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세화 기획위원
후덥지근한 날씨에 ‘대연정’이라는 끈적끈적한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무엇을 위한 연정인지, 왜 하필 지금인지 등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데,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연정 상대가 한나라당이라는 점이다. 개혁을 내걸고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은 끝내 ‘개혁’이라는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던졌다. ‘지역구조 해체’라는 시대적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과대망상의 나르시시즘일까, 아니면 바보스러움을 가장한 독선과 오만일까, 벌거벗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점을 알려고 하지 않듯, ‘대연정’을 제안한 노 대통령에게 국민은 안중에 없는 듯하다. 프랑스의 좌우동거 사례를 들지만 한참 헛짚었다. 대통령 임기 7년, 의원 임기 5년이던 프랑스에서 대통령은 국회의 동의를 얻는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헌법에 의해 좌우동거를 강요받았다. 그나마 3년 전에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줄이는 개헌을 통하여 앞으로 좌우동거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연정이건 소연정이건, 그것은 국민의 선택에 따르는 것이지 권력을 위임받은 자가 임의로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독일의 사민당과 기민당의 대연정 경우도 마찬가지다.

‘민주당=반개혁 세력’, ‘열린우리당=개혁 세력’이라며 민주당과의 분당을 관철시킨 집권세력이다. 그들의 눈엔 영남의 지역주의와 호남의 지역주의가 똑같은 것인가. 그러나 팽창적 민족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가 같을 수 없듯이, 영남의 공격적 지역주의와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는 같을 수 없다. 민주당을 공격하면서 ‘자, 우리를 봐라, 우리처럼 해야 하지 않니!’라고 영남과 한나라당을 향해 시위를 벌였지만, 역사과정의 산물인 이 땅의 공격적 지역주의는 그 정도 시위로 없어지지 않으며, 선거구제를 바꾼다고 해도 없어지는 게 아니다. 개혁만이, 오직 개혁만이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지난한 과제의 해법이며, 그 때문에 개혁을 주장한 정치세력에게 국민이 표를 주었던 것이다.

지역주의에 대한 노 대통령의 태도는 이라크 파병 과정에서 미국을 대했던 태도와 흡사하다. 힘센 깡패에게는 꼼짝 못하고 약한 동네 약골에게만 큰소리치는 격이다. 집권세력에게서 영남의 공격적 지역주의를 개혁으로 돌파하려는 의지를 볼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역주의가 망국병인 것은 그것이 사회개혁과 건강한 시민의식의 형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곧, 개혁이 궁극적 목적이지 지역주의 해소가 목적일 수 없다. 따라서 개혁을 저당잡혀 지역주의를 극복한다는 발상은 본말 전도 그 자체다. 그러나 지역구조 해체라는 역사적 위업을 떠맡은 노 대통령의 고정관념은 한나라당과 정책적 차이가 그리 크지 않으니 연정 못할 이유가 없다는 발언으로까지 나아간다.

지금 시민사회는 ‘엑스파일’과 관련해 정-경-언-검 유착을 고발하면서 가장 중요한 고리인 이건희 삼성 회장을 조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유착의 한 당사자인 검찰은 불법도청만 조사하며 이상호 기자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바로 그 삼성이 무노조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 자행했던 위치 추적에 대해서는 맥없이 물러섰던 검찰이다. 그런데 집권 초기에 검사들과 토론을 벌였던 노 대통령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대통령 되기 전과 후의 변화무쌍함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따를 집권자가 또 있을까. 미국 앞에서 옷을 벗고 재벌 앞에서 옷을 벗더니, 마침내 영남의 지역주의 앞에서 옷을 벗고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를 뽑은 국민이 초라할 따름인데, 더 벗을 옷이 남아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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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8-0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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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

이 더위에 노무현 씨가 한국인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봉사는 ‘입이라도 다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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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07-30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2년? 3년동안(어느덧) 노무현 정부가 한 것이라고는 '입질'과 끊임없는 정부관료 교체.
한나라당과의 '엄청난 차별성'을 강조하더니 결국 드러내고야마는 둘만의 애정행각.
넌더리가 납니다.
 

개혁은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다

진보의 도그마에도 도전하는 리영희를 ‘원로 찬양’으로 박제해버린 진보 진영…국보법 폐지 등에 생산적 대응은 포기하고 ‘지당하신 원론’만 고집해야 하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언젠가 인터넷에서 자신을 좌파로 여기는 한 논객이 우파는 민중을 “피동적, 수동적 존재로 보면서 미리 한계를 정하는” 반면, 좌파는 민중을 “능동적, 적극적 존재로 보고 그들이 역사를 이끌어간다고 보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걸 보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그 주장의 고색창연(古色蒼然)과 더불어 그런 이분법이 여전히 개혁·진보 진영 일각에서 꽤 먹혀들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다.

좌파와 우파의 ‘민중 상업화’

사실을 말하자면 ‘민중 예찬’은 일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조·중·동의 지면에서 더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민중 상업화’다. 우파가 주로 돈벌이 용도로 ‘민중 상업화’를 써먹는다면, 좌파는 주로 헤게모니 투쟁의 용도로 ‘민중 상업화’를 동원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중 예찬’은 늘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게임이다. 선거나 여론조사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결과가 나오면 ‘민중은 위대’하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반대편의 음모’ 때문에 그렇다는 식의 이중잣대가 만연해 있다.

특히 일부 개혁·진보파의 ‘민중 예찬’은 편의주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나 ‘이건희 신드롬’을 정직하게, 아니 총체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무지몽매(無知蒙昧)의 비극으로 보면서 그것마저도 수구 언론 탓으로 돌린다. 그러다가도 그 무지몽매한 대중이 선거판에서 뭘 좀 보여주면 헷가닥 ‘민중 예찬론’으로 돌아선다. 두개의 전혀 다른 사건에 대한 상호 연관성은 규명되지 않는다.


△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에도 진보 진영은 원칙에만 집착했다.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여당 의원들의 국회 농성.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민중 예찬론’에 경도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편의 입장을 보여온 희귀한 진보 지식인 중 한명으로 리영희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나는 리영희에 대한 개혁·진보 진영의 상투적인 평가와 예찬에 질려 있다. 그의 과거 투쟁을 높이 평가하면서 “내 사상의 은사”라는 식의 회고담 일변도다. 나는 그런 찬사에서 오히려 ‘리영희의 종언’을 암시하는 오만을 읽는다.

내가 보는 리영희의 장점은 그게 아니다. 리영희가 ‘사회주의의 역사적 패배’를 인정한 1991년 1·26 사건의 의미를 평가하지 않고선 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패배’라는 주장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때 리영희를 향해 비판을 날렸던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 나의 논점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지적 성실성’이다. 1·26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리영희는 76살의 고령에도 ‘도그마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의 사상적 제자들은 리영희를 군사독재 정권의 도그마와 싸운 투사로만 기억하면서 그 기억을 박제해버렸으며, 그가 지금 정반대편의 도그마에 도전하고 있다는 건 외면하고 있지만 말이다.

2005년 3월 리영희는 회고록 <대화> 출간을 계기로 오랜만에 많은 발언을 했다. 그는 열린우리당 강경파의 이분법을 비판했으며,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도 전혀 그답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의석이 겨우 절반을 넘을까 말까 한데 무리수를 쓸 수가 있나. 시간과 대세를 살펴가면서, 여유 있게 너그럽게 힘을 운영해야지. …이제는 군부독재 때처럼 무리수를 쓰면서 전면 투쟁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시대가 아니란 말이에요.”

리영희는 <대화>에서 ‘민족적 유전자론’까지 제기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지배한 분열에 대한 환멸을 이야기하면서 사화·당쟁·분당·족벌 정치 등과 같은 퇴행적 행태의 요소가 ‘민족적 유전자’를 형성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품을 때가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민족적 유전자’라는 과격한 용어까지 써가면서 리영희가 말하고자 하는 건 ‘민족적 면책론’에 대한 거부다. 한국의 불행한 현대사에 대해 외부에서 작용하는 의지나 흉계에다가 일괄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리영희는 대담자 임헌영에게 “이제 21세기로 넘어왔으니 우리 민족이 자기만족에 도취되거나 우리 역사가 겪은 실패들을 외세에만 돌리지 말고, 뼈아픈 자기비판을 통해서, 노신이나 프란츠 파농이 그들 동포에게 요구했던 그런 민족적 각성을 통해서,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지혜를 갖게 되기를 바래. 이러한 정신 자세야말로 진정한 겨레 사랑이고 민족적 긍지가 아닐까 싶은데. 어때요, 안 그래요?”라고 동의를 구했다.

<한겨레> 사설들은 비겁했다


△ 리영희씨는 '도그마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의 사상적 제자들은 리영희씨를 군사독재 정권의 도그마와 싸운 투사로만 기억하면서 그를 박제해버렸다. (사진/ 한겨레 탁기형 기자)

임헌영은 일부 공감을 표하면서도 “오랜 역사 속에서 결국 나라를 지킨 것은 지도층이 아니라 국민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도층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지만 국민대중이야말로 나라를 염려한 것 같습니다. 민족적 허무주의로 흘러버리면 너무 서글퍼지는데요”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리영희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민족허무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안 가는구만”이라고 답하면서 “나라를 판 것은 지도층이나 지배계층이고 나라를 염려하고 지킨 것은 대중이라는 관점도 조금 문제야. 그렇게 단순명료하게 이분법적으로 단정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리영희의 이런 주장들이 다 옳다는 게 아니다. 내가 놀랍게 생각한 건 리영희의 <고백> 출간과 함께 양산된 많은 기사들이 위와 같은 주장은 전혀 거론하지 않으면서 오직 ‘원로에 대한 찬양’에 몰두하는 걸로만 끝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진보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기에 그건 분명히 마스터베이션이었다. ‘지적 불성실’의 극치였다. 이런 마스터베이션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여러 차례 사설로 촉구한 <한겨레> 지면에서도 나타났다. <한겨레> 사설들은 모두 백번 옳은 말이었지만 좀 비겁했다. 논점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당시 개혁·진보 진영에서 본 사실상의 논점은 ‘물리적 강행론’ 여부였다. 경호권을 발동해 한나라당 의원들을 국회의사당에서 끌어내고 표결을 강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좌절되자 국회에 ‘사망선고’를 내릴 정도로 급변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열린우리당 의원 유시민은 그 이전에 “우리당이 한나라당 의원들을 끌어내면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그럴 경우 탄핵 때 같은 후폭풍을 맞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그 ‘정치적 치명상’을 두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겨레>는 단 한번도 그 점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할 당위성만을 계속 노래 부르면서 핏대 올리기에만 바빴다. ‘정치적 치명상’을 입더라도 강행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거나, 아니면 ‘정치적 치명상’을 입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을 내놓을 생각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한겨레>가 진정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열망했다면 리영희를 비롯해 개혁·진보 진영에서 나온 여러 건의 ‘물리적 강행 반대론’에 대한 반론을 제시했어야 옳았다. 그게 바로 개혁·진보 언론이 할 일이었다.

나는 <한겨레>가 그런 적극 대응을 포기하고 ‘지당하신 원론’만 역설했던 건 개혁·진보 진영의 ‘아비투스’(습속)로 자리잡은 마스터베이션 기질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 기질은 원론과 상식에만 투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론과 상식은 반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승리한다. 그러나 그건 실속 없는 승리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원론과 상식만으로 대처하기엔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만드는 ‘상식의 폭력’

상식이 잘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상식을 무기 삼아 싸우는 건 필요한 일이거니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매사에 상식을 전방위적 무기로 사용하면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아무리 상식이 잘 통용되지 않는 사회라도 상식만으론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일들이 있는 법인데, 그것마저 해오던 습관대로 상식의 칼로 단순명쾌하게 재단하려 한다면 그건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상식의 폭력’ 또는 ‘단순명쾌의 폭력’은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이 되고 말았다. ‘상식의 폭력’을 행사하는 쪽과 ‘상식의 폭력’이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게끔 끊임없이 ‘몰상식’을 생산해내는 쪽 중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고나 할까.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업보치곤 가혹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인권 문제와 관련해 몰상식이 판을 쳤던 사회에선 ‘민주·개혁·진보’는 ‘용기’ 하나만으로 족했다. ‘머리’는 ‘잔머리’로 빠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중요한 덕목이었다. 주요 행동강령이 저항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할 필요도 없었고, 공부도 오직 저항의 방법론이면 족했다.

87년 6월항쟁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시절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민주·개혁·진보’도 공부해야 하고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쪽으로의 진화가 이뤄지는 듯했지만,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대중주의는 그 흐름을 역류시키고 말았다.

국가적 차원의 상식이 위협받는 비상 상황에서 인터넷의 상식 수호 능력이 위대했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비상 상황에서의 위대성을 면죄부로 삼아 평상시에 인터넷의 그늘을 외면해도 괜찮은 걸까?


△ 인터넷의 대중주의는 비상 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하지만 '상식의폭력'을 양산한다. 탄핵반대 시위. (사진/ 류우종 기자)

인터넷은 디지털식 양자택일을 선호한다. 인터넷의 ‘과잉·편중 참여’와 ‘속도의 경제’는 중간적 입장을 배제한다. 인터넷은 상식으로 무장한 수많은 신진 투사들을 양산해냈으며, 이들은 ‘상식의 폭력’을 대량생산했다. 인터넷에 참여하는 가공할 머리 수에 집착하는 신진 기업가들은 온갖 언어의 성찬으로 인터넷 찬가를 불러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자본의 인터넷 장악과 보수파의 인터넷 적응이 가속화되면서 인터넷의 색깔 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음에도 신진 기업가들은 인터넷 찬가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노무현 정권이 헤매는 이유도 ‘상식의 폭력’과 무관하지 않다. 노 정권은 원론과 상식에만 투철할 뿐 그 다음이 없거나 약하다. 최소한의 원론과 상식마저 유린당했던 과거 역사를 생각해보면 원론과 상식에 투철한 건 미덕이지만, 문제는 ‘원론·상식파’가 이젠 저항세력이 아니라 국정운영을 책임진 세력이 되었다는 데 있다.

과거 저항의 상대는 군사독재 정권과 수구세력이었다. 비극은 지금도 상대를 오직 그들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론이 더 무서운 상대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여론 악화는 무조건 수구 언론 탓으로 돌려진다. 여론을 고려한 대안을 더러운 타협이나 굴복으로 여기는 정서도 팽배해 있다. 지난해 대통령 탄핵 사태와 4·15 총선 때 쏟아진 ‘민중 예찬론’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개혁·진보’가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하는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라면, 개혁·진보 진영 내부의 생산적인 논쟁과 토론을 금기시하는 지금의 풍토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간 나온 논쟁과 토론은 모두 ‘선명한 저항’ 또는 내부 헤게모니 투쟁과 관련된 것이었다. 원론·상식과 각론·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괴리는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걸 섣불리 건드리려고 했다간 원론·상식파의 매를 맞기 십상이다. 내부의 문제는 스스로 곪아서 터질 때까지 내버려둔다는 게 사실상 철칙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개혁·진보파는 언제까지 이런 ‘스스로 곪아터지기’ 게임을 방치할 셈인가? 자신의 신념에만 몰두하는 것에서 삶의 기쁨과 보람을 찾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자. ‘대한민국 경영’을 꿈꾸며 여론을 이끌어가기 위해 애쓰는 싱크탱크들이 크게 늘었다. 이들 중 개혁·진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곳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인터넷에 열혈 투사 중심으로 차려진 ‘중구난방 싱크탱크’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지금 수백만 인구가 재벌 경제연구소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안달하는 형국이다. 이건 두렵게 생각해야 할 사실이다. 모든 ‘실질’은 넘겨주고 ‘명분’으로 마스터베이션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개혁·진보의 싱크탱크는 있는가

개혁·진보의 싱크탱크가 없으니 <한겨레>에게라도 물어보자. 개혁·진보 진영 내부의 문제가 조·중·동의 과장·왜곡 보도로 고발되기 이전에 <한겨레>가 스스로 문제를 미리 찾아내 대응하는 ‘포지티브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건 불가능한가? 개혁·진보의 원론·상식에서 이탈했을 때에 한해서만 노 정권을 비판하는 소극적인 자세가 언론의 본분이라고 보는 건가? 이젠 자신을 저항자로 낮추는 과도한 겸손에서 벗어나 주도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세상을 요리해보겠다는 건방을 떨어볼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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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천> 2002년 8월호



매춘여성 ‘인권’을 위한 최선의 대안은 ‘합법화’이다,최병천



1.매매춘 합법화는 유럽 ‘좌파’의 진보적 정책


“독일 루르지방의 보쿰에 거주하는 안나(32)의 생계수단은 몸 파는 일이다. 지난 20일 매춘을 합법적인 직업으로 인정하는 법률안이 분데스라트(상원)를 통과하자마자 안나는 재빨리 독일 노총(DGB) 산하 최대 산별노조인 공공서비스노조에 가입을 신청한 이후 독일 최초의 매춘업 종사 노조원이 됐다.… 매춘부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법이 새해 1일부터 발효되면 매춘 종사 여성은 합법적인 직업여성으로서 실업보험을 포함한 각종 사회보장 혜택을 받게 된다. 고객을 받지 않을 권리가 주어지고 노동임금(화대)을 떼이면 소송을 통해 강제로 징수할 수 있게 된다. 실직 때엔 실업수당을 받게 되고 연금보험 의무 가입으로 은퇴 후엔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새 법안은 매춘부가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아 매춘 노조가 결성되면 화대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할 수 있게 돼 최초의 매춘여성 파업사태가 독일에서 벌어질 전망이다.”1)




독일 행정법원은 2000년 12월 “매매춘은 더 이상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로 볼 수 없다”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매매춘의 전면적 합법화를 선언하였다. 물론 독일은 합법화 이전에도 호객행위와 광고행위만을 경범죄 수준에서 처벌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매매춘 합법화는 독일 좌파정당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민당과 녹색당2)의 ‘적녹연정’ 선거공약이었다는 점이다. 2000년 12월 매매춘 합법화 판결이 나오자 환영입장과 우려입장이 나란히 발표되었다. 매매춘 합법화를 환영한 곳은 노동단체, 여성변호사협회, 홈볼트 법과대학, 뮌스터 법과대학, 그리고 여성부 장관이었다. 반면 교회를 중심으로 개신교와 카톨릭 쪽은 매춘여성의 인권 보장을 전제로 하면서도 우려의 입장을 발표했다. 그리고 매춘여성들의 자주적 대중조직인 ‘히드라’가 합법화를 환영했음은 물론이다.3)


  그간 범죄자 취급받으며 최소한의 법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던 매춘여성은 합법화에 따라 이제 어엿한 ‘섹스서비스 노동자’가 되어서 노동3권의 보장과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매춘여성들은 이제 우리 나라의 민주노총에 해당하는 독일노총(DGB)의 공공서비스노조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2. 『매매춘과 페미니즘』-여성학자에 의한 ‘국내 최초의’ 매매춘 합법화 주장


『매매춘과 페미니즘』5)이라는 책이 가지는 의미 중 하나는, 저자인 이성숙이 영국에서 여성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여성민우회 국제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여성학 전공자중에서, 그리고 여성단체 활동가 중에서 ‘최초로’ 매매춘 합법화가 주장되었다는 점이 그 무엇보다 주목할만하다. 그간 국내의 논의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과 종교단체들이 ‘금지주의’를 주장하고 김강자 총경이 특정지역의 합법화(규제주의)를 주장했을 뿐 매매춘 합법화에 관한 사회적 공론화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의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매매춘 금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은 오히려 소수이며, 민주주의가 발달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합법화를 채택하거나 최소한 매춘행위를 이유로 행위 당사자를 처벌하지는 않는다.



이 책을 관통하는 일관된 화두는 매춘여성의 ‘인권’이다. 저자는 매춘여성의 인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매매춘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우리들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매매춘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반드시(!) 그리고 필연적으로(!) 매춘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규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 속에서 저자는 매매춘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일일이 반박한다.


  ▲섹스는 부부사이에서만, 그것도 쾌락을 위해서는 안되고 재생산(출산)을 위해서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도덕적 페미니스트의 견해


  ▲매춘여성은 불쌍한 존재이기에 반드시 ‘보호’가 필요하다는 권위주의적 온정주의 페미니스트의 견해


  ▲매춘은 자본주의의 부산물이라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견해


  ▲매매춘은 남녀불평등의 상징이며 매춘여성은 강제된 ‘성노예’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정치학 이론(급진주의)


  ▲친밀함에 기반한 섹스‘만’ 인정되어야 한다는 감상주의적 페미니스트 매매춘 이론


  ▲섹스는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해야 하며 상업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금욕주의 페미니스트의 매매춘 이론.


  위와 같은 주장들에 대해서 저자의 반박논지를 일일이 소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점만 짚고 넘어가자. 매매춘은 “금전적 거래를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성행위”쯤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섹스에 있어서 금전적 거래가 문제라면 결혼제도는 과연 매매춘과 뭐가 다른지 의문이다. 오늘날 ‘중매시장’과 ‘결혼시장’에서 남성들은 섹시하고 예쁜 여성들을 선호하고, 여성들은 서울대 나오고 소득이 짭짤한 ‘士’자 붙는 직업의 남성들을 선호한다.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돈과 섹스의 이해타산적 교환에 있어서 결혼계약이라는 일생일대의 ‘큰 거래’는 <사랑>과 <친밀함>에 의한 거래(?)로 볼 수 있고, 그때그때 계약을 체결하는 매매춘은 법적으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실제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했던 페미니스트들은 결혼제도와 매매춘이 서로 차이가 없으며, 심지어 결혼여성이 매춘여성보다 더 열등하다고 주장한다. 18세기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선구자였던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 『제2의 性』이라는 책으로 익히 알려진 시몬느 드 보봐르, 19세기말 혁명적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였던 엠마 골드만, 러시아의 전설적인 여성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 이들의 견해는 한결같다. 심지어 F.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부일처제 결혼여성-인용자) 이 아내가 보통의 매춘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 임금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도급제로 팔 듯이 자기의 육체를 도급제로 파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체를 영영 노예로 팔아 버린다는 것뿐이다.”7)



결혼제도는 발생의 시점부터 ‘정략결혼’을 그 본질로 하였다. 씨족과 씨족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를 교환한 것이 결혼제도의 기원이다.8)


인류 역사 내내 결혼제도는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수장이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간통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9)


  이러한 결혼제도의 본질은 오늘날도 극히 일부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우리는 그 극명한 사례들을 ‘결혼시장’과 ‘중매시장’에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결혼제도하의 섹스는 고상하고 로맨틱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한다는 환상은 조작된 이미지이며 매매춘보다 딱히 더 나은 점이 없다. 차이가 있다면 결혼제도는 (공식적으로는) ‘평생’ 한 사람하고 섹스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확실히 해둘 것이 있다. 결혼여성과 매춘여성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주장은 결혼여성을 비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매춘여성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매춘여성은 육체를 파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판매한다는 점에서 임금노동자와 똑같다는 맑스와 엥겔스의 100년 전 탁견은 이제 유럽에서 다시 부활했다. 여기에는 1960년대 섹스혁명과 성해방을 부르짖었던 신좌파들의 공이 컸다. 반면 남한의 경우 자칭 진보적인 남성과 여성들조차도 성보수주의에 함몰되어 결혼제도의 부조리에는 침묵하면서 매춘여성과 매매춘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이율배반적인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는 7월 21일 ‘성매매 방지를 위한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그 자리에 참가한 여성위원회 소속의 H여성당원과 C여성당원은 매춘여성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필자는 순간 이 여성위원이 한나라당 여성위원인지, 민주노동당 여성위원인지 혼돈스러웠지만 아무튼 그렇다 치고, 그중 C여성당원은 매매춘의 합법화는 ‘장기매매’의 합법화와 뭐가 다르냐고 반문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답변 드린다. 매춘여성은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지 신체의 일부를 판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매춘여성이 하루 밤 10명, 20명의 손님을 받을 때마다 신장 하나 내주고, 심장 떼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3. 매매춘 ‘금지주의’는 매춘여성의 ‘인권’과 양립할 수 없다!!



오늘날 매매춘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매춘여성의 부류가 두 부류이기 때문이다. 감금과 인신매매 등으로 인한 노예제적 매춘여성이 있고 일반적인 노동자들처럼, 혹은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처럼 ‘돈’을 벌어보고자 선택하는 생계형(자발적) 매춘여성10)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금·협박·폭력·강간·살인·인신매매를 합법화하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노예제적 매매춘은 근절의 대상이다. 문제는 생계형(자발적) 매춘여성이다. 생계형(자발적) 매춘여성을 감옥에 보내야 하고, 벌금형을 물리고,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심문을 하고, 강제적인 보호처분을 하는 것은 ‘인권’에 과연 합당한 것인지 우리는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11)


<이론과 실천> 7월호에서 앞의 이성숙 책을 비판하며 최영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매매춘이 인권의 문제와 양립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지, 매매춘이 불법이냐, 합법이냐의 논란이 아니다”라고. 그러나, 이러한 문제설정은 심각한 착각이거나 기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매매춘 금지주의는 매춘여성의 인권과 양립 불가능하다. 매춘여성의 인권은 오직 매매춘의 합법화가 이루어질 때만(!) 가능하다. 왜 그런지 <표-2>를 살펴보면 명확하다.


  매매춘 금지주의를 적용하는 나라일수록 노예제적 매매춘도 성행하며 노동조건도 더욱 열악해질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매춘여성들이 각종 횡포에 대항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여연이 입법 청원한 「성매매방지법」처럼 생계형(자발적)매춘여성에 대한 처벌조항이 버젓이 살아있는 한, 매춘여성은 자신이 감옥에 갈 각오를 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법적 호소를 할 수 없다. 여연은 생계형(자발적) 매춘여성에 대한 법적 처벌권을 자신들이 버젓이 요구하고 있으면서 ‘웬 자발적 매춘?’이냐는 뻔뻔한 소리를 중단하고, 매춘여성들을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부 비범죄화해야 한다.


  또한 <표-2>를 보면 명확하듯이, 매춘여성의 ‘인권’을 기준으로 했을 때 매매춘 합법화가 왜 가장 바람직한 대안인지는 너무도 명확하다. 문제는 매춘여성의 ‘인권’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기보다는 매매춘은 ‘근절’되어야 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이데올로기이다.



4. ‘성 노동자’라는 존엄한 이름을 돌려주자


우리 나라에 ‘성매매’라는 말을 처음으로 고안했으며 그간 매매춘은 왜 금지되어야 하는지 주장하는 석사 학위 논문을 내기도 했던 원미혜를 비롯한 일군의 매춘지역 현장활동가들이 매춘여성을 직접 인터뷰한 경험담을 모아서 최근 『용감한 여성들, 늑대를 타고 달리는』(막달레나의 집 엮음, 삼인)이라는 책을 냈다. 원미혜는 이 책에 수록된 「늑대를 타고 달리는 여자들과 함께」라는 글을 통해서 매매춘은 근절되어야 할 ‘악’이라고 생각했던 초기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우리는 원미혜의 정직하고 진솔한 고백을 통해서 매매춘 ‘근절’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매춘여성의 ‘인권’이라는 가치는 양립가능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나(원미혜-인용자)12)는 그 (매춘)여성들의 경험에서 억압적 측면만을 듣고자 했었고, 그들의 기대와 자신에 대한 인식 틀은 대부분 허위라고 해석해 버리는 폭력을 저질렀다.(중략)13) 내 안의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성 노동을 인정하는 것은 강간 신화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모든 여성이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결국 더 많은 여성이 성적 착취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피상적인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성매매와 착취는 등가물이 아니며 반드시 동일선상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성매매 반대를 목적으로 구성한 논문을 쓰고 난 뒤 깊은 죄책감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사실 큰 틀에서 본다면 내가 만난 여성들의 문제는 다른 여성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이런 시각에서 다름을 만드는 것은 사회적 낙인과 취급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인터뷰한 성 산업 종사자 누구에게도 내 논문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논문을 썼을까?” 연구 과정에서의 긴밀한 상호성에도 불구하고 내 논문이야말로 연구 대상을 소외시킨 대표적인 결과물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성매매와 관련된 어떤 글도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14)


다음의 글을 하나 더 읽어보기로 하자. 이 글은 ‘갈보’라는 말만을 듣고 살던 매춘여성(들)이 우연한 기회에 참석하게 된 국제 NGO회의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 노동자’라는 말을 듣고 충격과 환희에 휩싸여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되는 과정을 가슴 뭉클하게 보여주고 있다.



“난 그때 얼마나 비참했는지 몰라. …내가 매춘여성인 것 맞어. 맞지만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이 응? 차라리 역 앞에서 왔다든가, 그렇게 말하면 그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먹는데 근데 경찰들이 나보고, 아침부터 갈보년들이 와서 지랄이라고. 나 그때 정말 비참했어. …연주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좀 전에 경찰서에서 당한 성희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담담하게 그저 대수로울 것 없는 일상 중의 한 토막 정도로 얘기하던 그였다. 그런 연주씨가 곧이어 ‘갈보’라는 말을 들었던 경험을 얘기할 때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30년 가까이 성을 팔아온 여성이 그깟 말 한마디에 쌓인 감정을 그토록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털어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갈보’, ‘냄비’, ‘씹창’, 오랜 세월 성매매 지역을 울타리 삼아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말은 아주 익숙한 말이면서도 또한 낯선 말이다. …몸은 체념했으나 마음은 아직도 그 낱말과 생각에 순응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미처 다 느끼지 못한 그들(매춘여성) 스스로의 마음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자존감일 수 있다.15)



우리 나라에서 매춘여성은 흔히 200만 명쯤으로 추산한다. 1970년대, 사회적 냉대 속에서 우리 노동계급의 딸들이 ‘공순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야 했듯이, 오늘날 공순이보다 더 모욕적인 언어로 자기를 비하할 것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있다.


이제 우리가 소외시켰던 노동계급의 딸들, 매춘여성들에게도 그들 본래의 이름을 돌려주자. ‘공순이’에게 ‘노동자’라는 이름을 돌려주었듯이, ‘갈보’라는 불리는 그 여성들에게 “성 노동자”라는 이름을 돌려주자. 우리가 돌려주지 않으면, 진보진영이 그 길에 나서지 않으면 그 부끄러움을 어찌 다 감당하려고 하는가?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이다.


주:


1)「獨, 매춘노조결성 가시화」2001년 12월 24일, <세계일보>


2) 유럽에서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은 60년대 신좌파의 물결을 타고 함께 진행되었다. 그래서 녹색당은 당 간부중 여성의 비율이 60%가 넘는 등 사실상 '환경당'이자 동시에 '여성당'이라고 볼 수 있다.


3) 2001년 2월 7일, <한겨레21>(345호) - [움직이는세계] 매매춘은 서비스업?


4) 섹스노동이라는 단 하나의 차이점을 제외하고, 매춘여성이 겪는 어려움의 문제는 원리적으로 외국인 이주 노동자 문제와 상당히 유사하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라는 점, 노동조건이 비인간적이라는 점, 사회·문화적으로 멸시받는다는 점, 그들이 처한 어려움의 대부분이 오히려 "불법화"로 인해서 발생했다는 점, 또한 그 해결방법이 "합법화"를 통한 노동3권의 보장과 사회보장제도의 적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의심스럽다면 매춘여성이 겪는 모든 문제점을 상기하면서 주어를 '이주 노동자'로 바꾸어보라.


5) 책의 원제는 『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이성숙, 책세상, 3,900원


6) 여성부, 2001, 『성매매 방지를 위한 국외 대안 사례 연구』p.26 와 신혜수의 논문 「매매춘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방안」을 참조했음.


7) F.엥겔스, 1997,『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아침, p. 96


8) 파울 프리샤우어, 1991, 『세계풍속사 上』, 까치, p. 26


9) F.엥겔스, 앞의 책 p.83-p.111


10) 한국여성개발원의 『윤락여성의 사회복귀를 위한 지원방안 연구』라는 1993년의 보고서를 보면 노예제적 매춘은 약 5% 내외로 추정되며, 대부분의 매춘여성들은 '돈'을 목적으로 하는 생계형(자발적) 매춘여성으로 추정된다.


11) 여연은 입만 열면 매춘여성의 '인권'을 언급하면서 「성매매방지법」을 통해서 자발적 매춘여성에 대한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비롯하여 '강제적 보호처분', 정신병자인지 확인하는 심문조항, 그리고 사형조항을 입법청원한 상태이다. 매춘여성을 감옥에 보내는 인권운동도 존재할 수 있는지 그저 황당하기만 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말> 6월호와 8월호에 실린 필자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12) 이후 괄호속 표현은 전부 인용자.


13) 이후부터 (중략)은 '....'으로 표현하고 생략한다. 


14) 원미혜, 2002, 「늑대를 타고 달리는 여자들과 함께」, 『용감한 여성들, 늑대를 타고 달리는』에 수록, 삼인, p.13-p.63


15) 엄상미, 2002, 「'갈보' 혹은 '성 노동자'의 인권론」, 위와 동일, p.84-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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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최저임금투쟁이 나아가야 할 바는 '연대와 확장'이다

최저임금투쟁이 나아가야 할 바는 '연대와 확장'이다
-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관리와 최저임금제도




9.2%의 인상률, 시급 3,100원, 이것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70만 600원. 이 금액이 올해 9월부터 내년 12월까지 적용되는 법정 최저임금이다. 법정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노동자가 일한 대가로 받는 임금의 최하한선이다. 이는 노동자가 생계를 이어가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절대 침해당해서는 안 되는 최소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노동계와 사·정의 입장 차이는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최저임금의 기준과 최저임금에 관한 사회적 적정선을 정하자는 노동계 입장보다는, 경제지표에 따라 결정하자는 사·정의 입장이 주로 관철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 올해 최임위의 최저임금 인상률 결정이 노동위원들의 사퇴, 사·정 위원들의 일방적 처리로 귀결된 표면적 이유이다. 올해 노동계에서 요구한 최저임금의 수준은 상용직 노동자 정액급여의 50%인 815,100원이었는데, 사·정이 내세우는 '유사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생산성에 대한 고려'에 밀려 무산된 것이다. 이에 민주노총과 여성연맹은 '최임위 결정 무효화, 최임위 해체'를 주장하며 즉각적으로 투쟁에 돌입한 상태이다. 최저임금투쟁의 집중시기였던 6월 한 달이 훌쩍 지났지만, 최저임금투쟁의 제 2막이 오른 것이다.

최저임금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이 크게 늘고 있고, 최저임금투쟁 역시 해를 거듭할 수록 그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최저임금 현실화'의 문제가 이처럼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한국 노동자들의 빈곤이 심각한 수준이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시적이고 구조적인 빈곤은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위기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최저임금 현실화'라는 문제가 '최저임금제도의 개선'이라는 문제로 곧바로 치환될 수는 없다. 신자유주의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은 대부분 위기를 관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으며, 이는 대부분 문제의 본질을 가리거나 왜곡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최저임금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저임금제도의 사회적 기능이 온전히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의 보장이라는 측면에만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정책적 의지가 어떻게 관철되는지에 따라, 그리고 다른 정책들과 함께 어떠한 일관된 흐름으로 배치되고 있는지에 따라, 최저임금 제도는 전혀 다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최저임금투쟁에 대한 의의와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보 전진하는 최저임금투쟁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 노무현 정부가 취하고 있는 정책들의 일관된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 신자유주의 하 진행되는 다양한 제도 개혁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의 한국사회 재편 속에서 '최저임금제도'와 '최저임금투쟁'이 가지는 의미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피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신자유주의 하 최저임금제도의 한계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착취관계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재생산하기 위한 조건들, 즉 자본축적의 지속을 결정적으로 보장하는 조건들을 확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어떤 제도가 노동자들에게 얼마만큼의 급여와 혜택을 제공하는가를 넘어서 그 제도가 착취구조의 변화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 포섭되는 과정에서 현 정부가 담당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라면, 그 재편의 맥락에서 국가의 정책 및 정책수단, 제도 등이 판단되어야 한다. 1986년 말에 제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권리'의 마지막 보루로서 인식되고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자들의 대응이 있어왔던 '최저임금제도'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이다.

- 신자유주의 하 국가의 노동시장 관리

신자유주의 국가의 두드러지는 노동시장 정책은 광범위한 산업예비군 조성 및 유지와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노동시장 유인이다. 이때 산업예비군의 확대는 장기화된 실업과 청년실업의 증가로 인해 자연스레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국가가 여성-이주-장애-고령 인구의 노동시장 편입을 촉진시킴으로서 인위적으로 그 규모를 확대시키기도 한다. 국가가 이러한 전략을 채택하는 이유는 경쟁적 노동시장을 통해 저임금과 인력 운용의 유연성을 확보해줌으로써 기업의 노동력 구매에 긍정적 효과를 주기 위해서이다. 아울러 이는 경제의 금융화가 가속화되면서, 단기주의가 확산되고 고용 없는 성장이 반복되는 추세에 조응하는 노동시장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동시장 정책은 '실업률의 안정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늘고 있는 체감실업률'이라는 모순된 상황 전개를 통해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확인된다. 체감실업률의 급격한 증대는 비정규직 증가로 인한 노동시장 왜곡(경쟁적 노동시장에서 취업과 실업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단기 실업자의 수 증가)과 노동시장의 양극화(중간소득 일자리 감소와 최상 및 최하위 일자리 증가)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산업예비군 속해 있는 사람들을 큰 저항 없이 저임금 불안정노동으로 유인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시장 내 수요와 공급을 조정하는 수준에서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가는 사회정책 전반에 대한 '개혁'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동시장과 복지의 연계'가 등장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해체'는 단순히 복지의 축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지의 양적 축소의 문제는 각 국가의 역사적 경험과 세계 자본주의 체계에서의 위계화된 위상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핵심적인 문제는 복지 및 사회정책이 케인즈주의와 결합된 보편적인 권리의 방어라는 측면에서 경제구조조정을 위한 유인 및 관리의 측면으로 이전하는 경향이다. 과거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은 사회적 위험(실업 등)에 빠진 시민들로 하여금 생활상의 심각한 어려움 없이 노동시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이탈하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면, 신자유주의 복지정책의 핵심은 사회 전반(복지의 영역조차도)을 시장과 밀착시키면서 이들을 재상품화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영국의 노동당의 경우 복지개혁을 통해 임금비용이 가능한 한 저렴한 상태에서 산업예비군과 노동시장이 큰 마찰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도록 추동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저임금 고용에 대한 보조금의 개발과 보호장치 마련'이라는 측면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측면은 노동가족세금공제(Working Family Tax Credit), 국가육아전략(National Childcare Strategy), 국가최저임금(National Minimum Wage) 등의 정책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구직 노력을 하지 않는 실업자에게 복지급여 상의 불이익을 주는 정책을 강화하는데, 이는 복지의 수급이 최악의 일자리를 선택하는 것보다 열등한 선택이 되도록 하기 위한 '형벌로서의 복지'를 실현한 것이다. 요컨대 영국은 노동으로의 인센티브 강화와 사회복지에서의 압력이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사회정책을 재조정함으로써 경제 구조조정에 적합한 노동시장 환경을 노동자들의 저항을 우회하면서 조성해낸 셈이다.

- 한국사회에서 저임금 불안정노동의 확산

IMF 이후 제기되는 사회적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빈곤의 확산이고, 이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가속화된 저임금 불안정노동의 확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빈곤의 심화는 경기순환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에 따른 구조적 문제라는 점에서 심각하다. 노동의 불안정화는 필연적으로 임금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시장', 즉 자본에게 부여하여 경쟁적 노동시장을 필연적으로 창출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무방비 상태로 저임금노동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125만 명에 이르고 있고, 그 중 비정규직은 118만 명(94.2%)으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 조사에 따르면, 그 중 기혼여자가 65만 명(51.8%)으로 가장 많고, 그 외 기혼남자 25만 명(19.8%), 미혼여자 19만 명(14.8%), 미혼남자 17만 명(13.5%)순으로 나타난다. 이는 가구의 생계를 담당하는 기혼자가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령계층별로는 55세 이상 37만 명(29.6%), 25세 미만 26만 명(20.5%)으로 고령층과 저연령층이 절반을 차지했지만 25세 이상 55세 미만 계층도 62만 명(49.9%)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통계결과는 저임금 노동이 가계의 생계를 담당하는 기혼자와 노동력 활용이 가장 활발한 연령층에도 넓게 퍼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과거 전통적인 빈민층이 근로능력이 취약한 장애, 아동, 노인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데 비해, 현재는 광범위한 불안정 노동층의 증가가 빈곤의 주된 원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불안정노동과 빈곤의 고착화는 한국사회의 위기를 대변하는데, 그러므로 노무현 정부에게는 이에 대한 관리가 사활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관리'라 함은 (임금상승 압력을 상쇄시킬 수 있는) '경쟁적 노동시장'을 유지하면서, 이로 인한 노동자들의 불만과 저항을 효과적으로 무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반영된 '최저임금제도'는 노동자의 인간다운 생계를 보장한다는 취지와 다른 위기관리 정책으로서의 드러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 최저임금, 노동자 권리의 확장인가 지배계급의 관리인가 : 노동시장 유인과 임금하향 압박에 기능하는 최저임금제도

최저임금제도가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따라 현재 한국사회에서 담당하고 있는 사회적 역할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른바 '경쟁적 노동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광범위한 산업예비군이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도록 유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협약의 외형 속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관리하고 전사회적으로 임금하향을 압박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최저임금제도는 앞서 살펴본 영국의 사례처럼, '노동으로의 인센티브 강화와 사회복지 상의 압력'으로 나타난다. 최저임금제도는 지금 도입 추진중인 EITC(근로소득보전세제)와 함께, 저임금 노동과 불안정노동 일색인 노동시장에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유인책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후자의 문제인데, 그것은 최저임금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저임금 수준의 소폭 인상 정도는 허용하지만, 이를 엄격하게 적용하여 자본으로 하여금 최저선 이상으로 임금을 인상하도록 압력을 넣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현재 최저임금 영향률이 3.2%에 그치고 있고, 일부 공공부문 사업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최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 인상이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결과적으로 현실의 최저임금제도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채, '경쟁적 노동시장'에서의 '가혹한' 노동을 은폐하면서, 많은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최저임금 기준으로 묶어 놓는 효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최저임금투쟁, 현수준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한 발짝 전진할 것인가?

최저임금투쟁은 이제 노동자운동을 포함한 전체 민중운동 내에서 중요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연맹 소속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투쟁이 매우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노동자운동 내에서 미조직 대상이자 소외의 대상이었던 이들이 주체화되는 과정은 분명 노동자운동의 중요한 상징성을 획득하였다. 최저임금투쟁이 침체일로에 있던 노동자운동의 對사회투쟁에 유의미한 활력소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드러나듯이 미조직 노동자로서 노동권의 예외자로 존재해왔던 저임금 불안정노동 종사자들이 노동운동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경로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최저임금투쟁의 중요도는 매우 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저임금투쟁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는 신자유주의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현 정부의 기만적인 노동시장 정책과, 허구적 사회협약 및 사회정책 개혁의 본질을 폭로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공간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최저임금제도가 현 정부가 주력하는 '경쟁적 노동시장'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사회적 보호막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과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허구적 사회협약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근로연계복지'에 있어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볼 때 최저임금투쟁의 사회적 확장은 매우 가능성 있어 보인다.

그러나 현 최저임금투쟁에 대한 비판적 지점들이 존재한다.

첫째, 최저임금투쟁의 실리적 경향이다. 이는 최저임금투쟁이 최저임금위원회를 압박해서 높은 인상률을 쟁취하는 방향으로 경도되는 것을 의미한다. 매년 6월 인상률을 결정하는 최임위가 열리는 시기에만 최저임금투쟁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최저임금투쟁이 협상일정을 중심으로 배치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둘째, 불안정노동과 이를 양산하는 '경쟁적 노동시장'이 최저임금을 사실상 저임금 노동자들의 최고임금으로 고착화시키고 있는 점에 대한 발본적 문제제기가 여전히 부족하다. 특히 구조적으로 저임금을 강제하는 최저가 낙찰제도나 용역제도 등은 최저임금투쟁의 당면과제이다.

마지막으로, 최저임금투쟁이 확장된 대중투쟁으로 온전히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최저임금을 매개로 확장된 투쟁의제들을 발굴하고, 이를 각 지역과 사업장에서 일상적 투쟁으로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최저임금투쟁을 노동자들의 공동임금투쟁으로서 적극적으로 사고하여 지역 연대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 살려야 한다.

실질소득의 감소라는 점에서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권리가 축소되는 가운데 단지 임금최저선의 인상이라는 데 국한된다면 최저임금투쟁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권리의 확장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노동시장 통제전략에 조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의 기조가 '저임금 불안정노동의 확대를 통한 자본의 이윤율 제고'이고, 이를 위한 노동시장 유인책, 광범위한 산업 예비군 조성을 통합적으로 입안하고 보았을 때, 최저임금투쟁은 노동자들의 소극적 방어의 측면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투쟁의 의제를 확장하고 다른 운동들-빈곤을 철폐하기 위한 운동이나 지역운동-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 일상적인 지역 공동투쟁을 활성화하는 것은 최저임금투쟁이 현수준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한 발짝 전진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관건적인 과제일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투쟁이 나아가야 할 바는 '연대와 확장'이다.

기존 우리의 운동은 부문과 영역의 구분을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는데 이는 정권과 자본의 사회재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주된 원인이었다. 지난 수 년 동안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가 폭력적으로 관철되고 구조화되는 과정을 경험했고, 정권과 자본이 선동하는 '대세'에 밀려 그 폭력에 무기력했던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전체 민중운동이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 대중적인 운동의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각 운동들이 영역과 부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제도 개선'투쟁에 머무르면서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주장하는 '대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근로능력이 있는 자에게도 급부를 제공하고 생계급여의 수준을 높이는 등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이전의 생활보호제도에 비해 진보적인 성격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정을 밟은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공공부조 프로그램의 강화는 노동유연화가 양산하는 실업자 및 저임금 노동자들의 최저한의 생활을 보장하여 사회적 불안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최저임금제도의 활성화 역시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를 가진다고 볼 수도 있으나, 1997년 이후 최저임금위원회 내 공익위원들이 한 해는 노동계 편을 다음 해는 재계 편을 드는 방식으로 최저임금 수준을 관리해오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최저임금제도는 여전히 한계적이고 때로는 부정적이다. 최저임금제도가 (1인 최저생계비에 비해 최저임금이 높게 인상되면서) 복지수급 대상자들에 대한 노동시장 유인효과가 점차 강해지고, 정부의 노동시장 부착형 복지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 실제 강하게 임금을 하향압박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최저임금투쟁을 단면적으로 사고해서는 안 된다.

노무현 정권은 내용에서는 비정규직과 빈곤층을 '적당히' 보호하는 '비정규보호법안'이나 '사회적 일자리 만들기' 등 사회협약을 추진하고 있다. 당장 올해 최저임금 인상 결정과정에서 정부측 공익위원들은 최저임금이 소폭 상승되는 수준에서 합의안을 제출했다. 합의라는 틀을 추구하면서 비정규직이나 실업·최저임금의 문제를 적당한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조그만 성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투쟁의 원칙이고, 기존 운동의 영역에 갇히지 않는 열린 구조의 대중운동으로의 확장, 연대를 통해 지역과 새롭게 형성되는 운동주체에 기반한 운동공간의 창출이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했을 때, 신자유주의 위기관리정책의 조삼모사(朝三暮四)식 기만성을 경계하면서, 대중운동의 확장과 발전을 가져오는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최저임금투쟁의 발전방향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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