러면 최근의 ‘국적 포기 사태’ 때 감지될 수 있었던 ‘국적’의 신비화, 절대화는 언제 이루어졌을까? 아마도 그 결정적 시기는 박정희의 집권기, 특히 유신 시대라고 보인다. 민주적 정통성도 민족적 정통성도 결여된 무법 종속 정권이 대민 세뇌 도구로 삼았던 것은 무엇보다 일제 시기 방식의 국가주의였는데, 이 국가주의의 핵심 개념은 ‘대통령 각하’를 모시고 병역 의무를 즐거이 이행하는 ‘대한민국의 선량한 국민’과, ‘악마 같은 이북 공비’나 ‘불온사상’에 전염될 확률이 높아 믿기 어려웠던 해외 동포 사이의 확실한 경계선을 긋는 ‘국적’이었다.

국적의 신비화는 유신시대부터

‘국적 있는 교육’ ‘국적 있는 문학’ ‘국적 있는 역사학’ 이야기가 쏟아졌던 그 시기야말로 국민들로 하여금 ‘국적’을 신줏단지처럼 모시게끔 유도했다. 병영 국가에서의 국적 신성화인 만큼 한국 국적을 보유하는 남성 정상인은 무엇보다 먼저 ‘군인’으로 규정되었다. 학교에서의 교련, 대학에서의 군사훈련, 아무런 대안이 없으며 본인의 의지·신념과 무관한 군복무, 그리고 그 뒤의 예비군 훈련과 방위세 납부는 대한민국 국적 정상인 남성의 ‘당연한’ 생활리듬처럼 돼버렸다. 이와 같은 광적인 군사주의의 분위기에서 전통사회에 존재해왔던 ‘우리’와 ‘남’ 사이의 관용의 ‘회색지대’는 없어지고, 국적 포기자는 마치 전시라면 총살당해야 할 탈영병처럼 인식되고 병역 불이행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거나 ‘비국민적’ ‘반국민적’ 행각으로 개념화됐다. 유신시대가 막을 내린 지 꽤 됐지만, 그 시대에 제도화된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는 지금까지도 우리 현실적 생활을 지배할 뿐 아니라 우리 마음까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흙에 대한 사랑과 그 땅의 민중에 대한 애착이 꼭 여권이나 주민등록증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는 걸, 특정 국가에서 출생한 남자라고 해서 살인 훈련을 받을 아무런 천부적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언제쯤이면 이해할 수 있을까.

참고 문헌

1. 조영록, <근세 동아시아 삼국의 국제교류와 문화>, 지식산업사, 2002.
2. 권덕영, ‘9世紀 日本을 往來한 二重國籍 新羅人’, <한국사연구>, 제120집, 2003, 85~114쪽.
3. 이광린, <개회기의 인물>,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203~242쪽.
4. 도회근, ‘국민과 국적’, <울산대학교사회과학논집>, 제9집, 제2호, 1999, 59~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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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8-1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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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 과 폭력
[한겨레 2005-08-07 19:48]
[한겨레] ‘불륜’, ‘윤락’, ‘음란’이라는 말은 어감과 의미에서 모두 도덕적 판단, 즉, 명백한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지만, 이 단어들처럼 탈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말도 드물 것이다. ‘윤락’은 성매매 구조에 대한 사회적 성찰은 없고, 성을 사는 남성에게는 면죄부를(‘윤락남’이라는 말은 없다), 파는/팔리는 여성에게는 도덕적 단죄를 주장한다. ‘불륜’이란 무엇일까? 인간관계 중 가장 치열한 권력 투쟁인 성과 사랑에서, 상대방을 착취하며 존중하지 않는 것이 윤리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형태의 사랑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가 윤리가 없는 것일까? 제도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랑은 무조건 ‘불륜’인가? 몇 년 전 ‘기러기 아빠’ 대학 교수가 ‘외도’로 인해 “교직원의 품위를 손상했다”며 파면당한 적이 있다. 숱한 성폭력 가해 교수가 여성들의 투쟁과 탄원에도 불구하고 거의 처벌되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면,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성폭력과 성매매 같은 범죄보다 ‘금지된 사랑’이 ‘품위를 손상하는 행동’인 것이다.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은 “프리섹스는 오케이, 성매매는 노”라는 말로, 성매매 반대의 정치학을 요약했다. 여성주의자들이 포르노를 반대하는 것은 성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대개 포르노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 침해를 정상화, 합리화하는 정치적 재현물이기 때문이다. 반대해야 할 것은, ‘음란물’이 아니라 폭력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폭력물은 무제한 허용하면서도, ‘음란물’, 특히, ‘성찰적 음란물’에 대해서는 낡은 칼날을 휘두른다. 지난 달 대법원은 미술교사 부부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나체 사진에 대해 1심과 2심에서의 무죄 판결을 뒤엎고, ‘음란물’이라며 일부 유죄 판결을 내렸다. 시민사회와 여론은 “ ‘음란’ 여부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보다 중요한가”라며, 법원의 판결을 강하게 비판했다. 나 역시 이번 판결이 ‘상식 이하’라고 생각하지만, 이 문제를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의 자유인가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표현의 자유는 공동체의 민주주의와 창조성, 다양성에 기여하지만,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폭력의 자유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는 ‘할 말은 하는’ 신문들처럼, (지배 세력의)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보장된 사회다.

나는 이번 판결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 문제라기보다는, 재판부의 ‘음란’의 정치학에 대한 무지와 그들의 획일화된 신체관이 더 염려스럽다. 미술교사의 작품은 외모가 계급이 되어버린 ‘몸짱’ 지배의 한국사회의 억압적인 몸 이미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인데, 재판부의 수준은 이를 ‘음란’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음란물’ 제작은 더욱 격려되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을 도배하고 있는 ‘쭉쭉 빵빵’한 젊은 여성의 누드는 ‘아름답고’, 배 나오고 처진(대부분 사람들의 몸) 벗은 몸은 ‘음란’한가? 여성 연예인의 누드 모바일 서비스 같은, 주로 여성이 대상이 되는 규격화된 몸 이미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여성들의 목숨을 건 다이어트와 몸매로 인한 열등감과 자기 비하를 생각해보라.

재판부가 ‘음란물’에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몸에 대한 혐오에 기초한 성 보수주의 때문이다. 성 보수주의 사회일수록 성범죄 발생 비율이 높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나이든 사람 등 ‘성 소수자’들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하는 ‘음란한’ 사회일수록 성숙한 사회다. 개개인의 몸의 해방이 민주주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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