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서프라이즈>에 가 보니 유시춘씨가 아주 재미있는 글을 써 놓았는데, 뤼시앙 골드만이 나오고 김우창이 나오고 만해가 나오는데 글을 읽어보고 우습기도 하고 눈쌀이 지푸려지기도 하였다. 이 글을 읽어보고 노빠 계관시인 역할을 하였던 노혜경씨가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동안에 그 역할을 때로는 김정란, 때로는 유시춘이 하고 있구나는 생각이 든다.  

흔히들 학자가 '학설을 굽혀서 이 세상에 아부하는 것'을 '곡학아세'라 그런다.  노혜경, 김정란, 유시춘씨 등은 왜 김대중 정권 때 여당의 모 의원이 이문열을 향해 '곡학아세'한다고 해서 한참 옥신각신했었던 사실을 망각하고 노무현이란 한 인물을 위해 자신이 배운 문학공부를 비틀어 사용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파병하였고 김선일의 죽음이 있었을 때 김정란 시인은 탈을 (persona)를 쓰고 김선일의 죽음을 '인류의 원죄'에 귀속시켜버리며 노무현 대통령의 죄를 '형이상학'의 뒤로 숨겨버렸다. 엄연히 파병이란 산문적 사실이 존재하고 이것을 결정한 것은 대통령이고 이 부당한 결정에 손을 들어준 것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이었다. 결국 시인 김정란이 보르레르가 저리 나자빠질 정도로 써재긴 글은 오로지 노무현을 '형이상학'이란 추상의 울타리로 숨기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물에 대한 종교적 맹신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연정 문제를 두고 이번에는 유시춘씨가 나섰다. 이번에는 뤼시앙 골드만이 <숨은 신>이란 글에서 분석한 '비극적 세계관'을 만들어 노무현을 파스칼과 같은 인물, 만해와 같은 인물로 기꺼이 만들어버렸다. 과연 유시춘씨가 무엇 때문에 '파스칼 - 만해 - 노무현'의 동일적 세계관의 담지자로 만드는가?

골드만은 <숨은 신>이란 글에서 17세기 프랑스 사회를 분석하였다. 17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절대왕정과 타협하여 봉건 세력들에 대립하던 '법복귀족'이 강화된 왕권의 관료기구로 인해 왕권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왕권에 저항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부터 법복귀족들의 '비극적 세계관'이 드러난다.

노무현 대통령을 위한 유시춘씨의 '형이상학적 상상력'은 여기에서부터 작동한다. 생각해보라. 17세기 파스칼과 같은 장세니스트들이 대다수 법복귀족 출신이거나 이들과 가까웠던 사람이고  '법벅귀족'들이 지방의 세수원이나 법정의 변호사로 활약하였듯이 노통 역시 회계와 관련한 변호사 출신이다. 이 얼마나 유사한 그림이던가? 거기다가 허위적이고 타락한 현실에 저항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위치에 있어야만 하는 인물이 현 대통령이라고 생각해보면 그럴싸한 색깔 입히기가 얼마나 좋은가?

유시춘씨가 주장하듯이 골드만에 의하면 허위적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은 이 세상에 굽히고 들어가는 방법 외에 1) 이 세상을 등지는 방법, 2) 세상을 진실된 것으로 뜯어 고치도록 현실 속에 행동하는 방법, 3) 진실의 관점에서는 세상을 거부하나 현실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는 방법 등이 있다. 이 중에 비극적 세계관은 3)에 해당한다. 17세기 프랑스 사회의 파스칼이 그랬고 만해 한용운이 그랬다. 해서 파스칼에 의하면 신은 현재 부재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는 역설이 나온다. 만해가 현실적으로 '님'의 부재를 인정하지만 '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역설이 나오는 것이다.

과연 노통은 이 세 가지 유형 중에 어떠한 것에 해당할까? 유시춘씨에 의하면 3)에 해당하지만 내가 볼 때 노무현 대통령은 이 세 가지 유형 중에 어느 유형도 아니다. 이 세상을 등지고 초월적 진리 속에 빠지기에는 그가 가진 세속적 욕망이 너무나 크다. 노통이 욕망이 크다는 것은 '올인 정치'의 도박정치를 구사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판돈을 크게 걸면 얻는 것도 많은 법이니 노통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정치인이 아니다.  세상을 진실된 것으로 뜯어 고치도록 행동하는 정치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세속적 욕망이 너무나 큰 까닭에 이 세속적 욕망과 세상을 뜯어고치는 것을  맞바꿀만한 의지와 능력도 없는 인물이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렇다고 '비극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도 아니다. 그가 처한 위치가 그렇다. 정치인으로서의 최고 지위에 올랐는데 17세기 프랑스 사회의 '법복귀족'의 위치에 비견될 수 있겠는가?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만해에 비교될 수 있겠는가? 명백히 말하자면 그는 세상의 허위 속에 고뇌하는 이 세 가지 유형 중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굽히고 들어가는 인물에 속하는 것이다.

아마 유시춘씨는 조선과 한나라당 민주당이라는 기득권과 지역주의 세력과 타협을 거부하지만 이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궁극적 진실에 이르지 못하는 역설이 나온다는 점에서 이 글의 착안점을 찾았으리라 생각된다. 유시춘씨에 의하면 이러한 대통령의 뜻도 모르고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조선에 제발로 인터뷰하고 그걸 자랑스럽게 지들 홈피에 올려놓는 촌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무현의 사랑법이 비극적라고 이야기를 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건 인간의 글이 아니라 기도문이다. 17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파스칼이 맞닦드렸던 현실과 21세기 한국 정치질서 구조를 이렇게 링크시켜 이용한다는 것 자체도 어처구니 없다. 만해가 살았던 식민지 구조와 21세기 지역주의 정당이 어떠한 구조적 유사성이 있던가? 유시춘씨기 애써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여러가지 사실들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야 말로 대권 후보되자마자 곧바로 '안티조선'의 기본적 정신을 폐기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조선과 자랑스럽게 인터뷰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노통이 중앙의 사주인 홍석현씨를 청와대로 불러 국빈대접하고 그도 모자라 주미대사로 기용하여 재벌 세력과 굳건한 연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기본적 사실을 애써 감추며 '비극적 세계관'의 담지자로 노무현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유시춘씨의 노통에 대한 태도를 보면 너무나 '희극적 사랑법'을 구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명문이 탄생하는 순간이군요.", "참으로 절절하군요.", "시나브로 눈시울이 적셔옵니다.", 저의 눈을 씻어냅니다." .....

유시춘씨의 기도문 뒤에 붙은 노빠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참으로 절절들 하군요. 노빠 문인들은 문학을 가장한 이런 속물스런 글질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출처: 진보누리 - 평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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